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3구간 부소령에서 유량리고개까지 산행후기

2014. 3. 11. 13:08★ 9 정맥/- 3. 금북[완료]

 

금북정맥 3구간(부소령~유량리고개)

 

 

 

산 행 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서북구 입장면/ 동남구 옥천읍일대  금북정맥 3구간

산행일시 : 2014년 3월15(토요 당일산행)

산행코스 : 부소령(부수문이고개)-475봉-위례산-위례산성(해발524m)-철탑-철탑-우물목고개-375봉

                -39번 철탑-북면 갈림길-천주교성지-450봉-성거산 공군방공부대-성거산(해발579m)-만일

               고개-415봉(연인지맥분기봉)-걸마고개-372봉-377봉 삼거리-유왕골고개-359.6봉-성불사 갈

               림길-382봉-라지고개-태조봉(태조산, 해발422m))-365봉(삼각점)-365봉(전망좋은곳)-흑성

               산분기점-아홉싸리고개-유량리고개===============(5시간)

산행시간 : 09:15~14:25 (5시간10분, 식사 및 휴식포함)

산행거리 : 약16.5Km(정맥15.9Km, 접속구간0.6Km), GPS 18.4Km

산행날씨 : 맑음

산행인원 : 50명

산행코스 및 구간거리 :부소령(부수문이고개)-2.2/2.5km(50분)-위례산-2.15/2.4km(40분)-우물목고개

                                -2.45/2.8km(60분)-성거산-2.6/3km (50분)-유왕골고개-2.3/2.6km(50분)-태

                                조산-2.3/2.6km-유랑리고개-0.6km-주차장=========14.1/16.5km(5시간)

 

구간

거리 (km)

출발시간

소요시간

비고

부소령

-

09:15 

해발274m, 부소문이 고개(부수문이 고개), 57번 지방도,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서 북면 운용리로 넘어가는 고개

위례산

 2.5

09:57

42

해발524m, 정상석, 위례산성터

우물목고개

  2.4

10:35

38

해발320m, 포장도로, 이정표

성거산

  2.8

11:30

55

해발579m, 정상석, 넓은공터, 좌측편으로 삼각점이 있음

유왕골고개

  3

12:49

1시간19

해발340m, 사랑의 쉼터(정자). 이정표, 각원사 천동불상 갈림길

태조산

  2.6

13:37

48

해발422m, 태조봉, 정자, 정상석, 조망좋음

유량고개

  2.6

14:25

48

해발240m, 동물이동통로, 지방국도

주차장

  0.6

14:35

10

유랑고개에서 좌측방향 나무계단으로 내려선다

마루금 거리

15.9 

 

5시간20분 

 

접속 거리

 0.6

 

 

 

총 거리

16.5 

 

 

 

GPS거리

18.4

 

 

 

 

 <산행 상세안내>

부수령(부수분이고개), 57번(2차선)지방도,성거산 위례성 안내판, 부수령 표지석, 삼각점, 좌측방향

입장 양대리 갈림길 안부 이정표(위례산 0.3 km),쉼터, 90도 좌측방향 전환

475봉 돌탑(이곳을 일명 위례산이라고도 함)2),삼각점, 이정표(기로리 3.3 km)

위례산(523m),정상석(2, 위래산 위례산성) 안내판,이정표(우물목 고개 2.4 km),좌측방향

군단이 갈림길,이정표(우물목 고개 2.2 km) 직진방향

490봉 유성농장(입구) 갈림길,이정표(사리목 0.7 km),우측방향, 급경사지, 로프설치되어 있음

묘지 쌍묘 통과(좌측편에 두고)

임도삼거리 , 배티성지↔성거산성지 표지판, 우측방향

성황당고개,이정표(우물목 고개 730 m), 성황당고목, 돌탑, 우측능선방향

송전탑(N0. 55)

송전탑(N0. 39)

우물목 고개, 이정표(성거산 정상 2,975 m),포장도로, 직진으로 공군부대방향으로 진행

헬기장(사리목고개) 직진으로 통과

체육시설 통과

성거산 성지 입구 입간판,표지석(성거산 순교성지 제1 줄무덤)

표지석(성거산 순교성지 제2 줄무덤)

무인 산불감시탑

이정표(성거산 정상 660m), 우회 등산로 갈림길,좌측방향전환

은석산갈림길, 우측방향으로 진행

나무계단, 공군부대조망

이정표(성거산 정상 510m)

이정표(천흥리임도 1.0km)

성거산 정상석,우측방향으로 급경사지 내려감

암봉전망대, 조망좋음(마루금에서 좌측편으로 약간 떨어져 있음) 

암봉전망대 조망후 성거산 정상석에 복귀하여 좌측방향으로 진행

급경사지, 바위 공터(점심식사)

만일 고개, 사거리 안부, 돌탑, 이정표(각원사 2.7 km)

영인 지맥 분기점, 삼거리 이정표(좌불상),노란색 아크릴표지판

걸미 고개,이정표(119  태조산 주등산로 23지점),삼거리 안부,이정표(각원사 1,218 m)

372봉, 좌측방향으로 진행

상명대갈림길, 좌측방향으로 진행

유왕골고개,사각 정자,표지석(사랑의 쉼터),사거리 안부,이정표(태조산 정상 2,360 m),유왕골 유래 안내판

각원사 갈림길,이정표(태조산 2,040 m, 119  태조산 주등산로 19지점),각원사 유래 안내판

이정표(안서 e편안세상 아파트 갈림길, 119  태조산 주등산로 17지점)

태조산 수련장 갈림길,이정표(정상 1.4 km)

펜스 통과, 좌측방향, 급경사지

태조산(422 m),팔각정,정상석,이정표(119 태조산 정상길 7지점),안내판(태조산의 유래),전망 안내판,조망  

365 봉,삼각점,펜스, 좌측방향전환

이정표(3 포스트 850 m),쉼터(의자 2), 전망이 좋은곳

아홉싸리 고개,이정표(3 POST 지점),사거리 안부

유량리 고개,동물 이동통로, 산행종료하여 좌측방향으로 하산

 

금북정맥 산행 지도

 

 

  

 금북정맥 3구간[부소령-위례산-성거산-태조산-유량리고개]지도

 

금북정맥 3구간[부소령-위례산-성거산-태조산-유량리고개] 고도표

 

 금북정맥 3구간[부소령-위례산-성거산-태조산-유량리고개] 트렉

 

금북정맥(錦北正脈) 개요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가던 백두대간이 속리산 천왕봉에서 가지를 쳐 안성의 칠장산까지 한강과 금강의 물줄기를 가르며 이어간 한남금북정맥이 안성 칠장산에서 다시 가지를 쳐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으로 가른다. 금북정맥은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491.2m)에서 충남 태안의 태안반도 안흥진까지 금강의 윗쪽에서 물길을 모으는 산줄기로 거리는 약 267km에 달한다. 산경표에서는 칠현산에서 분기한다고 되어 있지만 칠현산군에 칠장산도 포함되고 실제 도상거리도 2km밖에 되지 않은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산경표와 현대의 지리가 맞아 떨어지는 곳이다.

 

금북정맥은 분기점 칠장산에서 칠현산 - 서운산 - 성거산 - 국사봉- 광덕산 - 백월산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오서산 - 보개산 - 수덕산 - 가야산 - 성왕산 - 백화산 - 안흥진으로 약 267km를 이어간다. 금북정맥이 금강 북쪽의 분수령이 되려면 금강하구로 향하여야 하는데 백월산에서 방향을 틀어 태안 앞바다 안흥진으로 향하는 바람에 금남정맥이 금강하구로 향하지 않고 부여 구드레나루로 향한 것 같이 금강을 수계로 하는 남북의 산줄기 명칭에 논란이 있다. 산경표 원작자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이는 여러 정맥 중에서 특이한 정맥에 속한다. 하여 산자분수령의 원리를 적용하여 정확하게 물길의 흐름을 구분하려 하는 사람들은 이 맥의 이름을 새로 지어 부르려 하지만 그것보다는 산경표상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백두대간은 험한 산줄기가 굳건한 성이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각 나라의 경계선이었던데 비해 한남금북정맥의 주변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각축장이되었다. 한편 금북정맥은 금강의 수계를 형성하면서 조선시대에 차령을 중심으로 그 문화적 교류가 남북으로 나누어 지다 호서지방으로 접어들면서 해양문화와 육지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외국의 문물까지 교역하는 길이 된다. 서산 마애삼존불과 태안 마애삼존불은 중국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 길목에 형성된 문화들이다. 또한 천주교의 유입이 이곳 안흥진을 경유하여 들어왔기 때문에 금북정맥 인근에는 순교지가 많다.

 

 

* 종주에 필요한 지형도 도엽명;

- 1:50,000 지도 : 근흥, 만리포, 서산, 당진, 홍성, 청양, 보령, 예산, 전의, 평택, 진천, 안성 (12매)
- 1:25,000 지도 : 근흥, 소원, 태안, 서산, 운산, 해미, 덕산, 홍성, 라원, 청양, 대흥, 유구, 대술, 광덕,

전의, 의당, 천안, 병천, 서운, 만승, 죽산 (21매)

 

* 금북정맥 대표 산 (도상거리 : 약 267km)

* 칠장산-칠현산-덕성산-무이산-서운산-성거산-태조산-경암산-고려산-국사봉-봉수산-천방산-극정봉-장학산-국사봉-금자봉-문박산-천마봉-오봉산-백월산-오서산-남산-일월산-홍동산-수덕산-뒷산-가야산-일락산-상왕산-동암산-은봉산-간대산-성상산-금강산-장군산-물래산-오석산-백화산-퇴비산-구수산-전막산-지령산-안흥진

 

금북정맥 개략도

 

금북정맥

한남 금북정맥의 끝인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491m)에서 태안반도의 안흥진(安興鎭)까지 금강의 서북쪽을 지나는 산줄기로 칠장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 덕성산,서운산, 성거산(579m), 태조산, 국사봉, 봉수산 등 충남을 가로질러 청양의 백월산(395m)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서북으로 뻗어 오서산(791m)·보개산(274m), 일월산(395m), 수덕산(495m), 가야산(678m)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뻗어 성왕산
오석산, 백화산, 오석산, 지령산을 거친 뒤 태안반도의 끝인 안흥진에서 그 맥을 다 하는 약 280km에 달하
는 산줄기이다.

 

************************************************************************************

 

봄기온이 가슴에 와닿고 날씨가 제법 풀려 가벼운 옷차림에 상쾌한 마음으로 금북정맥 3구간 마루금으로 출발한다.  오늘 진행하는 마루금은 지난 구간에 있어 이번에도 부소령에 도착하고  부소령에서 위례산성(위례산)-공군레이더기지가 있는 성거산-태조산을 찍고는 유량고개에서 종료하게 된다.

 

집결지인 상일동 육교에 도착하니 먼저오신 대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시고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을 하고는 도착하는 버스에 올라 오늘의 들머리지점인 부소령으로 출발한다.

 

버스는 상일동 육교에서 출발하여 중부고속도로을 거쳐 외곽순환도로상 8호선 복정역에서 정차하여 함께할 대원을 태우고는 경부고속도로을 접속하여 경부고속도로상에 있는 안성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다.

 

안성휴게소을 출발하면서 회장님으로 부터 산행설명이 이어지고 버스는 경부고속도로을 거쳐 음성-서평택간 고속도로을 이용하여 서안성 IC로 빠져나와 23번국도-34번국도-57번지방도를 이용하여 부소령에 도착한다.

 

부소령에 도착하여 베낭을 챙기고는 카메라에 부소령 주변을 사진에 담고는 선두을 시작으로 부소령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는 방향으로 들머리을 잡고는 산행이 시작된다.

 

부소령(해발274m) 

위치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 68-1

부소령(부수문이고개)는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와 북면 운용리을 잇는 57번 지방[2차선]도 고개 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부소령은 백제 첫 도읍지 하남 위례성 직산 백제시대(BC18 ~ 6 , 13 년)이며.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을 하여 이곳에 문을 세웠다는 이유로 '부소'는  '솔(松)'이라는  뜻으로 소나무산 고개라고도 한다. 백제때 이곳에 부소문을 달았다고 하여 소나무 고개의 뜻을 지녔다고 하며, 부수문이고개는 '扶蘇門嶺'이라 하고 백제시대에 이곳에 부소문을 세웠다고 해서 얻은 이름입니다

 

부소령[해발274m, 扶蘇岺, 부소치(扶蘇峙), 부소문이 고개, 부수문이 고개] 

부소령 표지석 뒷편에는 부소령의 설명이 적혀있었고 부소령[부소이문 고개(扶蘇門峙)]는 충남 천안시의 동남구 북면 운용리와 입장면 양대리 경계에 위치한 고개이다.

『팔도군현지도』(목천)와 『조선지도』(목천)에서 직산, 안성과의 경계부에 부소치(扶蘇峙)가 나타난다.

『조선지형도』에 북면 운용리와 입장면 양대리 경계에 부소령(扶蘇岺)이 있다.

백제 온조왕이 처음 도읍한 위례성에 대하여는 광주위례성설과 직산위례성설이 있다. 이곳은 직산 위례성설의 그 위례성과 가까운 곳으로서 온조왕이 처음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으므로 부소문이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부소령 삼각점(해발268m)

부소령 삼각점은 부소령 표지석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부소령 표지석의 모습

부소령은 백제 온조왕이 처음 도읍한 위례성에 대해서 광주 위례성설과 직산 위례성설이 있다. 이곳은 직산 위례성설의 위례성과 가까운 곳으로 온조왕이 처음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기 때문에 부소문이 고개라고 한다. 부수문이 고개, 서낭당이 고개, 부소문령(扶蘇門嶺), 부소령(扶蘇嶺), 부소치(扶蘇峙)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

 

부소령 이정표 : 위례산 2.4km

 

천안 성거산 위례성 안내판의 모습

 

부소령고개에서 위례산방면 진행방향을 화살표로 표시한 모습

 

부소령은 지난구간에 이어 두번째 도착하고 베낭을 챙겨 주변을 살펴본다. 부소령(부수문이고개)는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와 북면 운용리을 잇는 57번 지방[2차선] 도로 고개 마루에 위치하고 있고, 부소령은 백제 첫 도읍지 하남 위례성 직산 백제시대(BC18 ~ 6 , 13 년)다.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을 하여 이곳에 문을 세웠다는 이유로 '부소'는  '솔(松)'이라는  뜻으로 소나무산 고개라고도 한다.백제때 이곳에 부소문을 달았다고 하여 소나무 고개의 뜻을 지녔다고 하며, 부수문이고개는 '扶蘇門嶺'이라 하고 백제시대에 이곳에 부소문을 세웠다고 해서 얻은 이름입니다.

 

부소령 이정표 뒤편으로 완만하게 올라서면 넓은 임도길 같은 등로길이 나오고 마치 둘레길을 걷는것 같은 느낌이다. 무명봉을 지나 내려서면 소나무가 있는 쉼터가 나오고 한차례 오르면 위례산성과 입장양대리 갈림길이 나온다.

안부 입장 양대리방면 우측편으로 쉼터가 있는데 조망은 없었고 안부에서 90도 방향을 좌측방향으로전환하여 진행하면 524봉인 돌탑이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524봉에는 돌탑 2개와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고,  조금더 진행하면 산의 정상부에 위례산성터의 흔적이 있으며 위례산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위례성이란 명칭에서 ‘위례’는 우리말의 ‘울타리’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다. 위례산은 직산 위례성, 검은 산, 신산(神山)으로도 불린다.

 

 부소령 고개에서 진행하는 모습

부수문이 고개에서 위례산(위례산성)까지는 완전히 둘레길 같은 느낌이며 부소령에서 약40여분 완만하게 진행하면 위례산에 도착한다.

 

부소령 진행하면서 뒤돌아본 모습

 

무명봉 통과

 

위례산성(위례산) 오름길에 있는 쉼터

부소령에서 진행하면 한결 부드러운 등로길이 나오고 그리 급하지 않은 마루금이 이어져 오늘 산행도 편안한 마음으로 진행할것 같은 기분이다.

 

위례산 조망

등로길 좌측편으로 위례산 정상부가 조망된다.

 

위례산성과 입장양대리 갈림길의 모습

완만하게 올라서면 안부에 도착하고 우측편으로 쉼터가 있는데 조망은 없었다. 이지점에서 90도 방향을 좌측으로 전환하여 진행하면 돌탑봉까지 오름길을 올라야 한다.

 

위례산성과 입장양대리 갈림길 이정표 : 부소문이고개2.1km, 입장(양대리)2.1km, 위례산0.3km

부소령에서 약35분정도 완만하게 진행하니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 방면의 갈림길 나온다.우측방향은 거봉포도로  유명한 천안시 입장읍으로 가는 길이고, 마루금은 이지점에서 좌측으로 방향전환하여  진행한다.

 

524봉[위례산 삼각점과 두개의 돌탑]

부소령에서 완만하게 진행하여 위례산성과 입장 양대리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전환하여  약8여분 진행하면 524봉에 도착한다. 524봉에는 돌탑 2개와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다.

산의 정상부에 위례성이 있어서 위례산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위례성이란 명칭에서 ‘위례’는 우리말의 ‘울타리’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다. 위례산은 직산 위례성, 검은 산, 신산(神山)으로도 불린다.

 

524봉삼각점(△447재설, 78.10 건설부)

 

위례산성 정상부의 모습

위례산 주변에는 위례산성터 흔적이 남아있고 정상석 앞으로 위례산성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위례산은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운용리 사이에 있는 산이며 높이는 523m이다. 직산위례성·검은산·신산(神山)이라고도 한다.차령산맥의 연봉을 이루며 북쪽 비탈면이 급경사를 이루어 천연 성벽 역할을 한다.산 정상의 위례성터에는 둘레 550m, 높이 약 3m의 흙으로 쌓은 산성을 비롯하여 식수로 사용한 듯한 우물 '용샘'과 문받침돌로 여겨지는 큰돌 반쪽이 남아 있다.

 

이 산성과 마주하여 안성의 서운산성이 남향으로 축조되어 있어 주목된다.일부 학자는 서운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쪽 끝 기지였고, 위례성은 백제 문주왕의 북쪽 끝 방어선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남쪽으로 오르는 계곡의 경관이 수려하고 산기슭에는 금성사라는 사찰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주변에 독립기념관, 유관순열사 유적지, 천안상록리조트 등의 관광지가 있다.

 

위례산정상부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산성 터가 나오고 조금더 진행하면 쉼터가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지점에서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장생이와 군단이마을이 나오고, 군단이 삼거리에서 약7여분 완만하게 진행하면 490봉에 도착한다. 490봉에서 급경사지을 내려서면 90도 방향으로 좌측편으로 전환하여 진행하다 보면 우측편으로 묘지 두개가 나오고 조금더 진행하면 임도에 도착한다.

 

임도길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성황당고개가 나오고 우측능선으로 오르면 송전철탑 두개가 나온다. 송전철탑에서 내려서면 우물목고개에 도착하며 우물목고개는 북쪽의 입장면 시장리 호당리와 남쪽의 북면 납안리를 연결하는 도로의 정상부에서 성거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군사용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방향이다.

 

우물목고개에서 포장도로로 진행하다보면 우측편으로 헬기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사리목고개다. 고개의 모양이 새끼를 사리어 놓은 모양이기 때문에 사리목 고개라고 하며 사리목의 ‘목’은 항(項)을 뜻하는 것으로서 고개가 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리목고개에서 진행하면 천주교 대전 교구 성거산 성지 안내판이 나오고, 체육시설, 천주교대전교구 성거산성지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도로 따라 진행하면 성거산 둘레길 우회등로가 나오는데 직진 군부대방향을 버리고 좌측편 우회등로로 진행하면 공군부대 레이더기지가 가깝게 보이고 무명봉을 넘어 천흥리 갈림길을  진행하면 성거산 제2봉에 도착한다.

 

성거산 정상석은 원래 해발 579m인 우측편 산 위에 세워져야 하지만,군부대 때문에 부득이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557봉의 정상도 이곳이 아니라 바로 뒤쪽에 약간 높은 곳에 삼각점과 함께 있다. 정상 확인한다고 하다가 알바하기 좋은 곳입니다. 정맥은 정상 너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상석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떨어져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위례산성 이정표 : 우물목고개 2.4 km, 부소문이고개2.4km

 

위례산성비의 모습

위례산성의 규모가 작아 적의방어를 위해 만든 산성으로 생각한다. 위례산성 주변으로 산성터의 흔적이 있고 위례산성비 뒤편으로 위례산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위례성

위례성이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울타리를 뜻한다는 해석이다. ‘위례’는 사방을 널리 둘러싼다는 뜻의 위리(圍籬)와 음이 비슷하므로 목책을 세우고 흙을 쌓아 만든 담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강 옆에 쌓은 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 ‘위례’는 욱리하(郁里河), 아리수(阿利水)와 함께 한강을 가리키는 이두(夷讀)식 이름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왕이 사는 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에는 “백제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는데 중국 말로 왕(王)”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위례’는 어라와 함께 왕 내지 ‘크다’라는 뜻이며, 위례성은 왕성 혹은 큰 성[대성(大城)]이라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견해 중 가장 널리 인정되는 것은 ‘위례’가 담이나 울타리를 뜻한다는 첫 번째 해석이다

 

천안 성거산 위례산성(慰醴山城) 안내판의 모습

백제사조 온조왕이 마한 목지국의 진왕으로 부터 북동 100리 땅을 봉토 받아 백제 첫 도읍지(하남 위례 해발525.9m인 위례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태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950m 정도이다.  

성벽은 토.석혼축 공법과 석축공법의 2중구조로 이루어져다. 흙과 돌을 혼합하여 쌓은 부분을 자연암반을 평탄하게 고른후 1.5m 너비로 2열로 돌을 평행으로 쌓고 그 위에 흙과 잡석 및 기와조각을 섞어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5m이고 돌로 쌓은 성벽은 경사가 급히 40m 구간에만 남아 있는데 주로 자연함석으로 쌓았는데. 현재 높이 4m 정도이다.

이성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백제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으로 보기도하나 조사결과 도읍성이라기 보다는 방어를 위한 산성으로 보인다.

 

위례산(慰禮山, 해발 523m)정상석에서 인증샷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 동남구 북면 운용리의 접경부에 있는 산.

위례산(慰禮山)[523m] 정상부에 위례성(慰禮城)이 있다. 하지만 이 성이 백제 온조왕이 세웠다는 위례성 또는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따르면, 온조왕 13년(BC 6년)에 왕이 신하들에게 “동쪽의 낙랑(落浪)과 북쪽의 말갈(靺鞨)이 자주 침범하니 한수(漢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한 뒤,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백제의 첫 도읍지가 직산이라 하였다.
학자들은 대체로 하남 위례성이란 ‘강 남쪽의
위례성’이라는 뜻이며, 여기서의 강은 지금의 한강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의 도읍은 처음부터 한강 남쪽에 있었던 셈이 된다. 하지만 온조왕위례성에서 한강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또 다른 기록에 따른다면, 위례성은 한강 북쪽의 하북 위례성과 한강 남쪽의 하남 위례성으로 각각 나뉘게 된다. 지금 역사학계는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위례산 지명유래

본디 용왕의 아들인 백제의 왕은 용샘을 통해 공주(公州)와 위례산성을 오가며 고구려군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위례산이 천연적으로 유리한 지형인 데다가 백제의 왕이 조화를 부려 백제군은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평소 왕을 못마땅하게 여긴 왕의 처남은 여동생인 왕비에게 왕이 사람이 아닌 용이라는 말을 듣고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왕의 처남은 용이 좋아한다는 제비를 미끼로 건 낚싯대를 강물에 담가 놓고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위례산성에서 종일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피로에 지친 왕은 용으로 변하여 공주로 되돌아올 때쯤 몹시 배가 고팠다. 왕은 때마침 평소 좋아하는 제비가 눈에 띄자 급히 입으로 물었다. 그 순간 왕의 처남이 힘껏 낚싯대를 채자 왕은 낚싯바늘에 걸려 그만 죽고 말았다.
왕이 죽은 다음 날
위례산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백제군이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였다고 해서 울애산 또는 우래산이라고 하던 것이 위례산으로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처남이 아니라 사위가 왕이 되려고 백제의 왕을 죽였다고 전한다. 그때
성거산(聖居山)에 주둔하고 있던 왕의 큰아들이 큰 창을 세워 놓고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이 왕 노릇을 하자고 하였다. 사위가 먼저 창을 뛰어넘으려는데 왕의 큰아들이 창을 들고 있다가 뛰어넘으려는 매부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 매부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산이므로 승거산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성거산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밖에
위례산에서 활 쏘는 연습을 한 곳을 사당골이라 하였는데, 이는 원래 사장골[射場谷]에서 유래하였으리라 추측한다. 또한 말먹이를 쌓아 두던 사초골, 말을 먹이던 말마골, 군사들이 주둔하던 군단이, 백제 온조왕위례성에 도읍하였을 때 문을 세웠다는 부소문이[扶蘇門嶺] 고개 등 각 지명이 생겨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위례산[慰禮山, 해발 523m]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운용리 사이에 있는 산.높이는 523m이다. 직산위례성·검은산·신산(神山)이라고도 한다.차령산맥의 연봉을 이루며 북쪽 비탈면이 급경사를 이루어 천연 성벽 역할을 한다.산 정상의 위례성터에는 둘레 550m, 높이 약 3m의 흙으로 쌓은 산성을 비롯하여 식수로 사용한 듯한 우물 '용샘'과 문받침돌로 여겨지는 큰돌 반쪽이 남아 있다. 이 산성과 마주하여 안성의 서운산성이 남향으로 축조되어 있어 주목된다.일부 학자는 서운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쪽 끝 기지였고, 위례성은 백제 문주왕의 북쪽 끝 방어선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남쪽으로 오르는 계곡의 경관이 수려하고 산기슭에는 금성사라는 사찰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주변에 독립기념관, 유관순열사 유적지, 천안상록리조트 등의 관광지가 있다

 

위례산성의 터의 모습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서로 다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위례성이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조선 시대의 직산군 이동면] 지역이라고 믿었다. 천안시 입장면위례산 정상부를 감싼 위례산성(慰禮山城)이 그 흔적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인 학자들이 주로 유적·유물을 분석하는 고고학적 방법으로 위례성의 위치를 밝히려 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남한산성·풍납토성처럼 한강 유역의 규모가 큰 성에 주목했다. 광복 이후에는 처음에 하북 위례성이 북한산 기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널리 인정되었다. 1970~1980년대에는 서울특별시 송파구의 몽촌토성(夢村土城)에 비정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위례산성과 마주하여 경기도 안성시의 서운산성이 남향으로 축조되어 있어 주목된다. 일부 학자는 서운산성이 고구려 
장수왕의 남쪽 끝 기지였고, 위례성은 백제 문주왕의 북쪽 끝 방어선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길주의] 쉼터앞에서 좌측으로 내림길

위례산성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쉼터가 있는 갈림길이 나오고 이지점에서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우물목고개 방향이다.

 

군단이(운용리) 마을 갈림길의 모습

위례산성에서 내려서면 좌측방향으로 장생이와 군단이마을로 연결되며마루금 정맥길은 직진으로 진행한다.

 

운용리 군단이 마을 갈림길 이정표 : 위례산  군단이2.1km, 우물목고개2.2km

 

490봉 정상부의 모습

군단이 삼거리에서 약7여분 완만하게 진행하면 490봉에 도착한다 바로 아래에는 우회등로길이 있는지 정상부에 올라  천안시 입장면 일대을 조망하고는 우측방향으로 내려선다 . 급경사지라 조심해서 내려서야 한다.

 

유성관광농원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납안5길 66

1968년부터 심기 시작한 밤나무 20여 만 그루를 비롯해 각종 유실수를 갖춘 과수 농장으로 위례성 동남 기슭에 자리 잡은 국내 최대 규모의 밤나무 농장이다.
165㏊의 농장에 밤나무 20여 만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살구, 매실, 은행, 모과, 호도 등의 유실수와 버섯, 콩 등의 재배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원두막과 나무 벤치, 놀이터 등의 쉼터가 있고, 바비큐장과 족구장 등을 갖추고 있다. 1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 시설과 3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이 있다. 숙박 시설은 별장식 민박 가옥 5동과 단체 숙박을 할 수 있는 여관 1동이 있다.

 

490봉(유성농장 갈림봉) 이정표 : 위례산0.9km, 유성농장입구2.9km, 사리목

 

490봉에서 바라본 천안시 입장면 일대의 모습

 

490봉에서 내려서는 급경사지의 모습

 

묘지 통과

490봉 급경사지을 내려서면 90도 방향을 좌측편으로 전환하여 진행하다 보면 우측편으로 묘지 두개가 나오고 조금더 진행하면 임도에 도착한다.

 

임도 통과

490봉에서 내려서면 임도길이 나오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성황당고개에 도착한다.

 

임도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의 모습

 

임도길의 모습

 

임도길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성황당고개 안부의 모습

 

성황당고개 안부 이정표 : 위례산정상1,355m, 우물목고개735m

 

성황당의 모습

성황당고개에는 성황당 나무 옆으로 돌탑이 있고, 마루금은 우측편 능선으로 오르면 되지만 지도상에는 지명이 없었다. 산꾼들은 이곳을 '성황당고개' 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성황당고개에서 우측방향으로 오르는 등로길의 모습

 

성황당고개 안부 진행하면서 뒤돌아본 모습

 

오름길의 모습

 

첫번째 송전철탑 통과

 

성거산 조망

송전철탑 사이로 보이는 산이 성거산 제2봉 557봉과 제1봉 579봉이다. 산꾼들에게는 1봉은 통제지역으로 우회하여 2봉을 성거산이라 하고 있다.

 

두번째 송전철탑 통과

 

우물목고개(해발325m)통과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납안리,서북구 입장면 호당리

우물목고개는 북쪽의 입장면 시장리 호당리와 남쪽의 북면 납안리를 연결하는 도로의 정상부에서 성거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군사용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도로 이정표상으로는 "천주교대전교구 성거산성지" 방면으로 2km 정도 도로따라 간다. 

 

우물목고개 삼거리 이정표 : 위례산 정상2135m, 북면남안리, 입장호당리, 성거산정상2975m

 

성거산방면의 등로길

 

우물목고개(해발325m, 정항령.井項嶺) 삼거리 뒷모습

우물목괘는 고개 위에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우물목 고개라고 하였으며, 한자로는 정항령(井項嶺)이라 한다. 지금은 호당리에서 올라오는 길 중간에 약수터가 남아 있다.
해발 고도는 약 325m이며, 좌표는 북위 36도 51분, 동경 127도 14분이다.
우물목 고개의 남쪽 능선을 따라서 사리목 고개가 있다.
우물목 고개 부근의 지질은 흑운모 편마암과 화강암질 편마암으로서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것이다.
천주교 성거산 성지로 가는 도로가 2차선으로 포장이 되면서 과거 고개의 위치와 현재의 위치가 달라졌다. 과거에 고개 정상이 우물 근처에 있었다고 추정한다면 현재의 위치는 과거의 위치보다 약 500m 가량 남동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사리목고개 (헬기장 350m)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납안리 서북구 성거읍 천흥리를 연결하는 고개.

 

사리현[사리峴]

고개의 모양이 새끼를 사리어 놓은 모양이기 때문에 사리목 고개라고 한다. 사리목의 ‘목’은 항(項)을 뜻하는 것으로서 고개가 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리현[사리峴]이라고도 한다.
사리목 고개의 해발 고도는 약 350m이고, 좌표는 북위 36도 51분, 동경 127도 13분이다. 성거산[573m]의 북쪽 능선의 약 1㎞ 전방에 위치하며, 사리목 고개의 북쪽 능선을 따라 우물목 고개가 있다.
과거에는 사리목으로부터
사리목 고개로 올라오는 비포장도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이용되지 않고, 현재는 인근의 천주교 성거산 성지 방향으로 난 2차선의 포장도로를 이용한다. 사리목 고개에는 현재 헬리콥터의 이착륙 지점 표시가 되어 있으며 고갯마루 바로 직전에 무덤이 있다. 

 

핼기장인 사리목개에서 약200m 전방에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 성지 입구가 나온다.

 

천주교 대전 교구 성거산 성지 안내판의 모습

 

도로옆 체육시설 통과

 

천주교대전교구 성거산성지 갈림길

성거산 천주교 순교성지

우물목고개에서 성거산 공군부대로 오르는 중간에 천주교 성거산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고, 차례대로 무덤 표석이 1,2줄 무덤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난 구간인 배티재 바로 아래에 배티성지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당시 산속에 은거하며 포교활동을 하던 교도 30여 명이 관군에게 모두 학살을 당한 곳으로 무명의 묘소들이 즐비한데 과연, 대간이나 다른 정맥들과는 달리 천주교가 금북정맥 끝 안흥진을 경유하여 유입되었기 때문에 인근에 순교지가 많은 것 같다.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의 안내판의 모습

 

성거산 천주교 성지 안내 표시석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 병인박해(1866년) 끝날 때까지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살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특히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성거산 교우촌 출신 순교자 23명중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소학골 출신 5분의 순교자들과 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성지순례 안내판

 

성거산 순교성지 제1무덤 표지석의 모습

 

성거산 성지

성거산 성지는 박해시기에 마을에서 살 수 없었던 천주교 신자들의 이주 현상이 일어나면서 형성된 교우촌과 이 교우촌에서 사목 및 활동하셨던 선교사들 그리고 교우촌에 살던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신 순교자들을 소개 할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의 이주기(移住期)에 형성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과 1830년대에 형성된 서들골(일명 서덜골) 교우촌은 박해시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피신처요 은신처였다. 특히 소학골은 한 때 칼래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하기도 하였던 곳이기도 하며. 서들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님의 큰 아버님인 최영렬씨가 1827년 고향 청양 다락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 서들골로 이주하여 살았고, 1839년의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님의 둘째 동생인 최선정(안드레아)가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이곳에서 잠시 성장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교우촌을 중심으로 병인박해 이후부터 계속 생겨난 교우촌들은 점점 통 폐합 되었다가 1920년에 와서는 7개의 교우촌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1845년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후 박해시기인 1851년부터 1861년 10월까지 이 곳 교우촌에 순방하고 관련을 맺었던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를 보면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신부, 페롱신부, 권스타니슬라오 신부, 프티니 콜라 신부 등이 사목방문을 하였고, 1861-1866년 10월까지 이어서 조안노 신부, 페롱신부, 칼래 신부 등이 사목방문 및 활동을 하였다. 특히 칼래 신부님은 1864-1866년 10월까지 소학골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았다.

 

또한 병인박해의 목천 순교사를 보면 1866년 10월(음력) 소학골과 서들골, 주위의 교우촌이 발각이 되기 시작하면서 계속 포졸들이 덮쳐 이 곳 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잡혀 모두 23명이나 순교하게 되었다. 소학골 교우촌 9명, 서들골 교우촌 4명, 복구정 교우촌 2명, 베장골 2명, 장자동 4명, 공심리 1명, 목천 1명 모두 23명이나 된다. 이들은 서울 좌포도청(11명), 공주감영(6명), 청주(2명), 죽산(3명), 미상(未詳 1명)에서 순교하였다. 현재 병인년 10월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순교 한 배문호(베드로)와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나자로). 고요셉과 최씨 며느리 등 5명의 시신만이 성거산 성지 제1줄 무덤에 묻혀 있다. 이 이외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현재 이 곳 성지에 이전(移轉)한 여섯분들의 증언과 순교자들 후손들의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 곳에 묻혀 계신다고 한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증거한 장한 순교자님들은 그 동안 오랫동안 오고가는 사람 없이 들꽃들과 벌, 나비, 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성거산성지의 교우촌과 무명 순교자 묘소는 침묵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었다. 이제는 신앙인의 순례의 선교지가 되고 있다. 달이 바뀔 때마다 주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야생화는 마치 우리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과 신앙 때문에 흘린 피를 상징하듯이 오는 순례자들을 반기고 있다.

 

천주교 순교 성지 앞에서 바라본 천안시 성거읍과 천흥 저수지의 모습

 

성거산 성지에서 지나온 위례산의 모습

 

성거산정상 우회등로길의 모습

 

도로탈출 우회로 이정표 : 우물목고개2.15km, 성거산정상660m

우물목삼거리에서 이곳까지 약2.15km를 도로따라 올라왔다. 실제 성거산 정상(579m)은 도로따라 가야 하는데 통제지역으로 진입할 수 없다,

좌측방향으로 우회하여 삼각점이 있는 557봉을 산꾼들에게는 성거산 정상으로 대신하고 있다.

이지점에서 좌측방향 둘레길로 우회하여 진행한다.

 

성거산 정상 우회등로의 모습

원래 성거산정상은 직진방향인 군부대가 있는 지점인데 그곳은 공군 레이더기지가 위치하여 방문하지 못하고 성거산정상이 약간 비껴서 성거산 2봉에 정상석이 있다.

 

성거산 우회등로 안내판의 모습

 

성거산 둘레길 우회등로상에 있는 나무 다리의 모습

성거산 우회등로에는 지자체에서 둘레길을 만들어 등로길을 잘 정비해서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성거산 정상에 자리잡은 공군 방공포 부대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곳인 성거산은 공군 방공포 부대인 8352부대가 정상을 차지하는 바람에 부대 정문에서 좌측방향으로 우회하여 진행한다.

 

방향전환 이정표 : 우물목고개2,455m, 성거산정상510m

이지점에서 좌측방향은 은석산으로 이어지며, 마루금은 우측방향 나무계단으로 내려서야 한다. 좌측편에 무명봉이 있어 혹 삼각점이라도 있는지 확인하였지만 보이지 않고 은석산방향이라는 작은 리본이 있었다.

 

공군 방공포 부대인 8352부대의 모습

 

무명봉 갈림길 : 천안독립공원과 작성산,은석산 방면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이 있다.

 

무명봉의 위치에서 바라본 성거산 정상의 모습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리 와 동남구 북면 남안리·목천면 석천리의 경계에 있는 산.

성거산(聖居山)은 차령산맥의 주봉이 지나는 곳으로 높이는 579m이며,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와 북면 남안리·목천면 석천리의 경계가 된다. 서쪽 산기슭으로는 안성천의 지류인 입장천, 남쪽 산기슭으로 산방천, 동쪽 산기슭으로 은석천이 발원한다.

성거산은 차령산맥의 북쪽에 발달된 화강암 지대로 태조산을 비롯하여 왕자산, 일봉산, 노태산 등이 주변부에 발달해 있다. 산지의 경사는 비교적 급하나 산림지의 역할을 하며, 두 종류 이상의 수목으로 구성된 혼합림(混合林)이 자라고 있다. 능선은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고, 정상의 북서 산기슭에는 계곡들이 위치한다. 이들 계곡수는 정상으로부터 약 2㎞ 떨어진 천흥 저수지로 집수된다.

 

공군 방공포 부대인 8352부대의 모습

 

공군 방공포 부대인 8352부대의 모습

지금 보이는 저곳이 성거산 제1봉이다

 

천흥리임도 갈림길의 모습

 

 천흥리임도 갈림길 이정표 : 천흥리 임도1.0km, 만일사0.3km, 각원사3.4km 

 

성거산 정상석(해발 579m)

고려 태조가 이 산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의 구름이 떠 있어 신이 계시는 산이다 하고 조선 이태조와 세종대왕이 온양온천을 갈 때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성거산 정상석은 원래 해발 579m인 건너편 산 위에 세워져야 하지만,군부대 때문에 부득이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557봉의 정상도 이곳이 아니라 바로 뒤쪽에 약간 높은 곳에 삼각점과 함께 있다. 정상 확인한다고 하다가 알바하기 좋은 곳입니다. 정맥은 정상 너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상석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떨어져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거산 정상석의 모습

성거산 정상부는 공군부대에 정상을 빼앗기고 엉뚱한 곳에 있는 성거산 정상석 성거산 제2봉(聖居山 556m) 정상석 성거산 제1봉(579m)은 통제지역으로 오를 수 없고, 제1봉을 우회하여 제2봉(556m)에 올랐다.

정맥길은 성거산 표지석 뒷쪽으로 만일고개까지 가파른 내림길이다. 정상석에서 30m 거리에 삼각점이 있으며 조망이 좋은 위치로 금북정맥의 마루금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삼각점과 전망바위에서 조망을 하고는 복귀하여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경사지가 나오고 해빙기라 땅속의 얼음이 녹아 진흙탕이 되어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바로 아래 공터에서 후미그룹이 점심식사을 하고 있어 함께 간단하게 식사을 마치고는 경사지을 내려 만일고개에 도착한다.

 

만일고개라는 이름은 바로 아래에 만일사와 만일리 라는 마을이 있어 불리어진것 같은  생각이다. 만일고개(晩日嶺)는 '매일골고개'라고도 불리어 지며 송전리 매일골에서 금북정맥을 넘어 천흥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이 고개를 넘자면 해가 꼴깍 넘어 가서 만일고개라고 불렀든가,매일고개란 말이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만일고개로 변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만일고개을 통과하고 부터는 등로길이 편안하여 마치 둘레길을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소나무들이 많이 살림욕하기에 좋을것 같았다.  성거산과 걸미고개 사이 국민은행 연수원방면 무명봉이 영인지맥으로 이어지는 등로길이다. 마루금은 이지점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한다.

 

연인지맥에서 내려서면 걸마고개 가 나오고, 걸마고개는 예전에 칡이 많이 나서 '갈(칡葛)뫼'가  갈마고개로 변음이 되었다고 한다. 걸마고개에서 올라서면 경사지가 나오고 등로길이 미끄러워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요즘 해빙기라서 그런지 진흙탕이라 등로길을 비껴 진행한다. 372봉은 등로길 우측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목이 무성한 조림지을 지나 오르면 상명대학교 갈림길이 나오고 태조산방면으로 진행하여 내려서면 유황골에 도착한다.

 

유황골고개는 천안시 목천읍 덕진리 자연부락으로 이곳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유왕골이 나오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오늘 산행 날머리인 각원사가 나온다. 유왕골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천하를 살피고 머무른 마을이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입구에는  유왕골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유왕골도 왕건(王)이 머물렀던(留) 골짜기란 뜻이다. 유왕골 고개엔 정자가 있어 지역 등산객들이 많이 쉬고 있다. 이정표엔 "좌측 약수터/우측 좌불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유황골에서 올라 내려서면 다시 각원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나오고 완만하게 오르 내림을 하면 구름다리 갈림길에 도착한다. 갈림길 주변에는 체육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휴식을 할수 있도록 정자와 의자들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구름다리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도라지고개에 도착한다. 도라지고개는 천안시 동남구 유량동 과 목천읍 덕전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며, 도라지고개가 험하여 올라가다가 쉬게 되면 금세 졸음이 오는 고개라 하여 조라지 고개라고 하였고, 이것이 도라지 고개로 변했다. 해발 고도는 약 300m이며 좌표는 북위 36도 49분, 동경 127도 12분으로 태조산[422m]의 북쪽 능선 약 500m 전방에 위치해 있다. 도라지 고개의 북쪽 능선에는 유왕골 고개가 위치해 있다.

 

도라지고개에서 직진으로 완만하게 진행하면 청소년수련원 갈림길이 나오고  청소년수련원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진행하면 119 현위치 정상길 제5, 6지점 두개가 나오고 좌측방향으로 오름길을 오르면 철책으로 만든 철조망이 나온다. 뚤려있는 철문을 통과하여 한차례 밀어올리면 태조봉인 태조산 정상에 도착한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분주 할 때 직산면 수헐원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동쪽 산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영롱함을 보고 신령(神靈)이 사는 산이라 하여 거룩할 성(聖)자와 거할 거(居)를 써서 성거산이라는 명칭을 지어 주었고 친히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도 이 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거산(聖居山, 해발579m)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입장면, 북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는 579m이다. 천안 시가지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다.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을 때 천안시 직산면 산헐원을 지나다가 동쪽의 이 산을 보고 신령이 있다면서 성거산이라고 부르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상에는 성거산성(충남문화재자료 263)이 있는데, 지금은 군사 기지가 들어서 있다.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성곽이 많이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면 백제 도읍지였던 위례산의 위례산성에 이른다. 서쪽 산중턱에 晩日寺가 있으며,경내에는 오층석탑과 마애불 등 문화재가 여러 점 있다.산자락에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천흥사지(天興寺址)가 있는데, 현재 절터는 마을로 변하였지만 오층석탑(보물 354), 당간지주(보물 99) 등 중요한 문화재가 많이 있다.


성거산 삼각점(평택 22, 1990 재설)의 모습

 

삼각점 안내판의 모습

 

성거산 삼각점 위치에서 바라본 조망지의 모습.

성거산의 지명유래

『해동지도(海東地圖)』[직산]의 이남면 남쪽에 성거산과 귀암사(龜岩寺)가 나타난다. 또한 『조선 지형도(朝鮮地形圖)』에는 성거면, 북면, 목천면 경계에 걸쳐 있고 북서쪽에 직산 금광이 기록되어 있다.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힘쓰고 있을 당시 천안시 직산읍 산헐원을 지나다가 동쪽의 성거산을 보고 신령이 있다 하여 성거산이라고 부르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전망바위의 모습

전망바위는 성거산 제2봉 정상석에서 직진으로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삼각점이 나오고  바로 앞에 바위가 보이는데 조망이 좋다. 전망바위 가운데 외로운 소나무 한그루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고, 잘못하면 이곳을 지나 알바하기 쉬운지점이다. 전망바위을 조망하고 다시 성거산 정상석이 있는곳으로 복귀하여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태조산방면 마루금으로 이어진다.

 

전망지에서 바라본 천안시 입장면 성거일대의 모습

 

전망지에서 인증샷

 

급경사 내림길의 모습

암릉 조망지에서 성거산 정상석이 있는 지점에 복귀하여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급경사지가 나오고 해빙기라 땅속의 얼음이 녹아 진흙탕이 되어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바로 아래 바위공터에서 후미그룹과 점심식사을 하고는 날머리지점인 유랑리고개로 진행한다.

 

119 현위치 제30지점

 

119 현위치 제29지점

 

만일고개(만일령,萬日嶺, 해발350m)

만일고개라는 이름은 바로 아래에 만일사와 만일리 라는 마을이 있어 불리어진것 같은  생각이다.

만일고개(晩日嶺)는 '매일골고개'라고도 불리어 지며 송전리 매일골에서 금북정맥을 넘어 천흥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이 고개를 넘자면 해가 꼴깍 넘어 가서 만일고개라고 불렀든가,매일고개란 말이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만일고개로 변했으리라 짐작

 

만일고개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리 동남구 목천읍을 연결하는 고개. 만일고개는 남쪽의 송전리와 북쪽의 만일사, 천흥저수지 방면으로 연결된다.정맥길은 각원사 방면으로 직진한다.

 

만일고개

성거산 중턱에 만일사(晩日寺)라는 절이 있어서 만일 고개라고 하고, 절을 매일절이라고도 하여 매일 고개라는 이름도 있다. 한자로 만일령(萬日嶺)이라고도 한다.
만일 고개의 해발 고도는 약 350m이며, 좌표는 북위 36도 50분, 동경 127도 12분이다. 성거산의 서쪽 능선에 접해 있으며, 만일 고개의 서쪽 능선에는 겉마 고개가 위치해 있다. 만일 고개
부근의 지질은 흑운모 편마암과 화강암질 편마암으로서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것이다.
성거산 등산로에 위치한 고개로 고개의 동쪽 능선에는 성거산이 있다. 성거산의 북쪽 능선에는 사리목 고개우물목 고개가 있다. 고개의 남쪽에는 겉마 고개와 유왕골 고개가 있다. 고개의 북쪽 비탈 근처에 있는 만일사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만일고개 이정표 : 성거산 정상0.6km, 송전리1.3km, 만일사1.0km, 각원사2.7km

 

만일사(晩日寺)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면 천흥리  성거산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
만일사(晩日寺)는 921년(태조 4) 도선(道詵)이 전국 3,800개의 비보사찰 중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도선이 898년에 입적했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오히려 그 뒤 고려 혜종 때 승려 만일(晩日)이 도선의 비보사찰설에 의해 조성했다는 창건 설화가 보다 설득력이 있다. 또한 백학 한 쌍이 바위를 쪼아 불상을 새기다가 해가 늦어서[晩日] 다 만들지 못하고 올라갔다는 설화도 절의 이름과 관련한 창건 설화로 전해진다. 만일사만일사(萬日寺)
로도 기록되어 있다.
만일사
경내의 전각은 대개 새로 지은 것이지만 석불 좌상, 마애불, 오층 석탑 등이 고려 시대 양식을 하고 있어 고려 때 창건된 사찰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직산 
성거산(聖居山)만일사(萬日寺)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까지는 명맥이 이어진 듯하나, 1799년(정조 23)에 발간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廢寺)로 표시되어 있어, 억불 숭유의 분위기 속에서 만일사도 퇴락·폐사되었던 것 같다. 그 뒤 1876년(고종 13) 관음전이 신축되어 이어져 오다가, 1970년에 이르러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현재의 법당을 새로 지었다.

 

119 현위치 제28지점

 

119 현위치 제27지점

 

119 현위치 제26지점

 

편안한 등로길의 모습

만일고개을 통과하고 부터는 등로길이 편안하여 마치 둘레길을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소나무들이 많이 살림욕하기에 좋을것 같았다.

 

영인지맥 분기봉 이정표 : 좌불상, 만일사, 국민은행연수원(국민은행 연수원방면이 영인지맥)

금북정맥 성거산에서 분기하여 아산만 방조제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44.8km의 산줄기이다.

노태산(141m), 용와산(238.3m) , 연암산(292.7m), 둔덕산(225m), 국사봉(222.5m), 금산을 넘어 영인산(363.9m), 입암산(207.4m)에서 서해로 끝은 맺는 산줄기이다.

안성천의 남쪽 산줄기이며 "쌍령지맥","서봉지맥"의 끝과 아산만 방조제에서 만나게 된다. 

 

 

영인지맥

영인지맥은 칠장산에서 태안의 안흥진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 성거산과 걸마고개 사이의 분기점(충남 천안시 안서동과 목천읍 송전동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봉우리임)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쳐 천안시 북부시가지를 지나서 노태산(141m),천안 제3,4공단을 지난다.

아산땅으로 들어선 후 용와산(238.3m),연암산(292.7m),둔덕산(225m),국사봉(222.5m), 금산을 넘어 영인산(363.9m)을 일군후 입암산(207.4m)에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44.8km의 산줄기로,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공세리에서 그 맥을 아산만에 넘기고 있다.

아울러 이 산줄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안성천으로 흘러 들고, 이 산줄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곡교천으로 흘러들며, 두 물줄기는 모두 서해로 흘러간다.

 

119 현위치 제25지점

 

119 현위치 제24지점

 

걸마고개

예전에 칡이 많이 나서 '갈(칡葛)뫼'가 갈마고개가 되고 다시 걸마고개로 변음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등산로가 반질반질하여 칡은 구경도 할 수없다. 
걸마고개에는 이정표가 두개나 있는데 역사의 고장 천안답게 하나는 만일사와
삼뱅이(메일골)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계성군의 묘'와 '숙의하씨 묘'를 가르키고 있다.
'숙의하'씨는 영의정 '하연'의 딸로 부인을 열둘이나 두었다는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후궁중 하나이고, '계성군'은 '숙의하'씨 소생이라고 한다.

조선 성종(9대) 시대의 모자(母子)로 성거산 방향에는 계성군의 묘와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을좌에 있었는데 1971년 서울시의 도시 확장 계획으로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신대동 메일골 신좌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걸마고개(갈뫼고개) 이정표 : 성거산 정상1362m, 국민은행연수원, 태조산,각원사1218m

남쪽의 송전리와 북서쪽의 국민은행연수원 방면으로 연결되는 길이 선명하다.

 

119 현위치 제23지점

 

걸마고개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372봉 오름길의 모습

걸마고개에서 올라서면 경사지가 나오고 등로길이 미끄러워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요즘 해빙기라서 그런지 진흙탕이라 등로길을 비껴 진행한다. 372봉은 등로길 우측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372봉 통과

 

119 현위치 제22지점

 

조림수의 모습

 

조림수에서 인증샷

 

무명봉 통과

119 현위치 제21지점이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에서 태조산방면으로 진행

 

119 현위치 제21지점

 

상명대학교 갈림길

상명대학교 갈림길에서 마루금은 좌측 태조산방향이며.우측방향은 상명대학교, 왕자산 방면의 갈림길이다.

 

119 현위치 제20지점

 

유황골고개

천안시 목천읍 덕진리 자연부락으로 이곳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유왕골이 나오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오늘 산행 날머리인 각원사가 나온다. 유왕골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천하를 살피고 머무른 마을이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입구에는  유왕골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유왕골도 왕건(王)이 머물렀던(留) 골짜기란 뜻이다. 유왕골 고개엔 정자가 있어 지역 등산객들이 많이 쉬고 있다. 이정표엔 "좌측 약수터/우측 좌불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동대불 광장에서 내려다 본 각원사(覺圓寺)

태조산은 천안의 진산으로 유량천, 산방천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고 정상에 오르면 천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산을 중심으로해서 군사 양병을 했다는 설에 인연하여 '태조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해온다.

대한불교 조계종 각원사는 남북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재일교포 각열거사 김영조님의 시주를 중심으로 불교신도들과 많은 사람들의 정성어린 성금들에 의해 1977년 5월 9일 이곳 태조산 중봉에 봉안하였다.

청동대불 높이15m, 둘레30m, 귀길이175cm, 손톱길이 30cm, 무게 청동 60ton의 청동좌불은 태조산 주봉을 뒤로하여 서향을 바라보며 자비의 미소로 많은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대좌불 좌측에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대웅보전과 요사체를 비롯한 사찰건물이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많은 사람들의 기도처로 유명하다.

 

각원사 청동대불

각원사 청동불상은 1977년에 남북통일을 염원하면서 조성한 불상이다.

각원사

충청남도 천안시 안서동 태조산에 자리한 각원사는 개산조(開山祖) 경해법인(鏡海法印) 조실(祖室)스님의 원력으로 1975년에 창건되어 대한불교조계종에 직할교구로 등록된 사찰이다.  
 경해법인 조실스님께서는 한국전쟁(6.25사변)때 통일염원 성전건립의 서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교학과 수행정진 과정에서 태조산에 인연되어 재일동포 ‘각연(覺然) 김영조(金永祚) 거사’와 ‘자연심(自然心) 부인 정정자(鄭貞子)보살’의 시주로 1977년 5월 9일 좌대를 포함해서 높이 15미터, 무게 60톤의 거대한 아미타불 좌불상  "남북통일기원 청동대불"(南北統一祈願 靑銅大佛)을 태조산 중봉에 봉안하였다. 각원사 입구 연화지(연못)에서 203계단인 무량공덕계단을 오르면 청동대불(아미타불)이 자비로운 미소로 참배자들을 반긴다.

재일교포 각열거사(覺列居士) 김영조(金永祚)는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사찰을 세우기 위해 시주를 하였다.

1975년 6월 대불 봉안 위원회를 구성하고 대불 조성에 들어가 높이 15m, 무게 60톤의 청동 대불을 조성하였고, 이후 1977년 5월에 각원사(覺願寺)를 창건하였다.
1978년 3월에 설법전(設法殿)을 건립하였고, 1979년 10월에 칠성전(七星殿)과 산신전(山神殿)을 건립하였으며, 1984년 3월에 관음전을 완공하였다. 1985년 11월에 대웅보전(大雄寶殿)에 모실 삼존불을 조성하였으며, 1992년 9월에 대웅보전 기공식에 들어가 1996년 10월에 대웅전 단일 건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인
각원사 대웅보전이 완공되었다. 2000년 10월에 132㎡[약 40평]의 산신전을 재건축하고 동시에 기존 산신전을 천불전으로 봉안하였다. 2011년 10월 8월에 개산 기념관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칠성전

전각의 이름이 ‘殿’ 으로 한것이 좀 특이하다 명부, 나한, 관음은 ‘殿’으로 하지만 칠성, 독성, 산신을 모신 전각들은 ‘閣으로 하는데 이곳은 ‘殿으로 해놨다.

 

각원사 대웅보전

 

각원사 대웅보전 삼존불 


유황골 이정표 : 성거산3,430m, 유왕골, 각원사입구1,045km, 태조산정상2,360m

유왕골/留王洞)
점말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백제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봄 가을 이 되면 이곳에 와서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다고 목천읍지에 기록되어 있고 고려 태조 왕건이 태조산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이곳에서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유왕골 안내문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유량동목천읍 덕전리에 걸쳐 있는 고개.
백제의 시조인
온조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이곳에 와서 농사를 장려했기 때문에 유왕골이라고 부른다는 설과 고려 태조왕건태조봉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여 유왕골이라고 부른다 설이 있다.

서쪽의 각원사와 동쪽의 유왕골을 연결하는 고개이며, 산꾼들에게 유왕골고개로 알려져 있다.

천안을 통과 하면서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 많이 보인다. "유왕골(留王골)" 을 한자로 풀이하면 왕이 머물렀다는 뜻이다.

 

우측편으로 동양최대 청동좌불상이 있는 각원사가 자리하고 있고, 마루금을 이어가는 산꾼들에게는 가파른 등로 왕복 약1.4km 약40여분 거리로 다소 힘든 걸음이지만 그 가치는 충분하다 생각된다.

 

유왕골에 설치되어 있는 사랑의 쉼터 정자

 

유왕골 통과하면서 뒤돌아본 모습

 

편안한 등로길의 모습

 

119 현위치 제19지점 좌불상 갈림길의 모습

 

119 현위치 제19지점

 

좌불상 갈림길 이정표 : 성거산 정상3,750m / 좌불상610m, 태조산2,040m

각원사 좌불상에서 올라오는 등로가 유왕골고개와 이곳 삼거리 두곳이 있었다.

 

각원사 안내문

 

각원사의 모습

 

119 현위치 제18지점

 

"안서e편한세상" 갈림길의 모습

119 현위치 제18지점

 

"안서e편한세상" 갈림길 이정표 : 안서e편한세상 1,350m, 태조산정상 1,680, 유왕골(약수터) 840m 

 

119 현위치 제18지점

 

구름다리 갈림길의 모습

주변에는 소나무와 체육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름다리 갈림길 이정표

유량동구름다리 방면의 갈림길이며, 마루금은 태조산방면으로 진행한다.

 

제2솔바람길 안내도의 모습

 

119 현위치 정상길 제1지점

 

119 현위치 정상길 제2지점

 

119 현위치 정상길 제3지점

 

119 현위치 정상길 제4지점

 

도라지고개(300m) 청소년수련원 갈림길 이정표 : 성거산정상 1,061m, 청소년수련원 1,250, 태조산 정상

                                                                       843m

도라지고개는 천안시 동남구 유량동 과 목천읍 덕전리를 연결하는 고개.
도라지고개 유래

도라지고개가 험하여 올라가다가 쉬게 되면 금세 졸음이 오는 고개라 하여 조라지 고개라고 하였고, 이것이 도라지 고개로 변했다. 해발 고도는 약 300m이며 좌표는 북위 36도 49분, 동경 127도 12분으로 태조산[422m]의 북쪽 능선 약 500m 전방에 위치해 있다. 도라지 고개의 북쪽 능선에는 유왕골 고개가 위치해 있다.

 

도라지고개(조라지고개)
유량동에서 천안군 목천면 덕전리 유왕골로 넘어가는 고개. 꼬불꼬불 굽어진 고개길이 길고 험하여 넘어가는 도중에 졸음이 온다고 하여 조라지 고개다.지금은 도라지고개로 불리우고 있다.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목천지방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천안에 이르렀던 대로였으나 지금은 한적한 오솔길이 되었다. 

 

國立 中央 靑少年 修練院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교촌리 에 있는 한국 청소년 활동 진흥원 소속 특수 법인.


 

갈림길 통과

도라지 고개에서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양쪽방향으로 진행해도 무방하나 그래도 무명봉 찍고 좌측방향으로 내려선다.

청소년수련원 갈림길의 모습

 

청소년수련원 갈림길 이정표 : 태조산 정상 693m, 청소년 수련원 1,080m, 성거산 정상 5,010m

청소년수련원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이 "청소년수련원" 방면이고 금북정맥 마루금은 태조산방면이다.

 

119 현위치 정상길 제5지점

 

119 현위치 정상길 제6지점

 

태조산 정상 직전에 울타리 진입.

청소년수련원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진행하면 119 현위치 정상길 제5, 6지점 두개가 나오고 좌측방향으로 오름길을 오르면 철책으로 만든 철조망이 나온다. 뚤려있는 철문을 통과하여 한차례 밀어올리면 태조봉인 태조산 정상에 도착한다.

 

철조망 앞에서 뒤돌아 바라본 경사지의 모습

 

태조산정상 오름길의 모습

 

태조산(太祖山 421m) 정상의 팔각정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유량동 안서동의 경계에 있는 산.

태조산 정상에서 천안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이며. 천안의 진산이라 안내하고 있다.

 

태조산정상 주변에는 팔각정과 정상석 그리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고 천안시내가 조망되었는데 운무로 인하여 희미하게 보였다. 태조산(太祖山, 해발422m)은 멀리에서 바라보면 둔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천안의 진산(鎭山)이다. 936년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군사를 주둔할 때 태조곁에 있었던 術師 예방(倪方)이 태조와 함께 이 산에 올라 천안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오룡쟁주의 형상이라고 태조에게 간했다는 산이다.고려태조가 오른산이라고 하여 태조산 또는 태조봉이라고 한다.

 

태조산에서 경사지을 내려서면 양쪽으로 철조망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좌측편에는 지식경제부가 우측편에는 교보생명이 자기구역 영역표시로 철조망을 쳐놓는 바람에 이곳응 찾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느낌이다.

 

365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전망이 좋은 조망지가 나오고  내려서면 아홉사리고개(九曲峙)에 도착한다. 고개는 유량동에서 목천면 삼방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 크게 아홉번 구비져 온다고 아홉사리고개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매우 큰길로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국수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라고 해서 아홉사리 고개라고 부렀단다.

 

아홉사리고개에서 오르면 송전철탑이 차례로 두개가 나오고 내려서면 유량동고개 동물이동통로에 도착하게된다. 유량동고개는 고려태조 왕건이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8만여명분의 군량을 쌓아두었던 곳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유량동이다.이곳에서 머물렀던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가 북상하여 올 줄 알았으나 북상하지 않고 경상도 선산(善山) 지방에 포진하므로 그곳에 내려가 격전을 벌린 끝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토의 재통일을 기하는 전진기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 유량동이다.

 

유량리고개에서 금북정맥 3구간 마루금을 마무리하고는 우측편 2번군도로 내려서면 산악회 본부가 나오고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고는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119 현위치 정상길 제7지점

 

태조산(太祖山 421m) 정상의 팔각정

 

태조산에서 바라본 천안시내의 모습

 

전망안내판과 천안12경 안내.

 

태조산 정상석에서 인증샷

 

태조산(太祖山, 해발422m)
멀리에서 바라보면 둔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천안의 진산(鎭山)이다.
936년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군사를 주둔할 때 태조곁에 있었던 術師 예방(倪方)이 태조와 함께 이 산에 올라 천안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오룡쟁주의 형상이라고 태조에게 간했다는 산이다.고려태조가 오른산이라고 하여 태조산 또는 태조봉이라고 한다.

 

태조산의 유래

고려 태조가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태조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유량동 북쪽의 후산(後山)으로 산 모양이 왕(王) 자 같다 하여 왕자산이라고 불렀다. 고려 태조 왕건이 술사 예방(倪方)의 말을 듣고 산에 올라와 지세를 살핀 후, 왕자산성을 쌓고 천안 도독부를 두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왕자산성(王字山成)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왕자산, 고을 동북쪽 12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곳에 머물러 두었을 때에 윤계방이 [이곳을]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라고 아뢰어 보루를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왕자성(王字城)의 이름을 내리었다. 왕자는 곧 그 산의 모양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현 지도에서는 왕자산의 명칭은 사라지고 태조산의 명칭만 남아 있다. 그래서 왕자산태조산이 다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 옛 명칭인 왕자산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태조산 정상 팔각정에서 바라본 천안시내의 모습

 

철조망 상이길 통과

태조산에서 내려서면 양쪽으로 철조망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좌측편에는 지식경제부가 우측편에는 교보생명이 자기구역 영역표시로 철조망을 쳐놓는 바람에 이곳응 찾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느낌이다.

 

등로길에 있는 이정산 태조산 0.4km, 취암산 5.4km

 

365봉의 모습

365봉 이정표에는 지명은 없고 포스트(POST)란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무슨 용어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냥 일반 이정표 처럼 지명을 적어 주어서면 하는 바램이다. 이정표 대로라면 현위치는 "제2포스트" 지점이며, 정맥길은 "제3포스트(아홉싸리고개)" 방면으로 직진한다. 

 

365봉 삼각점

 

교육원삼거리 갈림길 이정표 : 태조산600m, 교육원삼거리1,670m, 제3포스트1,230m

 

119 현위치 정상길 제4지점

 

전망 좋은곳

 

전망좋은곳 이정표 : 제2포스트 380m, 제3포스트 850m

 

전망좋은곳에서 바라본 천안시내의 모습

 

119 현위치 정상길 제5지점

 

전망좋은곳을 통과하여 진행하면서 뒤돌아본 모습

 

119 현위치 동우아파트길 제15지점

 

119 현위치 동우아파트길 제14지점

 

아홉사리고개(九曲峙)

유량동에서 목천면 삼방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 크게 아홉번 구비져 온다고 아홉사리고개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매우 큰길로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국수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라고 해서 아홉사리 고개라고 부렀단다.

 

아홉싸리고개 이정표 : 교육원1,000m, 제2포스트 1,200m

아홉사리고개(九曲峙)
유량동에서 목천면 삼방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 크게 아홉번 구비져 온다고 아홉사리고개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매우 큰길로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국수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

119 현위치 동우아파트길 제13지점

 

송전탑 좌측편에 두고 통과

 

119 현위치 동우아파트길 제12지점

 

두번째 송전탑 통과

 

119 현위치 동우아파트길 제11지점

 

유량동고개

고려태조 왕건이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8만여명분의 군량을 쌓아두었던 곳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유량동이다.이곳에서 머물렀던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가 북상하여 올 줄 알았으나 북상하지 않고 경상도 선산(善山) 지방에 포진하므로 그곳에 내려가 격전을 벌린 끝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토의 재통일을 기하는 전진기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 유량동이다.

 

유량리고개

고려 태조 때 군량을 쌓아두고 군사를 훈련한 곳이라고 하여 유량(留糧)골이라고 한 것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우랑리 고개, 웃량리고개 등으로도 불린다.

유량리고개에서 바라본 2번국도의 모습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유량리고개 2번 국도의 모습

 

유량리고개로 내려서는 등로길의 모습

 

유량리고개 동물이동통로 모습

 

유량리고개(235m)의 2번시군도와 동물이동통로 모습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지산리 64-3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덕전리 유량동을 연결하는 고개.
천안시 유량동과 천안시 목천읍 지산리를 잇는 고개로 "유량지하차도"가 있는 유량리고개이다.

유량동
고려태조 왕건이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8만여명분의 군량을 쌓아두었던 곳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유량동이다.이곳에서 머물렀던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가 북상하여 올 줄 알았으나 북상하지 않고 경상도 선산(善山) 지방에 포진하므로 그곳에 내려가 격전을 벌린 끝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토의 재통일을 기하는 전진기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 유량동이다

 

금북정맥 3구간 부수문이재에서 유량리고개까지 마루금 산행은 둘레길 처럼 편안한 등로길이었다 그러나 해빙기을 맞아 땅속에 얼어있는 얼름이 녹아 등로길을 진흙탕으로 만든 구간이 가끔이어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오늘도 금북정맥 마루금 한구간을 아무런 사고없이 무사히 마칠수 있게 도와주신 대원들에게 고마운 말씀 전하며 그북정맥 3구간을 마무리한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시과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는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 정신없이 꿈나라 여행을 떠난다. 얼마나 정신없이 잤는지 버스는 경부고속도로상에 있는 안성휴게소에 진입하고 있었다.

안성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소변을 보고는 다시 버스에 올라 대원들이 내리는 죽전, 복정을 거쳐 상일동 육교앞에 도착하여 산행의 마무리을 한다.

 

************************************************************************************************************

 

[부소령~위례산]

부소령은 지난구간에 이어 두번째 도착하고 베낭을 챙겨 주변을 살펴본다. 부소령(부수문이고개)는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와 북면 운용리을 잇는 57번 지방[2차선] 도로 고개 마루에 위치하고 있고, 부소령은 백제 첫 도읍지 하남 위례성 직산 백제시대(BC18 ~ 6 , 13 년)다.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을 하여 이곳에 문을 세웠다는 이유로 '부소'는  '솔(松)'이라는  뜻으로 소나무산 고개라고도 한다.백제때 이곳에 부소문을 달았다고 하여 소나무 고개의 뜻을 지녔다고 하며, 부수문이고개는 '扶蘇門嶺'이라 하고 백제시대에 이곳에 부소문을 세웠다고 해서 얻은 이름입니다.

 

부소령 이정표 뒤편으로 완만하게 올라서면 넓은 임도길 같은 등로길이 나오고 마치 둘레길을 걷는것 같은 느낌이다. 무명봉을 지나 내려서면 쉼터가 나오고 한차례 오르면 위례산성과 입장양대리 갈림길이 나온다.

안부 우측편으로 쉼터가 있는데 조망은 없었고 이지점에서 90도 방향을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524봉인 돌탑봉까지 오름길을 올라야 한다.

 

524봉에는 돌탑 2개와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조금더 진행하면 산의 정상부에 위례산성터의 흔적이 있으며 위례산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위례성이란 명칭에서 ‘위례’는 우리말의 ‘울타리’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다. 위례산은 직산 위례성, 검은 산, 신산(神山)으로도 불린다.

 

[위례산~성거산]

위례산 주변에는 위례산성터 흔적이 남아있고 정상석 앞으로 위례산성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위례산은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운용리 사이에 있는 산이며 높이는 523m이다. 직산위례성·검은산·신산(神山)이라고도 한다.차령산맥의 연봉을 이루며 북쪽 비탈면이 급경사를 이루어 천연 성벽 역할을 한다.산 정상의 위례성터에는 둘레 550m, 높이 약 3m의 흙으로 쌓은 산성을 비롯하여 식수로 사용한 듯한 우물 '용샘'과 문받침돌로 여겨지는 큰돌 반쪽이 남아 있다.

 

이 산성과 마주하여 안성의 서운산성이 남향으로 축조되어 있어 주목된다.일부 학자는 서운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쪽 끝 기지였고, 위례성은 백제 문주왕의 북쪽 끝 방어선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남쪽으로 오르는 계곡의 경관이 수려하고 산기슭에는 금성사라는 사찰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주변에 독립기념관, 유관순열사 유적지, 천안상록리조트 등의 관광지가 있다.

 

위례산정상부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산성 터가 나오고 조금더 진행하면 쉼터가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지점에서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장생이와 군단이마을이 나오고, 군단이 삼거리에서 약7여분 완만하게 진행하면 490봉에 도착한다. 490봉에서 급경사지을 내려서면 90도 방향으로 좌측편으로 전환하여 진행하다 보면 우측편으로 묘지 두개가 나오고 조금더 진행하면 임도에 도착한다.

 

임도길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성황당고개가 나오고 우측능선으로 오르면 송전철탑 두개가 나온다. 송전철탑에서 내려서면 우물목고개에 도착하고. 우물목고개는 북쪽의 입장면 시장리 호당리와 남쪽의 북면 납안리를 연결하는 도로의 정상부에서 성거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군사용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방향이다.

 

우물목고개에서 포장도로로 진행하다보면 우측편으로 헬기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사리목고개다. 고개의 모양이 새끼를 사리어 놓은 모양이기 때문에 사리목 고개라고 하며 사리목의 ‘목’은 항(項)을 뜻하는 것으로서 고개가 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리목고개에서 진행하면 천주교 대전 교구 성거산 성지 안내판이 나오고, 체육시설, 천주교대전교구 성거산성지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도로 따라 진행하면 성거산 둘레길 우회등로가 나오고 굽누대 직진방향 버리고 좌측방향 우회등로로 진행하면 공군부대 레이더기지가 가깝게 보이고 무명봉을 넘어 천흥리 갈림길을  진행하면 성거산 제2봉에 도착한다.

 

성거산 정상석은 원래 해발 579m인 우측편 산 위에 세워져야 하지만,군부대 때문에 부득이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557봉의 정상도 이곳이 아니라 바로 뒤쪽에 약간 높은 곳에 삼각점과 함께 있다. 정상 확인한다고 하다가 알바하기 좋은 곳입니다. 정맥은 정상 너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상석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떨어져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거산~태조산]

성거산 정상부는 공군부대에 정상을 빼앗기고 엉뚱한 곳에 있는 성거산 정상석 성거산 제2봉(聖居山 556m) 정상석 성거산 제1봉(579m)은 통제지역으로 오를 수 없고, 제1봉을 우회하여 제2봉(556m)에 올랐다.

정맥길은 성거산 표지석 뒷쪽으로 만일고개까지 가파른 내림길이다. 정상석에서 30m 거리에 삼각점이 있으며 조망이 좋은 위치로 금북정맥의 마루금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삼각점과 전망바위에서 조망을 하고는 복귀하여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경사지가 나오고 해빙기라 땅속의 얼음이 녹아 진흙탕이 되어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바로 아래 공터에서 후미그룹이 점심식사을 하고 있어 함께 간단하게 식사을 마치고는 경사지을 내려 만일고개에 도착한다.

 

만일고개라는 이름은 바로 아래에 만일사와 만일리 라는 마을이 있어 불리어진것 같은  생각이다. 만일고개(晩日嶺)는 '매일골고개'라고도 불리어 지며 송전리 매일골에서 금북정맥을 넘어 천흥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이 고개를 넘자면 해가 꼴깍 넘어 가서 만일고개라고 불렀든가,매일고개란 말이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만일고개로 변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만일고개을 통과하고 부터는 등로길이 편안하여 마치 둘레길을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소나무들이 많이 살림욕하기에 좋을것 같았다.  성거산과 걸미고개 사이 국민은행 연수원방면 무명봉이 영인지맥으로 이어지는 등로길이다. 마루금은 이지점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한다.

 

연인지맥에서 내려서면 걸마고개 가 나오고, 걸마고개는 예전에 칡이 많이 나서 '갈(칡葛)뫼'가  갈마고개로 변음이 되었다고 한다. 걸마고개에서 올라서면 경사지가 나오고 등로길이 미끄러워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요즘 해빙기라서 그런지 진흙탕이라 등로길을 비껴 진행한다. 372봉은 등로길 우측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목이 무성한 조림지을 지나 오르면 상명대학교 갈림길이 나오고 태조산방면으로 진행하여 내려서면 유황골에 도착한다.

 

유황골고개는 천안시 목천읍 덕진리 자연부락으로 이곳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유왕골이 나오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오늘 산행 날머리인 각원사가 나온다. 유왕골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천하를 살피고 머무른 마을이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입구에는  유왕골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유왕골도 왕건(王)이 머물렀던(留) 골짜기란 뜻이다. 유왕골 고개엔 정자가 있어 지역 등산객들이 많이 쉬고 있다. 이정표엔 "좌측 약수터/우측 좌불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유황골에서 올라 내려서면 다시 각원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나오고 완만하게 오르 내림을 하면 구름다리 갈림길에 도착한다. 갈림길 주변에는 체육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휴식을 할수 있도록 정자와 의자들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구름다리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도라지고개에 도착한다. 도라지고개는 천안시 동남구 유량동 과 목천읍 덕전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며, 도라지고개가 험하여 올라가다가 쉬게 되면 금세 졸음이 오는 고개라 하여 조라지 고개라고 하였고, 이것이 도라지 고개로 변했다. 해발 고도는 약 300m이며 좌표는 북위 36도 49분, 동경 127도 12분으로 태조산[422m]의 북쪽 능선 약 500m 전방에 위치해 있다. 도라지 고개의 북쪽 능선에는 유왕골 고개가 위치해 있다.

 

도라지고개에서 직진으로 완만하게 진행하면 청소년수련원 갈림길이 나오고  청소년수련원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진행하면 119 현위치 정상길 제5, 6지점 두개가 나오고 좌측방향으로 오름길을 오르면 철책으로 만든 철조망이 나온다. 뚤려있는 철문을 통과하여 한차례 밀어올리면 태조봉인 태조산 정상에 도착한다.

 

[태조산~유량고개]

 

태조산정상 주변에는 팔각정과 정상석 그리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고 천안시내가 조망되었는데 운무로 인하여 희미하게 보였다. 태조산(太祖山, 해발422m)은 멀리에서 바라보면 둔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천안의 진산(鎭山)이다. 936년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군사를 주둔할 때 태조곁에 있었던 術師 예방(倪方)이 태조와 함께 이 산에 올라 천안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오룡쟁주의 형상이라고 태조에게 간했다는 산이다.고려태조가 오른산이라고 하여 태조산 또는 태조봉이라고 한다.

 

태조산에서 경사지을 내려서면 양쪽으로 철조망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좌측편에는 지식경제부가 우측편에는 교보생명이 자기구역 영역표시로 철조망을 쳐놓는 바람에 이곳응 찾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느낌이다.

 

365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전망이 좋은 조망지가 나오고  내려서면 아홉사리고개(九曲峙)에 도착한다. 고개는 유량동에서 목천면 삼방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 크게 아홉번 구비져 온다고 아홉사리고개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매우 큰길로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국수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라고 해서 아홉사리 고개라고 부렀단다.

 

아홉사리고개에서 오르면 송전철탑이 차례로 두개가 나오고 내려서면 유량동고개 동물이동통로에 도착하게된다. 유량동고개는 고려태조 왕건이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8만여명분의 군량을 쌓아두었던 곳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유량동이다.이곳에서 머물렀던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가 북상하여 올 줄 알았으나 북상하지 않고 경상도 선산(善山) 지방에 포진하므로 그곳에 내려가 격전을 벌린 끝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토의 재통일을 기하는 전진기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 유량동이다.

 

유량리고개에서 금북정맥 3구간 마루금을 마무리하고는 우측편 2번군도로 내려서면 산악회 본부가 나오고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고는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