영월지맥 4구간 중산재(도득골재)에서 뱃재(구38번국도)까지 산행후기

2016. 7. 11. 08:30★ 기맥,지맥/영춘영월지맥[완료]


영월지맥 4구간 중산재(도득골재)에서 뱃재까지



산 행 지  : 충북 단양군 영춘면/ 제천시 흑석동, 자작동, 고암동, 송학면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가창산(해발820m) 영월지맥4구간


◈  산행일시 : 2016년 7월16일(토요일, 당일산행)


산행코스 : 도득골재(중산재, 참나무쟁이재)-523봉-522봉-550.5-598봉(벌목지)-591봉-521봉-임도-

                      602봉(갑산지맥분기점)-672봉-가창산-707봉-광산터-682봉(일자봉)-임도(설매산 분기길)-

                      524봉-문영월재-567.7봉-524봉- 조움재(조을치)-왕박산시루봉(해발527m)-38번국도 지하도

                     삽고개(2차선도로)-삼거리-346봉송전탑-고암정수장-뱃재(구 38국도)


산행시간 : 10시00분~16시00분(6시간, 식사 및 휴식시간 포함)


산행거리 : 약12.9km(지맥12.9km, 접속구간0km), GPS거리(12.19km)


◈  산행인원 : 20명


◈  산행날씨 : 폭우가 쏟아지고 습도가 높은 우중산행(19~23)


◈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 도상거리(11.6km),실제거리(12.9km),소요시간(5시간), GPS 거리(12.19km)

     중산재-1.4km/1.6km(30분)-550.5봉-3.1km/3.3km(1시간20분)-가창산-3.0km/3.3km(1시간20분)-567.7봉-

     1.6km/1.8km(40분)-왕방산 시루봉-1.1km/1.3km(30분)-서문리도로 삽고개-1.4km/1.6km(40분)-뱃재

     

    * 중산재-523봉(0.7km)-522m봉(1.0km)-456m안부(1.4km)-550.5m봉(1.7km)-477m안부(2.1km)-598m봉

      (2.6km)-591m봉(3.2km)-임도(3.5km)-516m안부(3.6km)-611m봉(4.1km)-672m봉(4.4km)-661m봉(4.6km)

      -가창산가림길(5.0km)-가창산정상(5.4km)-693m봉(6.0km)-폐광산지대안부(6.7km)-일자봉(6.9km)-610

      m임도(7.4km)-524m봉(8.0km)-문영월재(8.4km)-567.8m봉(8.6km)-560m갈림길(8.8km)-524.2m봉(9.3

      km)-조움재(9.7m)-왕박시루(왕박산갈림길. 무인산불감시초소. 7.4km)-신38번도로(11.2km)-삽고개

      (11.7km)-49번송전탑(12.1km)-송전탑(12.3km)-수도사업소철조망(12.7km)-뱃재(38번국도. 13.3km)


◈  교통 : 경진관광

 

◈  산행 상세안내

지명

거리

(km)

출발시간

소요시간

비 고(GPS거리)

중산재

-

10:00

-

해발343m,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에서 대전리를 넘어가는 고개, 2차선 도로, 절개지 옹벽으로 진행

550.5봉

1.6

10:59

59분

해발550.5m, 정상부에는 식별이 어려운 삼각점이 있고 조망은 없음

가창산

3.3

12:48

1시간49분

해발820m,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단양군 어상천면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산

567.7봉

3.3

14:10

1시간22분

해발567.7m, 식별이 어려운 삼각점이 있고, 조망 없음

왕방산시루봉

1.8

14:52

42분

해발m,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송학면,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산, 산불감시카메라, 오아박산 시루봉 안내판,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 

삽고개

1.3

15:25

33분

해발m, 제천 송학면에서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옛지명:서면)으로 가는 고개, 전신주 우측편 능선으로 진행

뱃재

1.6

16:00

35분

해발m, 제천시 고암동 고척마을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넘어가는 고개, 38번 국도 4차선 도로 
















마루금거리

12.9


6시간


접속거리

0


0분


총거리

12.9


6시간


GPS거리

12.19




중산재(中山峙, 해발343m, 도득골재, 참나무쟁이재),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에서 대전리를 넘어가는 고개, 절개지 좌측편 끝 웅벽으로 산행 시작

양천허씨묘지 통과(묘지를 통과하면 급경사지가 나오고 우회하여 진행)

523봉(참나무쟁이봉)

522봉

능선분기점, 522봉에서 약4여분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방향 급경사 내림길로 진행

△505.5봉, 식별이 어려운 삼각점(오늘 진행하는 구간에서 제일 힘든 오름길)

벌목지대 통과, 좌측방향으로 내려 진행

안부 갈림길, 직진으로 진행(우측편 등로길이 선명함으로 독도에 주의)

598봉 통과

591봉  통과

521봉 갈림길에서 우측편으로 약10m 진행후 좌측편 임도길로 내려 진행(벌목공사 지점이라 등로길도 없고 벌목한 나무들이 울타리로 이루어져 있어 독도에 조심하여야 한다)

임도길 접속, 직진으로 진행

안동권씨 부인 김해김씨의 가족묘지 뒤편으로 진행(팁:묘지 좌측편 임도길로 진행후 우측방향으로 약60m 진행후 좌측편 능선으로 진행)

임도길 접속, 직진으로 오름길 진행(팁:임도길 우회하여 진행후 좌측편 능선으로 진행)

602봉(갑산지맥분기점),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진행(갑산지맥은 좌측방향)

672봉

가창산(해발820m),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단양군 어상천면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산, 이정표, 삼각점, 정상석은 없음,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진행

능선분기점 통과, 가창산정상에서 약14여분 진행후 희미한 우측편 등로길로 진행, 좌측으로 제천시 두학동 장치미 마을방면이고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진행(좌측방향 등로길이 선명하여 알바하기 쉬운 지)

송수관 통과(송수관을 지나 내려서면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방향으로 진행)

폐광터 통과, 우측방향 절개지 날등으로 진행

T능선분기점 통과, 폐광터에서 약6여분 진행하면 갈림길이나오고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682봉(일자봉), 좌측방향으로 진행(주의구간:직진방향이 선명하여 알바하기 쉬운지점)

임도길 접속,(682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약5여분 내려서면 임도도착),영월지맥 마루금은  직진으로 진행

설매산 갈림길,(임도길에서 직진으로 약2여분 진행하면 도착)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진행(좌측방향 등로길이 뚜럿하여 알바하기 쉬운 구간), 이정표(←설매산 2.63km,↑문영월재 1.0km →가창산 2.6km)

524봉

문영월재, 충북 제천시 흑석동에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를 넘어가는 고개, 급경사지 오름길 진행

567.7봉, 삼각점

능선분기점 통과, 567.7봉에서 약2여분 진행후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주의구간: 우측방향 등로길 뚜럿하여 알바하기 쉬운 지점)

서문리갈림길 통과

542봉

조움재(조을치)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에서 제천시 흑석동 서문리로 넘어가는 길

능선분기점 통과, 조움치에서 약6여분 진행후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무명봉 통과

527봉(왕박산분기봉), 무인산불감시카메라, 영월지맥 마루금은 좌측 서문리방향으로 진행(왕박산정상은 우측방향으로 마루금에서 약600m 벗어나 있음)

능선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좌측방향 등로길이 선명하여 알바하기 쉬운지점 독도 주의)

철조망 통과(왕박산 시루봉에서 약13분 정도 내려서면 철조망이 설치된곳이 나오고 철조망을 넘어 우측방향으로 계속하여 내려선다)

임도 통과, 우측방향으로 진행

38번 국도 굴다리 통과, 굴다리 지나 좌측편 배수로 절개지를 올라 마루금 접속하여 진행

삽고개,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에 있는 고개, 2차선 도로, 좌측방향 전신주 옆으로 진행

무명묘지 통과

T분기점 통과, 삭고개에서 약5여분 진행후 갈림길이나오고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49번 송전철탑 통과

10번 송전철탑 통과

고암정수장 철조망, 10번 송전철탑에서 약10여분 진행하면 철조망앞에 도착하고 좌측방향 철조망 따라 진행

고암정수장 정문

뱃재, 제천시 고암동 고척마을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넘어가는 고개, 38번 국도의 4차선 도로

산행 종료

 

 

 

 

 


 

 

 


 

 


영춘지맥[寧春枝脈]


영춘지맥이란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던 백두대간이 오대산의 두로봉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쳐 한강기맥을 일구고, 한강기맥을 일군 산줄기는 불발현과 구목령 부근에서 또 다른 산줄기를 만들어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이어진다.
영춘지맥은 영월에서 춘천을 이어주는 산줄기라 하여 이렇게 명명하였으며 도중에 한강기맥과 그 맥을 함께 한다. 아울러 영춘지맥은 남한강과 북한강 및 남한강과 북한강의 지류인 평창강, 섬강, 소양강, 홍천강 등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 품안에 용암천, 유동천, 흥정천, 내촌천, 장남천 등이 흐르고 있다.


박성태님이 영월지맥과 춘천지맥을 종주한 후 지맥이 갈리는 한강기맥의청량봉~장곡현~구목령~삼계봉 구간 11km를 합하여 약 272여km를 "영춘지맥"이라고 불렀다는데 한강기맥을 걸으면서 느낀 것은 엄연히

춘천지맥과 영월지맥이 확연히 구분이 되어 있는데 영춘지맥으로 부르는 것에 대하여 난 그 부분에 조금은 동의하기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영월지맥으로 부르기로 한다


영월지맥이란 한강기맥 상에 있는 삼계봉(1,065m)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한 산줄기가 태기산(1,261m), 덕고산(705m), 봉화산(670 m), 풍취산(699m), 매화산(1,085m), 치악산 비로봉(1,288m), 향로봉(1,043m), 남대봉(1,182m), 감악산(954m), 감악봉(886m), 석기암(906m), 용두산(871m), 왕박산(598m), 가창산(820m), 삼태산(876m), 국지산(626m), 영월의 태화산(1,027m)을 거쳐 남한강에서 가라 앉는 약 136km의 산줄기를 말한다.(삼계봉(1,065m)은 홍천군, 평창군, 횡성군 등 3개 군이 만나고 홍천강, 평창강, 섬강 등 세 강이 갈리는 곳이나 이름이 없어 신산경표 저자 박성태님이 종주한 후 셋의 경계가 되는 봉우리란 뜻으로 "삼계봉"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영월지맥 도상거리(134.5km)

삼계봉분기점~5.1~태기산(1258.8)~8.5~깎은재~6.1~검두재~9.0~고들고개~1.4~덕고산(702.8)~4.7~봉화산(667.8)~7.4~풍취산(697.2)~4.7~매화산(1084.1)~8.1~치악산비로봉(1282)~5.6~향로봉(1041.4)~3.2~남대봉(1180)~3.1~대치~9.1~싸리치~4.4~감악봉(885.9)~2.5~석기암(905.7)~5.5~용두산(871)~7.4~배재~2.4~왕박산(597.5/-0.6)~4.6~가창산(819.5)~11.1~삼태산(875.8)~2.7~해고개~7.3~국지산(625.6)~7.0~태화산(1027)~3.6~샘골





◈ 주요지명 안내


중산재(中山峙, 해발343m)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에서 대전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제천에서 영월과 쌍용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있고 우측 아래 대전리에 참나무쟁이 마을이 보인다. 예전에 참나무가 많아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며  중산재라는 지명은 산과 산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고개라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사람들은 장재(場峙)라고 부른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 이곳 어상천 사람들이 제천에 있는 장(場)에 다닐 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장재(場峙)’ 또는 ‘장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바람에 이곳에는 장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도둑들이 득실거리기도 한 곳이란다.



어상천면 석교리(石橋里)

어상천면 석교리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하천이 흘러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돌다리가 있어 석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석교, 배락바웃골, 십일시장터, 절골, 장밭, 장안마을

등이 있으며 석교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석교리의 그것과 같다.

배락바웃골마을은 벼락을 맞아 갈라진 큰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십일시장터마을은

열흘마다 장이 서던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절골마을은 절이 있었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장

밭마을과 장안마을은 조선 때 있던 목장의 바깥쪽과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갑산지맥(甲山枝脈)

영월지맥 가창산(歌唱山.819.5m) 동남쪽 0.9km 지점인 602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산(甲山.747m),호명산(虎鳴山.479m. →0.3km),295. 1m(금수지맥분기점),성산(城山.425.6m), 티재,중앙고속도로 제천휴게소,국사봉(國師峰,632.3m),대덕산(大德山.577m →1.5km), 미산(馬尾山.600.8m),부산(婦山.780.4m → 1.4km)을 지나 제천천이 남한강 충주호에 합수하는 충주시 동량면 사기리까지 이어가는 도상거리 46.2km 의 산줄기로 제천천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가창산(歌唱山, 해발819 m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단양군 어상천면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조선시대 연산군 때 의리있는 두 선비의 전설로 알려진 가창산(歌唱山)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갑자사화로 부모를 잃은 서울 명문가 출신의 두 친구가 양평 용문산에서 10년 넘게 수학하였다. 어느 삼짇날 스승의 권유로 속세로 돌아온 이들은 절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자로서 후진을 양성하자는 맹세를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한 친구는 대장부로서 벼슬길에 나아가 높은 포부와 경륜을 펼치고 싶어 알성시를 보아 장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안락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이 우정을 배신하였음을 깨닫고 옛 친구에게 사과하고자 각 지방관들에게 친구를 찾아 달라 부탁하였다.

얼마 뒤 강원 감사를 지내던 친구에게 옛 친구의 소식을 들은 그가 제천현에 있는 산에 은거하는 옛 친구의 집을 찾아가니,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던 친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며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

두 사람이 소박한 저녁을 먹은 뒤 정담을 나누고 시를 지어 화답하며 우정을 나누자 친구의 아내도 동화되어 두 사람의 정담에 맞춰 성심껏 가야금을 타니, 친구는 아름다운 가야금 가락에 넋을 잃었다.

이처럼 한 여인의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이 친구를 즐겁게 했다고 하여 후에 사람들이 이 산을 가창산(歌唱山)이라 하였으며 또한 피난살이로 고달픈 왕이 시름시름 앓으니 신하들이 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노래

하고 춤을 추었다 하여 붙인 이름 이라고도 한다



문영월재

충북 제천시 흑석동에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를 넘어가는 고개


조을재(鳥乙峙 490m)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에서 제천시 흑석동 서문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그 지형이 조리형국이라 조리재라고 부르며 곡식이 많이 모여들어서 큰 부자가 나는 명당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영월로 가는 관행(官行) 길이었다고 한다.무동산,왕박산, 삼태산이 삼각형으로 우묵하게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조리와 같아 붙여진 이름으로 조올치와 가창산 사이에 제천 방향으로 나란히 솟은 산봉우리는 아래부터 차례로1봉, 2봉, 3봉, 땀봉으로 부르며 영진지도에는 조을치로 표기되어 있고 이 지역 사람들은 조리재로 부른다.

조을재 정상에는 민초들의 만든듯한 돌탑하나와 이정표가 서 있고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엔 무속인들이 걸어논 듯한 천들이있다.

조을재의 전설

옛날 충청도 지방에 김씨 성을 가진 이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키도 작고 성품이 몹시 경망스러워 주위 사람들은 이름 대신 '조리'라는 별명을 만들어서 불렀다. 그런데 김조리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조리는 혹시 아버지의 묘를 잘못써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유골을 괴나리 봇짐 속에 소중히 모신 다음 명당이 많다는 강원도를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김조리가 충북과 강원도의 경계인 왕박산밑 점제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었다.


그는 주막집의 목로방(木盧房)에서 장사꾼들과 함께 자면서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잠자리에 들 때에야 머리맡에 모셔 놓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눈을 떠보니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은 없어지고 참빗 장사꾼의 큰 보따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유골 봇짐을 잃어버린 그는 대성 통곡을 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김조리는 유골 봇짐과 바꾸어진 참빛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참빗이 잘 팔려 큰 돈을 벌었다

.

그 후에도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어 몇 년 안가서 장가도 들고 땅도 많이 사서 큰 부자가 되었다. 한편, 그 주막집에서 함께 자던 참빗 장수는 김조리가 봇짐을 소중하게 여기므로 혹시 무슨 보물이라도 있는게 아닌가하는 욕심으로그날 새벽 봇짐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쳐서 조리재 중턱에서 봇짐을 풀어보니 뜻밖에도 사람이 유골이 나왔던 것이다. 참빗장수는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나서 그 유골봇짐을 큰 참나무 밑에다 휙 던져버리고

조리재를 내려오다가 아!나도 조상을 모시는 사람인데 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참나무 밑에 유골을 묻어준 후 남의 집 머슴살이를 전전하다가 10여년이 지난 후 충청도의 큰 부자집 머슴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추석이 다가와도 아버지 산소에 벌초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머슴은 숫돌에다 낫을 갈면서 "주인 어른,올해도 벌초를 안 가시렵니까?" 하고 물으니 "나도 예전에는 자네처럼 머슴살이도 하고 행상도 했다네. 그러나 하도 되는 일이 없어서 아버님의 유골을 강원도의 명당 자리로 모시고 가던 중에 어느 참빗장사가 실수로 봇짐을 바꾸어 가는 바람에 아버님의 유골을 잃어버렸다네." 주인의 말을 들은 머슴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가 바로 그 때 유골을 훔쳐간 참빗장사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주인은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아버님의 유골을 찾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김조리는 이름난 지관을 모시고 머슴과 함께 이곳 왕박산 줄기의 큰 참나무 밑에 있는 아버님의 묘를 찾아냈고 지관은 패침을 놓고 유골이 묻힌 묘를 한참 주시하더니 무릎을 치면서 "어느 유명힌 지관 어른이당대에 발복하는 조리형국의 혈에다 묘를 잡아 주었소?"라면서 놀라는 것이었다.그 후 김부자는 참빗장사였던 머슴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주고 친형제처럼 의좋게 살았다고 한다.


무등산(無騰山:620m)

충북 제천 송학면과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경계에 솟아 있는 무등산(無騰山)은 ‘없을 무(無)'에 ‘베낄 (謄)'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산으로 무등산의 가까운 남쪽에 위치한 왕박산(王朴山 597.5m)은 고려의 한 왕이 왕비와 대신들과 함께 이성계를 피해 들어와 피신한 곳이라고 한다.

 

무등산(無騰山)은 1914년 경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무둥산[舞童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세가 춤추는 소년의 형상이어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는 무등산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피난 온 왕이 고달픈 피난살이로 시름시름 앓자 신하들이 목말을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에 가탁하여 목말의 방언인 '무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왕씨 성을 가진 왕은 성을 박씨로 바꿔 살았는데 당시 본관은 의흥으로 현재까지 의흥 박씨는 존재하고 있다. 주변 산군을 이루는 무등산과 한편 왕박산보다는 좀더 남쪽 아래에 솟은 가창산(819.5m)의 이름 또한 이 유래와 관련 있다.

 

무등산은 왕이 고달픈 피난살이로 시름시름 앓으니 신하들이 무등을 태우고 다녀서 무등산이라 했으며,

가창산은 왕을 위해 신하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 연회를 베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무등산은 산세가 춤추는 소년의 형상으로 무동산이라 했다고도 전하나 지금 현재 전해지는 한자마저 달라 확인할 길이 없으며 이 외에도 주변 지역명인 ‘절골'은 절이 있었다고 절골이며, ‘사기골'은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승지골'은 말 그대로 스님이 살던 곳이란다. 왕박산 갈림봉인 527봉에서 무등산까진 약 3.7km이니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왕박산과 무등산의 형태는 마치 여인의 젖가슴처럼 보인다.


왕박산(王朴山:598m)

충북 제천시 송학면과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 일가를 처형 하자 고려의 왕족으로 승지(承旨)벼슬을 지낸 왕을규(王乙規)가 화를 피하기 위해

이 산으로 숨어들어 성씨를 그의 외갓집 성씨인 의흥 박씨(義興 朴氏)로 고치고 살았다 하여 그 후로 이 산을 왕박산이라 부른다.

고려의 장수였던 이 성게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여 새 왕조 개창에 반대하는 권문세족들을 무너뜨리고 온건개혁파인 사대부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왕족이었던 왕을규(王乙規)도 멸족을 당할 처지가 되었는데, 그의 형인 이부상서(吏部尙書) 왕갑규(王甲規)는 중국으로 망명하고 고려에 남은 왕을규는 외갓집 성을 따라 의흥 박씨(義興 朴氏), 즉 박을규로 행세하며 영춘현 차의곡(현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에 피난와 살았다 그래서 의흥박씨를 흔히 왕박씨(王朴氏)라고 하며 3대까지 영춘에 살았으나 영춘에는 현청이 있고,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라 신변의 불안을 느끼자 4세손 박근부터 왕박산 아래인 제천시 송학면 만지동(음지 만지실)에 은거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의흥박씨의 관향조인 박을규(朴乙規)의 본성은 왕씨로 고려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을 하자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춘성(春城)[현재 단양군 영춘면] 거의동(車衣洞)에 둔거하였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 외가(外家)의 성(姓)인 박씨를 따랐다. 그 후 후손들은 관향을 의흥(義興)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으나, 중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후손인 박득서(朴得瑞)로부터 대(代)를 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세조(世祖) 때 좌익공신인 박근(朴瑾), 중종(中宗) 때 박승종(朴承宗) 등이 저명하다


왕박산시루봉(해발527m)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송학면,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개념도상에는 527봉 또는 왕박산 갈림길로 되어 있고 “왕박산 시루”라고 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왕족과 유신들은 뿔뿔이 흩어져 초야에 묻히거나 멀리 낙도에 은신하였는데 조선의 조정에서는 고려 유신들을 찾아 회유하여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많은 왕족과 유신들은 숨어 버리고 말았다. 왕박산에도 개경(開京)에서 고려 왕족이 내려와 은신하고, 성을 박씨(朴氏)로 고쳐 살았다.

성을 바꾸어 박씨가 된 고려 왕족은 그 후 별 탈 없이 조용히 살았으며 자손들도 번성해 나갔다. 사람들은 고려 왕족인 왕씨가 박씨로 성을 바꿔 살았던 곳이라고 하여 ‘왕박산’또는 ‘왕박산 시루’라 하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새로 생긴 박씨 자손들을 ‘왕박씨’라 불렀다. 조선 건국 이후 고려 왕족들이 성을 왕씨에서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바꾸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지은 수필집 『추강냉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삭고개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에 있는 고개로 삽고개라고 부르기도 하며 제천 송학면에서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옛지명:서면)으로 가는 고개로 양 옆으로토사를 방지하기 위해

철망으로 높은 담을 쌓아 놓았는데 그 높은 곳으로 건너야 한다


태백선 폐철길

예전에 태백선이 지나가는 곳이었는데 태백산 직선화 공사로 지금은 폐선이 된 곳이다. 태백선은 태백산 지구의 지하자원 개발에 따라 생산된 석탄과 중석 등의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개설된 철도이다.

1949년 5월 3일 영월선과 함백선 건설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11월 5일 영월선 제천~송학 간 9.8㎞를 개통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건설 공사에 재착수하여 1956년 1월 제천~영월 간 38.1㎞를 준공하였다.

1955년 12월 31일 제천∼영월 간 38.1 km의 영월선을 개통한 후, 1957년 3월 9일 영월∼함백 간 22.6 km를 개통하면서 함백선이라 불렀고 1966년 1월 19일 다시 예미∼고한 간 30 km를 개통하면서 고한선이라 하였고, 1

973년 10월 16일 고한∼태백 간 15 km를 추가 개통하고, 마지막으로 1975년 12월 5일 태백∼백산 간 9.3 km를 개통하였다. 이로써 제천~백산을 연결하는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때부터 태백이라 부르게 되었다.


뱃재(敗峴)

제천시 고암동 고척마을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38번 국도의 4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고개 정상에는 오일뱅크 주유소가 자라잡고 있다. 지명 유래는 여러가지 설로 전해내려 오는데 고개 형상이 배(船)와 같이 생겼다고 뱃재(船峴), 배를 많이 팔았다고 배고개(梨峴), 임진왜란 때 왜적에 패했다고 팻재(敗峴)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에 관한 설이 가장 많다

제천 지역의 신혼부부는 예전부터 신행길로제천시 고암동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가는 고개를 피했다. 임진왜란 중에 우리 관군과 의병이 이곳까지 쳐들어 온 왜군을 고개에서 맞아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관군과 의병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고개를 ‘팻재’ 또는 ‘패현’이라 하였고, 신혼부부는 불길한 장소라고 여겨서 이 길을 피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혼부부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기에 ‘실패’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팻재를 금기로 하여 이 고개를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 에필로그

장마철이라 그런지 장마비가 하염없이 몇일째 내리고 있지만 내 마음은 슬프기만 하다. 이번주 영월지맥 산행이 있는 날인데 이렇게 비가 내리면 지난번 산행의 악몽이 떠오른다. 미끄러운 등로길과 습도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고 잡목과 잡풀로 인하여 등로길 만들며 진행한 추억 다시 그런 사항을 예감하니까 머리가 아파온다.


비를 맞으면 치과로 이동한다 왜냐하면 충치로 인하여 이빨을 발치하고 그 자리에 임플란트를 하기 위하여 지인의 도움을 받아 강남역10번 출구에 있는 000치과에 방문한다. 치과에서 X-레이 검진을 받고는 바로 임플란트를 심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취가 풀리는지 잇몸이 아프다.


오늘도 어김없이 기상벨 소리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장마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냉장고에서 과일과 음료수를 베낭에 챙겨 집결지인 상일동 육교 앞으로 나간다. 빨리 와서인지 대원들은 보이지 않고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는 도착하는 버스에 올라 오늘 들머리지점인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에 위치하고 있는 중산재로 출발한다.


오늘도 장마비가 내려 지난 구간에 있어 버스 자리가 많이 비어 설렁하다. 장마비가 내려 취소하는 대원들이 많아 회장님께서 지금까지 대간, 정맥, 지맥을 하면서 이렇게 적은 인원은 처음이라고 하소연을 하신다. 달리는 버스안에서 간단하게 회장님의 설명을 듣고는 버스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오 국도변 휴게소에서 휴식를 취하고는 지방도로를 거쳐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에 위치하고 있는 중산재에 도착한다.


10:00 중산재(中山峙, 해발343m, 참나무재, 도둑골재)

위치 :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827-2

중산재는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에서 대전리를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고, 제천에서 영월과 쌍용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로다. 우측편 아래 대전리에 참나무쟁이 마을이 보인다. 예전에 참나무가 많아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며 중산재라는 지명은 산과 산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고개라하여 붙혀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사람들은 장재(場峙)라고 부른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 이곳 어상천 사람들이 제천에 있는 장(場)에 다닐 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장재(場峙)’ 또는 ‘장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바람에 이곳에는 장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도둑들이 득실거리기도 한 곳이란다


중산재 들머리

지난번 구간 날머리지점 맞은편 웅벽으로 진행하면 잡목들이 옷소매를 잡는다. 잠시후 양천허씨부부묘지가 나오고 등로길이 보이지 않아 좌측편으로 우회하여 오르면 523봉에 도착한다.


 중산재 날머리지점의 모습

벌목지대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움막이 있고 바로 아래 중산재 지방도로에 도착한다.



10:00 중산재 들머리지점의 모습

들머리지점 찾기가 어렵고 잡목과 잡풀로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풀숲을 헤쳐 희미한 등로길 따라 진행한다.


10:03 ‘陽川 許公과 孺人 全州李氏’ 부부 합장묘

중산재에서 잡풀을 헤치고 오르면 좌측편으로 잡풀이 무성한 양천허씨와 전주이씨 부부묘지가 나온다. 부부묘지를 통하하면 본격적인 오름길이 나오고 등로길이 희미하여 어느방향이 등로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장마로 인한 폭우로 등로길이 미끄럽고 등로길이 희미하여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구간이다.


오름길의 모습

양천허씨와 전주이씨 부부묘지를 지나면서 부터는 오름길이 시작되고 523봉을 찍고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안부에 도착한다. 안부에서 오르면 522봉이 나오고 계속하여 가창산 정상까지 오름길이 시작된다.


522봉(10:27)

523봉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안부에 도착하고 오르면 522봉 정상부에 도착한다. 522봉에서 영월지맥 마루금은  좌측방향으로 전환하여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장마철이라 폭우가 내려 등로길이 미끄러워 먼저간 대원들이 진흙탕으로 만들어 새로운 등로길을 만들면 내려선다. 522봉에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면 삼각점이 있는 550.5봉에 도착하는데 오늘 산행코스 중에 가장 힘든 구간이라 생각된다.


550.5봉 경사지의 모습(10:57)

폭우가 내리지 않으면 완만하게 오를수 있는 지점인데 오늘 따라 미끄러운 등로길 때문에 시간과 힘의 소모가 많은 시점이다. 그리고 습도로 인하여 온몸이 사우나 하는 느낌이다. 산행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빨리 하산하여 계곡물에 샤워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550.5봉 삼각점의 모습(10:59)

중산재에서 550.5봉까지 약1시간이 소요되어 도착하고 정상부에는 삼각점만이 반겨주고 이정표나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550.5봉 삼각점의 모습

삼각점의 식별이 보이지 않고 영월지맥 마루금 직진으로 진행한다.


벌목지대 통과(11:00)

550.5봉에서 598봉까지는 조림사업을 위해 벌목한 지역이며, 잡풀과 자라나는 소나무가 엉켜 등로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려서면  안부 갈림길이 나오고 마루금은 직진으로 진행하지만 우측편 등로길이 선명하여 독도에 주의할 지점이다.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경사지를 올라서면 598봉에 도착한다.


11:27 598봉 정상부의 모습

598봉 정상부에는 누군가 정상을 알리는 시그널이 "598.5봉(영월지맥)" 나무에 붙혀있고 잘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날칠수 있는 지점이다. 598봉에서 591봉까지는 완만하게 등로길 이어가며 521봉부터는 벌목공사현장이 나와 등로길 만들면 진행한다.


11:27 598봉 시그널의 모습


11:33 무명묘지 흔적터 통과


임도길 접속(11:57)

521봉을 통과하여 안동권씨 부부묘지까지 등로길은 벌목공사 때문에 등로길이 없어지고 벌목한 나무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어 어려움이 많았던 지점이다.

521봉 통과루트

1. 빨강색 방향 : 521봉에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등로길이 선명하게 이어져 있다. 우측방향으로 약10m 진행

   후 좌측편으로 등로길이 없는 길을 만들며 임도길로 내려 안동권씨 묘지 임도 삼거리까지 진행

2. 파란색 방향 : 원 지맥길 521봉에서 내려서면 좌측편으로 희미하게 등로길이 있고 벌목된 나무들이 가로

   막고 있어 잘못하면 알바하기 쉬운지점, 직진으로 등로길 만들어 진행하면 된다.

3. 521봉에서 내려 갈림길에서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임도길 만나고 임도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안동

    권씨 임도삼거리에 도착 그러나 많이 우회하여 진행함


임도길 접속

521봉에서 내려서면 임도길이 나오고 진행하면 안동권씨 부부묘지 앞에 도착한다.


안동권씨 묘지앞(11:58)

원 영월지맥 마루금(빨간색루트)은 묘지 뒤편으로 진행하여 임도길로 내려서면 되지만 등로길이 희미하고 선답자들도 임도길로 진행하여 우측편 임도길로 약60m 진행후 좌측편 능선으로 올라선다.


處士 安東權公과  孺人 金海金氏 묘지의 모습


임도 삼거리 통과

안동권씨 묘지앞 임도삼거리에서 우측방향으로 약60m 진행후 좌측편 능선을 올라서면 602봉 갑산지맥 분기봉에 도착하고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내려서 진행한다.


임도 삼거리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원 영월지맥 마루금은 선으로된 능선으로 내려서야 한다. 역방향으로 진행시 주의할 구간이다.


임도 탈출(12:00)

임도 삼거리에서 약60m 진행하면 영월지맥 마루금에 접속하고 좌측편 능선을 한차례 밀어 올리면 602봉 갑산지맥분기봉에 도착한다. 화살표 방향은 안동권시 묘지 뒤편으로 진행하여 내려서면 임도길을 만나고 임도길을 직진으로 건너 진행한다.


갑산지맥 들머리지점의 모습


602봉(갑산지맥 분기봉, 12:13)


602봉(갑산지맥 분기봉)


갑산지맥(甲山枝脈)이란

영월지맥 가창산(歌唱山.819.5m) 동남쪽 0.9km 지점인 602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갑산(甲山.747m),호명산(虎鳴山.479m. →0.3km),295. 1m(금수지맥분기점),성산(城山.425.6m),한티재,중앙고속도로 제천휴게소,국사봉(國師峰,632.3m),대덕산(大德山.577m →1.5km),마미산(馬尾山.600.8m),부산(婦山.780.4m → 1.4km)을 지나 제천천이 남한강 충주호에 합수하는 충주시 동량면 사기리까지 이어가는 도상거리 46.2km 의 산줄기로




672봉 통과

갑산지맥에서 우측방향으로 완만하게 행하면 672봉이 나오고 한차례더 밀어오르면 가창산 정상에 도착한다.



가창산(歌唱山, 해발819 m, 12:49) 
가창산은 충청북도 제천시 흑석동과 단양군 어상천면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조선시대 연산군 때 의리있는 두 선비의 전설로 알려진 가창산(歌唱山)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갑자사화로 부모를 잃은 서울 명문가 출신의 두 친구가 양평 용문산에서 10년 넘게 수학하였다. 어느 삼짇날 스승의 권유로 속세로 돌아온 이들은 절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자로서 후진을 양성하자는 맹세를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한 친구는 대장부로서 벼슬길에 나아가 높은 포부와 경륜을 펼치고 싶어 알성시를 보아 장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안락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이 우정을 배신하였음을 깨닫고 옛 친구에게 사과하고자 각 지방관들에게 친구를 찾아 달라 부탁하였다.

얼마 뒤 강원 감사를 지내던 친구에게 옛 친구의 소식을 들은 그가 제천현에 있는 산에 은거하는 옛 친구의

집을 찾아가니,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던 친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며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

두 사람이 소박한 저녁을 먹은 뒤 정담을 나누고 시를 지어 화답하며 우정을 나누자 친구의 아내도 동화되어 두 사람의 정담에 맞춰 성심껏 가야금을 타니, 친구는 아름다운 가야금 가락에 넋을 잃었다.

이처럼 한 여인의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이 친구를 즐겁게 했다고 하여 후에 사람들이 이 산을

가창산(歌唱山)이라 하였으며 또한 피난살이로 고달픈 왕이 시름시름 앓으니 신하들이 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하여 붙인 이름 이라고도 한다



가창산 정상에서 인증샷

가창산 정상부에는 정상석과 조망이 없고 이정목이 정상을 알리고 있었다. 가창산은 일명 "까창산"이라고도 하며 석회암으로 형성된 산으로 정상 전면에는 그저 그런 산으로 보이지만 후면에는 석회암 덩어리로 형성된 암릉이다. 가창산을 중심으로 태영석회 장자광업소, 석교광업소 등이 있다고 한다. 옛날 신선(神仙) 이곳에 내려와 가무()를 즐겼고, 바둑을 두었던 너럭바위가 있다고 해서 이리저리 둘러보아도보이지 않아 그냥 진행한다. 가창산정상 이정목에을 지나 우측방향으로 전환하니 광산절개지가 나오고 절개지를 따라 진행하니 등로길에 송수관도 만난다.



가창산(歌唱山, 해발819 m) 삼각점

가창산 삼각점도 식별이 어렵다. 영월지맥 마루금은 직진으로 진행한다.


폐광에서 사용된 송수관(13:18)

가창산정상에서 내려서면 갈림길이 나오고 갈림길에서좌측방향(제천시 두학동 장치미 마을) 등로길이 선명하여 알바하기 쉬운지점이니 도도에 신경쓰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한다. 682봉(일자봉)까지는 우측방향으로 진행한다. 제천시 두학동은 옛날에 제천향교 뒷산 독순봉에서 학 두 마리가 날아오다가 한 마리는 학다리에 떨어져 죽고, 한 마리는 바람부리 서쪽에 있는 학들에 떨어져 죽었다 전하는데, 학들 동쪽의 단양군 어상천면 자작리(自作里)를 편입하면서 학의 머리 쪽이 되므로 두학(頭鶴)이라 하였다. 학들은 두루미 서식처로 작은황새골, 큰황새골, 오리골 등의 지명이 전하며 학들 옆에 있는 마을은 학평(鶴坪)으로 불린다.


폐광산터의 모습(13:19)

가창산정상에서 내려서면 절개지가 나오고 우측편 바로 아래로 석회석을 채취했던 광산터가 보인다. 지금은 폐광이 되어 안전 장치도 없이 그냥 방치되어 있어 위험해 보인다. 석회석을 채취하는것은 좋은데 완료후에느 그냥 무방비로 두어 마루금 이어가는 산꾼의 안전에 크나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안전장치나 위험 표지판이라도 설치해 두면 좋겟다.


가창산아래 폐광산터의 모습(13:22)

이지점에서 서북쪽으로 바라보면 영월 쌍룡의 시멘트 공장이 보이는데 날씨가 불순하여 볼수가 없다. 이곳 제천 및 단양일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회석지대로 백두대간 자병산을 지나면서도 봤지만 땅속의 석회석이 물에 녹으면서 땅이 함몰되는 카르스트지형의 ‘돌리네’가 이곳 주변에도 목격이 된다.


임도길 접속(13:36)

682봉(일자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약5분 정도 내려서면 임도길에 도착하고 임도길에서 직진으로 올라 진행하면 설매산 갈림길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하신 대원들이 후미를 기다려 주시고 후미가 도착하니 총알처럼 사라져 버린다.


설매산 분기봉(13:39)

설매산 분기봉 이정표: ←설매산 2.63km,↑문영월재 1.0km →가창산 2.6km

이곳에서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방향전환하여 내려서면 문영월재에 도착한다. 설매산방면의 등로길이 선명하여 알바하기 쉬운지점 독도에 주의해야할 구간이다.



524봉 통과


문영월재(13:58)

문영월재는 충북 제천시 흑석동에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정상에는 제천시에서 세운 이정표만 있을 뿐 지명유래는 알 길이 없다


문영월재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문영월재에서 바라본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방면의 모습


567.7봉(14:10)

문영월재에서 숲속을 헤치며 오르면 지도상 삼각점이 있는 567.7봉에 도착하고 정상부에는 정상석은 없고 삼각점만이 설치되어 있고 다른 아무 표지기가 없었다.


567.7봉 삼각점의 모습


서문리 갈림길(14:30)

524봉에서 3분정도 내려오니 십자(十)자 안부가 나오고 서문리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다. 서문리는 제천시 흑석동에 있는 조그만 자연마을로 서무니 소류지가 있는 곳이다. 서문리(서무니)가 있는 흑석동은 마을에 검은 빛깔의 오석(烏石)이 많고 진주강씨 세거지에 ‘현암(玄巖)’이라는 글자를 새긴 오석이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새김글은 조선 명종  때 진주 강씨 후손이 기묘사화 때 모해를 받아 흑석동에 낙향하여 새긴 것으로 전해 오며 『한국지명총람』에 “흑석리는 검은 빛깔의 돌이 많으므로 검은돌 또는 흑석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시 오르막을 올라 능선을 하나 넘어 내려서니 돌탑이 보인다. 오늘 산행은 짧은 구간에 오르내림이 많은 빨래판 구간이고 거기다가 눈이 많아 예상보다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는데다가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이 산꾼을 주눅들게 한다 


조을재 이정표

서문리 갈림길에서도  왕박산 1.7km라고 써놨는데 약15분전 지나 조을재 이정표에도 왕박산 1.7km라고 적혀있다. 처음 이곳에 온 산꾼을로서는 상당히 혼란스럽다

 

조을재의 전설

옛날 충청도 지방에 김씨 성을 가진 이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키도 작고 성품이 몹시 경망스러워 주위 사람들은 이름 대신 '조리'라는 별명을 만들어서 불렀다. 그런데 김조리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조리는 혹시 아버지의 묘를 잘못써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유골을 괴나리 봇짐 속에 소중히 모신 다음 명당이 많다는 강원도를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김조리가 충북과 강원도의 경계인 왕박산밑 점제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었다.

 

그는 주막집의 목로방(木盧房)에서 장사꾼들과 함께 자면서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잠자리에 들 때에야 머리맡에 모셔 놓고 잠이 들었다.그러나 그 다음날 눈을 떠보니 아버지의 유골이 든 봇짐은 없어지고 참빗 장사꾼의 큰 보따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유골 봇짐을 잃어버린 그는 대성 통곡을 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김조리는 유골 봇짐과 바꾸어진 참빛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참빗이 잘 팔려 큰 돈을 벌었다

.

그 후에도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어 몇 년 안가서 장가도 들고 땅도 많이 사서 큰 부자가 되었다 한편, 그 주막집에서 함께 자던 참빗 장수는 김조리가 봇짐을 소중하게 여기므로 혹시 무슨 보물이라도 있는게 아닌가하는 욕심으로그날 새벽 봇짐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쳐서 조리재 중턱에서 봇짐을 풀어보니 뜻밖에도 사람이 유골이 나왔던 것이다. 참빗장수는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나서 그 유골봇짐을 큰 참나무 밑에다 휙 던져버리고

조리재를 내려오다가 아!나도 조상을 모시는 사람인데 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참나무 밑에 유골을 묻어준 후 남의 집 머슴살이를 전전하다가 10여년이 지난 후 충청도의 큰 부자집 머슴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추석이 다가와도 아버지 산소에 벌초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머슴은 숫돌에다 낫을 갈면서 "주인 어른,올해도 벌초를 안 가시렵니까?" 하고 물으니 "나도 예전에는 자네처럼 머슴살이도 하고 행상도 했다네. 그러나 하도 되는 일이 없어서 아버님의 유골을 강원도의 명당 자리로 모시고 가던 중에 어느 참빗장사가 실수로 봇짐을 바꾸어 가는 바람에 아버님의 유골을 잃어버렸다네." 주인의 말을 들은 머슴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가 바로 그 때 유골을 훔쳐간 참빗장사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주인은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아버님의 유골을 찾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김조리는 이름난 지관을 모시고 머슴과 함께 이곳 왕박산 줄기의 큰 참나무 밑에 있는 아버님의 묘를 찾아냈고 지관은 패침을 놓고 유골이 묻힌 묘를 한참 주시하더니 무릎을 치면서 "어느 유명힌 지관 어른이당대에 발복하는 조리형국의 혈에다 묘를 잡아 주었소?"라면서 놀라는 것이었다.그 후 김부자는 참빗장사였던 머슴에게

많은 재산을 나누어주고 친형제처럼 의좋게 살았다고 한다.


조을재(鳥乙峙, 해발490m, 14:40)

조을재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에서 제천시 흑석동 서문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그 지형이 조리형국이라 조리재라고 부르며 곡식이 많이 모여들어서 큰 부자가 나는 명당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영월로 가는 관행(官行) 길이었다고 한다. 무동산,왕박산, 삼태산이 삼각형으로 우묵하게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조리와 같아 붙여진 이름으로 조올치와 가창산 사이에 제천 방향으로 나란히 솟은 산봉우리는 아래부터 차례로1봉, 2봉, 3봉, 땀봉으로 부르며 영진지도에는 조을치로 표기되어 있고 이 지역 사람들은 조리재로 부른다. 조을재 정상에는 민초들의 만든듯한 돌탑하나와 이정표가 서 있고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무명봉 통과(14:46)


왕박산시루봉(해발527m, 14:52)

충북 제천시 흑석동과 송학면, 영월군 남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지도상에는 527봉 또는 왕박산 갈림길로 되어 있고 “왕박산 시루봉”라고 한다. 정상부에는 제천시에서 설치한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설치되어 있고 왕박산 시루안내판도 설치되어 있다.


왕박산(王朴山) 시루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왕족과 유신들은 뿔뿔이 흩어져 초야에 묻히거나 멀리 낙도에 은신하였는데 조선의 조정에서는 고려 유신들을 찾아 회유하여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많은 왕족과 유신들은 숨어 버리고 말았다. 왕박산에도 개경(開京)에서 고려 왕족이 내려와 은신하고, 성을 박씨(朴氏)로 고쳐 살았다.

성을 바꾸어 박씨가 된 고려 왕족은 그 후 별 탈 없이 조용히 살았으며 자손들도 번성해 나갔다.

사람들은 고려 왕족인 왕씨가 박씨로 성을 바꿔 살았던 곳이라고 하여 ‘왕박산’또는 ‘왕박산 시루’라 하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새로 생긴 박씨 자손들을 ‘왕박씨’라 불렀다. 조선 건국 이후 고려 왕족들이 성을 왕씨에서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바꾸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지은 수필집 『추강냉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레아 박건석님이 붙혀논 왕박산 시루봉의 표지코팅지


왕박산 갈림길의 모습(14:53)

왕박산 갈림길에서 왕박산 정상까지 약0.7km 마루금에서 벗어나 있지만 한번 다녀올까 했지만 대원 모두가 비가 내리는 이유로 포기하고 뱃재로 내려선다.


왕박산갈림길

왕박산(王朴山, 해발598m)

위치 : 충북 제천시 송학면과 강원도 영월군 남면에 걸쳐 있는 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 일가를 처형 하자 고려의 왕족으로 승지(承旨)벼슬을 지낸 왕을규(王乙規)가 화를 피하기 위해 이 산으로 숨어들어 성씨를 그의 외갓집 성씨인 의흥 박씨(義興 朴氏)로 고치고 살았다 하여 그 후로 이 산을 왕박산이라 부른다.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여 새 왕조 개창에 반대하는 권문세족들을 무너뜨리고 온건개혁파인 사대부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왕족이었던 왕을규(王乙規)도 멸족을 당할 처지가 되었는데, 그의 형인 이부상서(吏部尙書) 왕갑규(王甲規)는 중국으로 망명하고 고려에 남은 왕을규는 외갓집 성을 따라 의흥 박씨(義興 朴氏), 즉 박을규로 행세하며 영춘현 차의곡(현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에 피난와 살았다

그래서 의흥박씨를 흔히 왕박씨(王朴氏)라고 하며 3대까지 영춘에 살았으나 영춘에는 현청이 있고,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라 신변의 불안을 느끼자 4세손 박근부터 왕박산 아래인 제천시 송학면 만지동(음지 만지실)에 은거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의흥박씨의 관향조인 박을규(朴乙規)의 본성은 왕씨로 고려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을 하자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춘성(春城)[현재 단양군 영춘면] 거의동(車衣洞)에 둔거하였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 외가(外家)의 성(姓)인 박씨를 따랐다. 그 후 후손들은 관향을 의흥(義興)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으나, 중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후손인 박득서(朴得瑞)로부터 대(代)를 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세조(世祖) 때 좌익공신인 박근(朴瑾), 중종(中宗) 때 박승종(朴承宗) 등이 저명하다




무등산(無騰山:620m)

충북 제천 송학면과 강원도 영월군 남면의 경계에 솟아 있는 무등산(無騰山)은 ‘없을 무(無)'에 ‘베낄 등(謄)'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산으로 무등산의 가까운 남쪽에 위치한 왕박산(王朴山 597.5m)은 고려의 한 왕이 왕비와 대신들과 함께 이성계를 피해 들어와 피신한 곳이라고 한다.

무등산(無騰山)은 1914년 경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무둥산[舞童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세가 춤추는 소년의 형상이어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는 무등산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피난 온 왕이 고달픈 피난살이로 시름시름 앓자 신하들이 목말을 태우고 다녔다는 이

야기에 가탁하여 목말의 방언인 '무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왕씨 성을 가진 왕은 성을 박씨로 바꿔 살았는데 당시 본관은 의흥으로 현재까지 의흥 박씨는 존재하고 있다. 주변 산군을 이루는 무등산과 한편 왕박산보다는 좀더 남쪽 아래에 솟은 가창산(819.5m)의 이름 또한 이 유래와 관련 있다.

 

무등산은 왕이 고달픈 피난살이로 시름시름 앓으니 신하들이 무등을 태우고 다녀서 무등산이라 했으며, 가창산은 왕을 위해 신하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 연회를 베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무등산은 산세가 춤추는 소년의 형상으로 무동산이라 했다고도 전하나 지금 현재 전해지는 한자마저 달라 확인할 길이 없으며 이 외에도 주변 지역명인 ‘절골'은 절이 있었다고 절골이며, ‘사기장골'은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승지골'은 말 그대로 스님이 살던 곳이란다. 왕박산 갈림봉인 527봉에서 무등산까진 약 3.7km이니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왕박산과 무등산의 형태는 마치 여인의 젖가슴처럼 보인다고 한다.


서문리 갈림길(14:56)

왕박산 시루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약3분정도 내려서면 Y자 갈림길이 나오며 우측방향 서문리방면의 등로길이 선명하여 알바하기 쉬운 지점이다. 독도에 조심하고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편 숲속으로 진행한다. 숲속으로 진행하면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등로길이 희미하고 잡목들이 옷깃을 잡는다.


철조망 통과(15:05)

왕박산 시루봉에서 약13분 정도 내려서면 철조망이 설치된곳이 나오고 철조망을 넘어 우측방향으로 계속하여 내려선다. 잠시후 밭이 나오고 우회하여 내려서면 38번 국도 지하통로앞에 도착한다.


밭 통과(15:09)

철조망 안으로 들어와서 우측방향으로 계속 내려서면 밭이 나오고 밭을 우회하여 내려서면 시멘트 임도길에 도착한다. 바로 앞에 보이는 38번 국도를 건너 절개지로 올라야 하지만 안전을 위해 지하통로로 진행후 좌측편 배수로를 올라 절개지 안부 우측편 숲속으로 진행한다.


시멘트 임도길 접속(15:11)

밭을 통과하여 내려서면 시멘트 임도길이 나오고 우측편으로 진행하면 38번 지하통로가 나온다.


임도길에서 뒤돌아본 모습


38번 지하통로 통과


38번국도 굴다리(15:13)

제천에서 영월로 향하는 38번 국도 지하통로를 지나 좌측편 배수로로 올라 절개지 상부에서 우측편 숲속으로 진행한다.


지하통로 통과

지하통로를 지나자마자 좌측방향으로 전환하여 수로를 타고 올라서 우측편 절개지 상부로 진행한다.


38번 절개지에서 바라본 모습(15:14)


水路를 올라 38번 국도 절개지로 올라 진행


삽고개 날머리지점(15:24)

38번 국도에서 완만하게 약10분 정도 진행하면 삽고개 절개지에 도착한다. 절개지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배수로가 나오는곳으로 내려선다. 이지점에서 절개지 따라 더 진행하면 안전하게 내려설수 있는 지점도 있다.


삽고개(15:25)

위치 : 충북 재천시 상학면 무도리 785-14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에 있는 고개로 삽고개라고 부르기도 하며 제천 송학면에서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옛지명:서면)으로 가는 고개로 양 옆으로 토사를 방지하기 위해 철망으로 높은 담을 쌓아 놓았는데 그 높은 곳으로 건너야 한다.


삽고개 들머리지점(15:30)

삽고개 절개지를 내려 좌측방향으로 약20m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전신주가 나오고 전신주 옆 등로길로 진행하면 영월지맥 마루금에 접속한다.


무명묘지 통과(15:34)

무명묘지 우측편으로 올라 상부에서 좌측편 숲속으로 진행한다.


송전철탑 통과(15:40)


NO10 송전탑 통과(15:43)


고암정수장 철조망(15:53)

영월지맥 마루금 가운데 고암정수장이 중앙부에 자리를 잡고있다. 이곳부터 개나리추모공원까지는 고암정수장, 고암테크노 공단, 제천변전소가 영월지맥을 점령한 바람에 원 코스로 갈 수 없고 우회하여 진행해야 한다. 철조망앞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한다.


고암정수장 철조망 따라 진행


고암정수장의 모습(15:55)


공터 통과(15:56)

고암정수장 철조망에서 좌측방향으로 약3분 정도 내려서면 넓은 공터가 나오고 임도길로 내려서면 고암정수장 정문앞에 도착한다.


공터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임도길의 모습(15:57)

우측편 담장 위로 고암정수장 정문이 위치하고 있고 임도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38번 국도에 도착한다.


임도 갈림길 통과(15:58)


38번 국도(15:59)


뱃재(敗峴, 16:00)

위치 : 충북 제천시 고암동 158-3

제천시 고암동 고척마을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38번 국도의 4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고개 정상에는 오일뱅크 주유소가 자라잡고 있다. 지명 유래는 여러가지 설로 전해내려 오는데 고개 형상이 배(船)와 같이 생겼다고 뱃재(船峴), 배를 많이 팔았다고 배고개(梨峴), 임진왜란 때 왜적에 패했다고 팻재(敗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에 관한 설이 가장 많다

제천 지역의 신혼부부는 예전부터 신행길로제천시 고암동에서 송학면 무도리로 가는 고개를 피했다. 임진왜란 중에 우리 관군과 의병이 이곳까지 쳐들어 온 왜군을 고개에서 맞아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관군과 의병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고개를 ‘팻재’ 또는 ‘패현’이라 하였고, 신혼부부는 불길한 장소라고 여겨서 이 길을 피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혼부부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기에 ‘실패’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팻재를 금기로 하여 이 고개를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장마비가 내리는 영월지맥 마루금 강원도와 충청북도 도경계지역을 탐방하면서...

[중산재~가창산]

중산재(中山峙, 해발343m, 도득골재, 참나무쟁이재)는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에서 대전리를 넘어가는 고개이며 도로 절개지 좌측편 웅벽으로 산행이 시작되는데 등로길에 잡풀과 잡목으로 인하여 진행하기가 쉽지가 않다. 희미한 등로길을 찾아 잡풀을 헤치고 오르면 좌측편으로 잡풀이 무성한 양천허씨와 전주이씨 부부묘지가 나오고 부부묘지를 좌측편에 두고 진행하면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등로길이 희미하여 어느방향이 등로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이며 장마로 인한 폭우로 등로길이 미끄럽고 등로길이 희미하여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구간이다.


양천허씨와 전주이씨 부부묘지 완만하게 오르면 523봉에 도착하고 523봉에서 좌측방향으로 방향전환하여 내려서면 안부에 도착한다. 지금부터 가창산정상까지는 계속하여 오름길이 나온다. 안부에서 한차례 밀어 올리면 522봉 정상부에 도착하고, 522봉에서 영월지맥 마루금은  좌측방향으로 전환하여 급경사 내리막 등로길로 내려선다. 장마로 인하여 등로길이 미끄럽고 앞선간 대원들이 등로길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놓아 내려서기가 무척이나 힘들어 새로운 등로길을 만들며 진행하는데 자꾸만 미끄러지면서 내려선다. 522봉에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면 삼각점이 있는 550.5봉에 도착하는데 오늘 산행코스 중에 가장 힘든 구간이라 생각된다. 급경사에다 미끄러운 등로길이 나오고 진행하면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서면 또 다시 미끄러지니 힘은 힘대로 들고 시간은 시간대로 지체되는 순간이다.


550.5봉에서 598봉까지는 조림사업을 위해 벌목한 지역이며, 잡풀과 자라나는 소나무가 엉켜 등로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려서면  안부 갈림길이 나오고 직진으로 경사지를 올라서면 598봉에 도착한다. 598봉 정상부에는 누군가 정상을 알리는 시그널이 "598.5봉(영월지맥)" 나무에 붙혀있고 잘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날칠수 있는 지점이다. 598봉에서 591봉까지는 완만하게 등로길 이어가며 521봉부터는 벌목공사현장이 나와 등로길 만들면 진행한다.


521봉을 통과하여 안동권씨 부부묘지까지 등로길은 벌목공사 때문에 등로길이 없어지고 벌목한 나무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어 어려움이 많았던 지점이다. 원정맥 마루금은 벌목지대를 직진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벌목지점 직진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약10m 진행후 좌측편 임도길이 보이는곳까지 등로길 만들어 진행한다.


안동권씨 묘지앞 갈림길에서 원 영월지맥 마루금은 묘지 뒤편으로 진행하여 임도길로 내려서면 되지만 등로길이 희미하고 선답자들도 임도길로 진행하여 우측편 임도길로 약60m 진행후 좌측편 능선으로 올라선다. 임도길로 우회하여 임도 삼거리에서 약60m 진행하면 영월지맥 마루금에 접속하고 좌측편 능선을 한차례 밀어 올리면 602봉 갑산지맥분기봉에 도착한다.


602봉(갑산지맥)에서 좌측방향은 갑산지맥 갑산, 호명산으로 가는 등로길이고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방향전환하여 완만하게 진행하면 672봉이 나오고 672봉에서 한차례 더 밀어오르면 가창산 정상에 도착한다.


[가창산~왕박산시루봉]

가창산 정상부에는 정상석과 조망은 없고 이정목이 정상을 알리고 있었다. 가창산은 일명 까창산이라고도 하며 석회암으로 형성된 산으로 정상 전면에는 그저 그런 산으로 보이지만 후면에는 석회암 덩어리로 형성된 암릉이다. 가창산을 중심으로 태영석회 장자광업소, 석교광업소 등이 있다고 한다. 옛날 신선(神仙) 이곳에 내려와 가무()를 즐겼고, 바둑을 두었던 너럭바위가 있다고 해서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아 그냥 진행한다. 가창산정상 이정목에을 지나 우측방향으로 전환하니 광산절개지가 나오고 절개지를 따라 진행하니 등로길에 송수관도 만난다.


가창산에서 계속해서 내려서면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제천시 두학동 장치미 마을) 등로길이 선명하나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지점에서 독도에 신경써야 할 구간이다. 잠시후 절개지가 나오고 우측편 바로 아래로 석회석을 채취했던 광산터가 보인다. 지금은 폐광이 되어 안전 장치도 없이 그냥 방치되어 있어 위험해 보인다. 석회석을 채취하는것은 좋은데 완료후에느 그냥 무방비로 두어 마루금 이어가는 산꾼의 안전에 크나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안전장치나 위험 표지판이라도 설치해 두면 좋겟다.


682봉(일자봉)까지는 우측방향으로 진행한다. 제천시 두학동은 옛날에 제천향교 뒷산 독순봉에서 학 두 마리가 날아오다가 한 마리는 학다리에 떨어져 죽고, 한 마리는 바람부리 서쪽에 있는 학들에 떨어져 죽었다 전하는데, 학들 동쪽의 단양군 어상천면 자작리(自作里)를 편입하면서 학의 머리 쪽이 되므로 두학(頭鶴)이라 하였다. 학들은 두루미 서식처로 작은황새골, 큰황새골, 오리골 등의 지명이 전하며 학들 옆에 있는 마을은

학평(鶴坪)으로 불린다. 682봉(일자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약5분 정도 내려서면 임도길에 도착하고 임도길에서 직진으로 올라 진행하면 설매산 갈림길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하신 대원들이 후미를 기다려 주시고 후미가 도착하니 총알처럼 사라져 버린다.


임도 안부에서 직진으로 올라 완만하게 진행하면 설매산 분기봉에 도착하고 설매산 분기봉에서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방향전환하여 내려서면 문영월재에 도착한다. 설매산방면의 등로길이 선명하여 알바하기 쉬운지점 독도에 주의해야할 구간이다.


문영월재에서 직진으로 오르면 지도상 삼각점이 있는 567.7봉에 도착하고 삼각점만이 설치되어 있고 다른 아무 표지기가 없었다. 524봉에서 3분정도 내려오니 십자(十)자 안부가 나오고 서문리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다. 서문리는 제천시 흑석동에 있는 조그만 자연마을로 서무니 소류지가 있는 곳이다. 서문리(서무니)가 있는 흑석동은 마을에 검은 빛깔의 오석(烏石)이 많고 진주강씨 세거지에 ‘현암(玄巖)’이라는 글자를 새긴 오석이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서문리갈림길에서 약10여분 진행하면 조을재에 도착하고 조을재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에서 제천시 흑석동 서문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조을재에서 한차례 밀어 올리면 산불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왕박산 시루봉에 도착하고 주변에는 왕박산 시루 안내판을 반겨준다.




[왕박산시루봉~뱃재]

왕박산갈림길에서 왕박산까지 약0.6km 마루금에서 벗어나 있지만 한번 다녀올까 했지만 대원모두 비가 내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뱃재로 내려선다. 왕박산 시루봉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약3분정도 내려서면 Y자 갈림길이 나오며 우측방향 등로길이 선명하여 잘못하면 알바하기 쉬운지점이다. 영월지맥 마루금은 우측편 숲속으로 진행한다. 숲속으로 진행하면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등로길이 희미하고 잡목들이 옷깃을 잡는다.


Y자 갈림길에서 우측방향 숲속길을 헤치면 약10여분 내려서면 철조망이 설치된곳이 나오고 철조망을 넘어 우측방향으로 임도길 따라 계속하여 내려선다. 잠시후 밭이 나오고 우회하여 내려서면 제천에서 영월로 향하는 38번 국도 지하통로앞에 도착한다. 38번 국도를 건너 절개지로 올라야 하지만 안전을 위해 지하통을 통과후 좌측편 배수로를 올라 절개지 안부 우측편 숲속으로 진행한다.


38번 국도 절개지에서 완만하게 약10분 정도 진행하면 삽고개 절개지에 도착하고 절개지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배수로가 있는곳에서 우측편으로 내려선다. 삽고개 양 옆으로 토사를 방지하기 위해 철망으로 높은 담을 쌓아 놓았는데 그 높은 곳으로 내려 바로 건너야 한다. 그러나 비가 내려 삽고개에서 좌측방향으로 약20m 진행하여 전신주 바로 앞에서 우측방향 숲속으로 진행하여 마루금과 접속하여 진행한다.


삽고개에서 올라 잠시후 마루금 접속하고 완만하게 진행하면 무명묘지앞에 도착한다. 무명묘지 상부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차례로 송전철탑 두개가 나오고 완만하게 진행하면 고암정수장 철조망앞에 도착한다. 고암 철조망 앞에서 좌측방향으로 약3분 정도 내려서면 넓은 공터가 나오고 공터에서 우측편 임도길로 내려서면 삼거리가 나오고 삼거리에서 우측편으로 진행하면 고암정수장 정문앞에 도착한다.


고암정수장 정문 입구에서 진행하여 뱃재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오늘 영월지맥 마루금 4구간 산행을 종료한다. 피로한 몸을 민가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산악회에서 준비한 막걸리 한잔에 닭죽을 먹고는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 피곤함을 풀어본다.


무척이나 힘든 우중산행 있었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아무런 사고없이 영월지맥 한구간을 마칠수 있게 도움을 주신 모든 대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하며 선두에서 리딩해 주신 이대장님과 대원들 영양보충에 신경써 주신 회장님과 수석김대장님의 노고가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 지면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지금 무더워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때 대원님들 모두 건강관리 잘하시고 송백하계휴가 기간 즐거운 개인 시간 보내신 후 밝은 모습 건강한 몸으로 영월지맥 마루금에서 만나요.


그럼 영월지맥 5구간에서 뵙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드리며, 오고가는 정으로 간단하게 댓글 부탁드립니다.

댓글 달아주신분 평생 복 많이 받을 겁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