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4. 09:05ㆍ★ 9 정맥/- 7. 금남(완료)
금남정맥 마지막구간 가자티고개에서 부여구드래나루터까지
산 행 지 : 공주시 탄천면, 부여군 부여읍일대, 금성산(121m), 부소산(105m)금남정맥 12구간
산행일시 : 2013년 8월 17일(토요 당일산행)
산행코스 : 가자티고개-됨봉(160봉)-155봉-파평윤씨묘-신앙고개-감투봉 팔각정 갈림 삼거리-송전탑-산성
터-청마산 갈림삼거리-청마산 정상(233봉)-청마산 갈림 삼거리-LPG 2.3 Km 이정표-무인산불
감시탑-벌목지대-청마산성-청마고개-왕릉 1.0 Km 이정표-부여사비나성 장대비-석목리 갈림
삼거리-표고 버섯 단지-가나다 SK LPG 주유소-4번 지방도로-야외 표고버섯 단지-무인 삼불 감
시탑-금성산(121봉) 통수대-금성산 삼림공원 종합 안내도-무노정-동물이동통로(계백문)-부여
군민헌장-시비-국궁장-부여읍내-부여여고-영일루-군장지-부소산성 안내판-수혈주거지-반월
루-사자루-낙화암 천년송-낙화암-백화정-낙화암 전망대-고란사-고란사 극락보전-고란사 약수
터- 사자루사거리(원점회귀)-구드래나루터-주차장-산행종료
산행시간 : 10:03~16:23 (6시간20분, 식사 및 휴식, 고란사, 낙화암 관람)
산행거리 : 약18.2 Km(정맥15.2 Km, 접속구간3 Km), GPS 20.8Km
산행날씨 : 맑음
산행인원 : 80명산행코스 및 구간거리 : 가자티고개-2km/50분-신안고개-4.6km/1시간40분-청마산-2.3km/50분-청마고개/
오산고개-2.2km/40분-4번국도/석목고개-1.4km/30분-금성산-1.5km/30분-부여여
고-1.2km/30분-부소산-0.8km/10고란사-2.2km/40분-구드래나루터
구간 |
거리(km) |
출발시간 |
소요시간 |
비고 |
가자티고개 |
- |
10:03 |
- |
해발123m, 2차선 공주 국도(가척리-남산리), 금남정맥 안내판, 낙석방지망 |
신앙고개 |
2 |
11:14 |
1시간11분 |
해발130m, 부여군 초촌면 신답골과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 와촌을 넘는 고개 |
청마산 |
4.6 |
12:37 |
1시간23분 |
해발233m, 면계능선 갈림길, 정상표지기, 조망 좋음 |
청마고개 |
2.3 |
13:15 |
38분 |
오산고개, 시멘트도로, 부여읍 용정리와 능산리를 넘는 고개 |
석목고개 |
2.2 |
13:58 |
43분 |
4번국도, 가나다LPG주유소, 정류장, 횡단보도 횡단 |
금성산 |
1.4 |
14:30 |
32분 |
해발121m, 통수대정자(2층 누각 설치), 정상 표지기 |
부여여고 |
1.5 |
15:05 |
35분 |
부여여고 경내 운동장 통과 후 팔각 우물터 지나 우측방향 능선으로 진행 |
부소산 |
1.2 |
15:50 |
45분 |
해발106m, 사자루정자(부소산정상) |
고란사 |
0.8 |
16:00 |
10분 |
부여군 부여읍(扶餘邑) 부소산(扶蘇山)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 |
구드래나루터 |
2.2 |
16:23 |
23분 |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
도상거리 |
15.2 |
|
6시간20분 |
금남정맥 마루금(주화산~부여 부소산, 구드래나루터) 도상거리 128km 완주 |
접속거리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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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거리 |
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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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PS거리 |
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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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정맥(錦南正脈)
금남정맥을 이루는 주요 산은 주화산을 시작으로 연석산(925m), 운장산(1,125.9m), 인대산(666m), 대둔산(877.7m), 월성봉(650m), 바랑산(555m), 천마산(287m), 계룡산(845m), 부소산(106m) 등이다.
금강의 남쪽 울타리를 이루는 산줄기로 금남호남정맥이 호남정맥과 분기하는 조약봉에서 북쪽으로 머리를 튼다. 이후 운장산, 대둔산, 계룡산을 지나 부여 낙화암으로 떨어지는 도상거리 128km의 산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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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정맥 12구간 산행지도
금남정맥 12구간 고도표
금남정맥 마지막구간 지도(산악회 제공)
금남12구간(가자티고개-청마산-금성산-구드래나루터)고도표
금남정맥12구간(가자티고개-청마산-금성산-구드래나루터)트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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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정맥 마루금 완주하는날!
금남정맥 마루금은 금강의 남쪽 울타리에 위치하여 있으며. 출발지점은 금남호남정맥의 끝지점인 주화산(珠華山 560m)에서 시작하여 연석산(925m), 운장산(1,125.9m), 인대산(666m), 대둔산(877.7m), 월성봉(650m), 바랑산(555m), 천마산(287m)이 북쪽방향으로 금강과 나란히 올라가서 계룡산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틀어 부여의 부소산 아래 백마강 낙화암 조룡대까지이어진다. 도상거리가 128km이며, 부여 부소산정상에서 마루금은 종료되지만 송백산악회는 부여 구드래나루터에서 마루금이 종료된다.
금남정맥은 남쪽으로 금강이 지나고 서쪽으로 만항강, 동진강의 분수령이 되어 자연히 군산을 중심으로 한 평야지방과 내륙지방을 양분하고 있으며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은 "산자분수령"의 대원칙과는 다소 동떨어진 형태을 취하고 있다. 이는 옛 백제의 고도인 부여를 포함하기 위함이며. 또는 정감록에서 지칭한 새로운 수도인 계룡산을 포함하기 위함이라는 해석을 낳기도 한다.
이번에 지나온 금남정맥은 금강하구가 아닌 이곳 부여 구드래나루에서 맥을 다하다 보니 완전한 금강 남쪽의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금강 남쪽의 울타리가 되는 산줄기는 장군봉 지나 작은싸리재 직전에 만나는 (진안군 주천면과 완주군 동상면, 운주면 삼면봉인) 750봉에서 서쪽 왕사봉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름없는 야산을 꿰차며 논산천의 물길까지 모아 명실공히 금강의 아래쪽 울타리가 되어 금강하구인 군산의 장계산에서 바다로 스며드는 산줄기이다 보니 정맥의 이름에 대한 논란이 되고 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에 따라 이 산줄기를 '금강정맥', '실질적 금남정맥' 등으로, 금남정맥을 '금강기맥'으로 새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하지만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은 그대로 두고 금강하구로 향하는 산줄기를 '대동(여지도) 금남정맥'으로 부르는 것이 신산경표에서는 진정한 금강의 남쪽 울타리로 금강하구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금강정맥'으로 이름을 붙이기도 하며 지금 진행한 마루금은 산경표상과 동떨어지지만 부여 구드래나루터에서 마감한다.
8월 무더운 날씨을 피해 주말마다 계곡에 빠져 살다보니 체력이 저하되고 금남정맥 마루금 마지막구간 이어갈 체력이 될지가 걱정이다. 베낭을 챙겨 상일동 집결지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하신 대원들이 반겨주시고 곧이어 회장님께서 오신다. 회장님께 지난구간 배려해주심에 감사의 인사을 나누고는 오늘은 후미에서 진행하겠다고 하니 마침 후미대장님이 갑자기 못나오신다며 그럼 오늘 후미대장 하면서 표지기도 수거해 주길 원해 지난구간의 고마움으로 인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오늘만 후미대장으로 진행한다.
잠시후 버스는 도착하고 중부고속도로을 거쳐 외곽순환도로상 복정역부근에서 대원을 태우고는 경부고속도로 망향휴게소에서 아침식사을 하고는 다시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을 거쳐 남공주톨게이터을 나오 40번 지방국도을 달려 지난구간에 하산했던 가자티고개에 도착한다.
가자티고개에 내려 금남정맥 마지막구간 단체 사진을 찍고는 지난 구간 날머리지점 도로 건너편 금남정맥 안내판과 낙석방지철망옆으로 올라 금남정맥 마루금 마지막구간 산행이 시작된다.
금남정맥 마지막구간 기념사진
금남호남정맥 끝나는지점인 주화산에서 시작하여 연석산(925m), 운장산(1,125.9m), 인대산(666m), 대둔산(877.7m), 월성봉(650m), 바랑산(555m), 천마산(287m), 계룡산(845m), 부소산(106m)을 지나 부여 낙화암으로 떨어지는 도상거리 128km의 산줄기다. 부여 부소산에서 금남정맥 완주 사진 촬영을 하여야 하나 시간 관계상 마지막구간 들머리지점인 가자티고개에서 기념 촬영을 한다.
가자티고개(해발123m)
위치 : 충남공주시 탄천면 남산리 566-1
가자티고개는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와 남산리를 연결하는 2차선 고개마루에 있고, 남산(南山) 아래에 있어 남산골이라고도 불리어지는곳이다 지방도 799번이 남.북으로 뻗어있어 남쪽으로는 부여군 조촌면과 북쪽으로는 덕지리로 연결되는 고개이며, 여기서부터 한동안 계속됐던 공주시와 이별을 하고 부여군으로 접어든다.
가자티재 들머리지점
지난구간 하산지점에서 2차선 도로 맞은편에 있는 낙석방지 철조망 옆으로 이용하여 완만하게 올라서면 가시넝쿨밭과 잡목들로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완만하게 약10여분 오르면 됨봉갈림길에 도착한다.
됨봉은 마루금에서 약간 우측편으로 비껴 있지는 거리가 얼마되지 않아 왕복하고는 좌측편으로 내려선다.
됨봉갈림길에서 내려섰다가 오르면 187m 개활지가 나오고 이지점에서 우측방향 숲으로 들어서면 직진방향으로 진행하지 말고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희미하게 등로가 나온다. 무명봉을 넘어 내려서면 연달아 3기의 묘지가 나오고, 완만하게 오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이지점에서 우측방향 버리고 좌측으로 방향전환하여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벌목지가 조망되고 신앙고개에 도착하게 된다.
금남정맥 안내판
가자티고개 들머리지점 앞에 설치되어 있는 마루금 등산 안내도
됨봉(해발160m)
가자티고개에서 완만하게 약10여분정도 오르면 됨봉 갈림길이 나오고 마루금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되지만 우측방향 약10m 거리에 있는 됨봉을 찍고는 다시 원점회귀하여 신앙고개로 내려선다.
됨봉정상에 있는 또 다른 표지기의 모습
됨봉정상에는 정상석은 없고 잡목이 많은곳에 표지기 두개가 설치되어 있고 조망은 없었다.
됨봉(해발160m)에서 인증샷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로 이 봉우리 아래에 있는 홍성골 마을이 뒤웅박(됨박)처럼 생겼다하여 이 고장 사람들은 됨봉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이해가 않는다.
됨봉 갈림길의 모습
가자티고개에서 오르면 삼거리가 나오고 우측방향은 됨봉으로 가는 등로길이며 마루금은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됨봉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왕복으로 다녀와 내려선다.
길주의>됨봉갈림길에서 내려섰다가 오르면 187m 개활지가 나오고 이지점에서 우측방향 숲으로 들어서면 직진방향으로 진행하지 말고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희미하게 등로가 나온다. 이지점에서 선두조는 직진으로 내려가 알바을 한 지점이다.
묘지지역 통과(직진)
묘지지역 통과(좌틀)
무명봉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갈림길 통과
우측방향 버리고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벌목지가 나오고 신앙고개에 도착한다.
완만한 등로길의 모습
묘지가 보이는 지점에서 우측방향으로 전환하여 진행
벌목지대 조망
신앙고개 통과
지도상에 나와 있는 신앙고개이며, 부여군 초촌면 세탑리 신탑골과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 돌정이 마을을 넘나들 수 있는 고개로 역할을 하지만 사람의 흔적이 없고 등로길이 희미하였다.
187봉 개활지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첫번째 안부가 나오는데 이곳이 신앙고개이며, 좌측방향(남쪽)이 신탑골방면이고 우측방향(북쪽)이 돌정이(와촌)로 이어지는 등로길이다.
신앙고개를 통과 후 완만하게 능선을 진행하면 좌측편으로 공동묘지가 나오고 묘지 정상부에는 천주교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190봉을 넘어 내려서면 넓은공터가 나오고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임도길이 나온다. 이곳을 일명 신 신앙고개로 칭하고 직진으로 올라서면 감투봉 삼거리가 나오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182봉에 도착하게 된다.
182봉에서 벌목지대을 내려서면 안부가 나오고 직진으로 통과하면 완만한 등로길이 이어지고 잠시후 송전탑이 있는곳을 통과하게 된다. 송전철탑을 지나 완만하게 오르면 성터의 흔적이 있는곳을 지나게 되며 지도상에 없는 조석산에 도착한다.
조석산에서 무명봉 몇개을 넘어서면 청마산 갈림길 안부에 도착하고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되지만 좌측방향에 있는 청마산을 왕복하고는 청마고개로 진행한다.
청마산 갈림길에서 내려서면 완만한 등로길로 진행하다 보면 양옆으로 참나무 같은 나무숲을 지나 급경사지을 한차례 오르면 능선 안부에 무인산불감시탑이 나오고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밤나무단지옆을 지나게 된다.
청마산성 흔적이 있는곳을 통과하니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고 돌계단을 따라 내려서니 청마고개 또는 오산고개에 도착된다.
청마고개에서 직진으로 올라 진행하니 부여사비내성 장대지에 도착하고 우측방향으로 편안하게 진행하니
진주강씨묘지ㅏ 나온다. 묘지에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표고버섯 재배 하우스가 나오고 조금 진행하면 4번국도 석목고개에 도착한다 이곳 민가에서 물을 공급할수 있다.
등로길에 있는 금남정맥 이정표
편안한 등로길의 모습
천주공원묘지통과
신앙고개를 통과 후 완만하게 능선을 진행하면 좌측편으로 공동묘지가 나오고 묘지 정상부에 천주교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어 천주교공원묘지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무명봉 좌측방향으로 통과
천주교 공원묘지 뒤편에 있는 무명봉 좌측방향으로 내려섰다가 오르면 190봉이 나오고 완만하게 진행하면 조망이 터이는 넓은 공터가 나온다.
190봉 통과
무명묘지 통과
넓은공터 통과
190봉에서 내려서면 넓은공터가 나오고 직진으로 내려 좌측방향으로 진행해도 무방하지만 공터에서 바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신신앙고개에 도착한다.
넓은공터에서 좌측방향으로 통과하면 나오는 등로길의 모습
임도길(일명 : 신 신앙고개) 통과
좌측방향(남쪽)은 부여군 조촌면 신암리로 연결되고, 우측방향(북쪽)은 부여읍 상금리 배밭골로 연결되는 임도이다. 됨봉 갈림길에서 내려서면 신앙고개는 죽은 고개이나 이곳에 있는 임도는 차량이 통과할수 있는 임도길이다.
임도길에서 올라서면 푹파진곳이 나오고 직진으로 진행하면 감투봉갈림길에 도착한다.
감투봉 갈림길의 모습
금남정맥 이정표는 보이지 않고 마루금에 필요하지 않은 이정표만 설치되어 있어 맥을 이어가는 산객의 마음이 허전할 따름이다. 이지점에 청마산00km, 금성산00km, 됨봉00km 표시해 주어서면 하는 바램이다.
감투봉 갈림길 이정표 : 감투봉 팔각정 2.01km, 수자원공사4.02km
165봉에서 바라본 마루금의 모습
앞으로 이어갈 마루금을 바라보며 진행한다.
182봉에서 조망
안부의 모습
182봉 벌목지에서 내려서면 만나는 안부 직진으로 통과한다.
안부의 이정표 : 감투봉팔각정3.05km, 신암리회관 4.09km
감투봉은 부여군 조촌면 신암리에 위치하고 있는 낮은 산인데 정자가 있는 것 같다.마루금을 이어가는 산객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정표
182봉과 184.9봉 사이의 안부을 통과하면 완만한 능선에 도착하고 완만하게 진행하면 송전철탑 좌측편으로 진행하여 오르면 산성터에 올라선다.
송전철탑 통과
부여논산13번 송전철탑 좌측편으로 통과
성터 흔적이 있는곳 통과
산성의 흔적 정상부의 모습
성터에서 바라본 조망
성터 정상부에서 지나온 마루금을 바라본 모습
조석산(해발184.9m)정상부의 모습
조석산정상부는 넓은 공터로 이루어져 있어고 정상석은 없지만 나무에 표지기가 알려주고 있었고 지도상에는 없는 산이다.
조석산(해발184.9m) 표지기의 모습
조석산은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산이며 소나무에 이정표 가 붙혀있고, 정상부는 특별한 특징과 조망이 없었다. 이곳에서 좌측방향으로 방향전환하여 내려서면 마루금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20m 아래에 삼각점이 있다는 선답자의 후기글을 보았는데 찾지못하고 지나친다.
조석산(해발184.9봉)아래에 있는 삼각점
조석산에서 20m 아래에 있는 삼각점의 모습
조석산정상부 이정표 : 용정리 2.3km, 송곡리, 백제금동대향로
청마산 삼거리 안부
청마산 정상부는 마루금에서 약50m 비껴있지만 좌측방향으로 다녀오고, 오산고개(청마고개)로 내려선다.
청마산삼거리 이정표 : 용정리2.9km 굿뜨레, 수자원공사1.0km, LPG 4.3km
LPG로 표기된 부분에 4번국도 또는 청마고개로 표시되었다면 마루금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것 같았다.
청마산정상부의 모습
청마산 정상 (해발233.0m)
청마산정상부는 서래야 박건식님의 표지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망도 좋았다.
청마산정상부에 또 다른 표지기의 모습
청마산정상부에서 조망
청마산정상부에서 바라본부여군 부여읍 전경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마산정상부에서 인증샷
청마산 삼거리 통과
청마산에서 복귀하여 직진으로 내려선다.
183봉 통과
청마산 갈림길에서 내려서면 완만한 등로길로 진행하다 보면 양옆으로 참나무 같은 나무숲을 지나 급경사지을 한차례 오르면 능선 안부에 무인산불감시탑이 나오고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밤나무단지옆을 지나게 된다.
4번 국도가 지나가는 부여터널의 모습
현위치번호 : 청마산성01-04
좌측으로 부여군 능산리의 "국제도덕협회일관도" 주변이 조망된다.
부여 청마산성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는 모습
부여 청마산성(扶餘 靑馬山城)
지정별 : 사적 제345호
소재지 :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1외
이 성은 118미터 되는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백제시대 최대의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6.5킬로미터이며 높이는 4~5미터 가량 된다.
성을 쌓은 방법은 흙과 돌을 함께 쓴 토석 혼축식이며, 형태는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이다.
포곡식 산성은 내부에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넓은 공간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어 많은 인원이 장기간 머물러 살기에 좋다.
청마산성은 유사시 시비도성 내에 있는 군'관'민이 모두 함께 도피할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 안에는 군창으로 추정되는 큰 건물터가 3곳이 있으며, 각시우물이라 불려지고 있는 우물터와 경룡사라는 절터가 남아 있다.
청마산성(靑馬山城)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때의 산성으로 사적 제34호이다.
부여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5㎞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능산리와 용정리에 걸쳐 있는 월명산(月明山)에 축조된 포곡형의 토석혼축산성으로 우리나라 고대 성곽중에 최대 규모이다.
둘레는 6.5㎞에 달하고 있는데, 하나의 골짜기를 성 안에 두고 동쪽과 서쪽의 2개 구릉을 감싸듯이 축조되어 있다. 내부의 흙을 파서 축조했으므로 안쪽으로 자연적인 호를 이루게 되었다. 북쪽 성벽에는 석축상태가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나머지 대부분의 구간은 거의 무너진 상태이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데, 현재 서쪽 부분에서 확인되는 성벽의 높이는 4~5m, 너비는 3~4m에 이른다. 성 안에는 망대·우물터·건물터를 비롯해 경용사지(驚龍寺址)·의열사지(義烈寺址) 등의 절터도 있다.
서쪽에는 수구(水口)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성벽이 무너져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산성의 기능은 수도인 사비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성 남쪽에는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청마고개로 내려서는 돌계단의 모습
청마산성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는곳에서 내려서면 돌계단이 나오고 돌계단을 내려서면 청마고개 또는 오산고개에 도착한다.
청마고개(오산고개)
충남 부여읍 용정리와 능산리를 넘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청마고개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채마소 고개로 더 알려져 있다.청마고개는 우측방향(북쪽)에 부여읍 용정리로 가는 방면이고 좌측방향(남쪽) 부여읍 능산리방면의 시멘트 임도길이다. 부여읍 용정리 주변에 농지와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고 식수을 구할수 있다.도로명은 청마로이고, 오산고개라고도 불리어 진다.
오산고개에서 왼쪽방향으로 내려가면 백제의 왕과 왕족들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이 있다. 이 고분군을 백제 왕릉원이라고도 부르는데 발굴 당시에는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한다. 이곳 능산리는 무덤사이의 사지(寺地)에서 발견되었다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유명하다. 맨 꼭대기는 봉황 한마리가 꽁지를 들어 올리고 앉아있고 타오르는 불꽃 하나하나마다 악기를든 신이나 코끼리를 탄 사람, 말을 탄 사람, 새, 학, 원숭이 등을 조각하고 향로의 바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용 모양이라는 높이 64cm, 무게 11.8kg 백제금동대향로는 불을 담는 그릇이다.
백제금동대향백제금동대향로 본체를 두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
본체를
두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백제금동대향로 받침, 용이 꿈틀거리며 향로를 받치고 있는 모습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
1993년 12월 23일 부여군 능산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국보 287호로 지정되었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의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공예품의 진수라 할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2.5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잇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뉘,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고, 그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가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각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다섯 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청마고개에서 바라본 부여읍 능산리방면의 모습
청마고개에서 바라본 부여읍 능산리방면의 모습
청마고개 이정표 : 좌)금성산, 우)수자원공사
청마고개에서 4번국도 방면의 등로길
현위치 번호 : 청마산성01-02
편안한 등로길의 모습
부여사비나성 장대지의 모습
부여사비나성 장대지(將臺址)로 주변에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것 같았다.
나성(羅城)이란 2중으로 구성된 성곽에서 왕궁을 둘러싼 성곽을 왕성 또는 내성으로 부르는데 대하여 바깥으로 둘러싼 성곽을 말한다. 또한 장수가 지휘하던 장소를 장대(將臺)라고 하는 백제의 사비성에는 나성이 존재하였다는 뜻이고 그 흔적이 지금 이곳이다.
장대지 왕릉갈림길 쉼터 이정표 : 수자원공사4.4km, 왕릉1.0km, 금남정맥 LPG 0.9km
부여 나성발굴조사 안내판의 모습
부여 능산리 고분군(扶餘 陵山里 古墳群)
지정별 : 사적14호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부여사비나성 장대지 이정표 : 통수대 2.2km, 성화대 2.7km, 백제왕릉원 1.0km 사비길(금성산, 왕포천)
부여사비나성 장대지 쉼터의 모습
백제왕릉원은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500m, 부여읍 능산고분군에 위치하고 있고, 사비길을 따라 성화대 방면으로 진행한다.
부여사비나성 장대지에 설치되어 있는 부여청마산성 안내판의 모습
현위치 번호 01-01
완만한 내림길의 모습
이정표 : 수자원공사 4.3km,석목리 LGP 0.4km
삼거리 인데 좌측으로 약간 방향전환한다.
이정표 : 사비길(왕포천), 사비길(금성산)
진주 강씨의 묘지 통과
표고버섯 재배단지하우스
진주강씨묘지에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표고버섯 재배 하우스가 나오고 조금 진행하면 민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물을 공급할수 있다.
표고버섯 재배단지 모습
석목고개(성왕로)
지도상에는 "SK주유소"라 되어 적혀있지만 4번국도 도로편에는 가나다 SK LPG 충전소"라는 현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루금은 이곳에서 좌측편에 있는 횡단보도을 건너 우측편으로 10m 진행후 좌측 계단으로 올라서면 금성산으로 이어진다.
석목고개에서 바라본 부여방향의 4번국도의 모습
정면으로 보이는 주유소가 SK가나다LPG 충전소이며 4번국도 건너편에 정류소가 있었다.
석목고개에서 바라본 논산방향의 4번국도의 모습
SK가나다 충전소에서 4번국도을 횡단하여 맞은편으로 오르니 안부에 쉼터가 나오고 금성산까지는 편안한 등로가 이어진다. 금성산정상의 높이가 상일동 일자산보다 낮은 해발121.2m 있다. 이것도 산이라고 말할수 있는지 해발300m이상이 되어야 산이란 칭할수 있을것 같은데...
금성산 통수대에 올라 부여시가지을 조망하고는 성화대방향으로 진행 무로정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후 또 다시 갈림길이 나오는 지점에서 우측11시방향으로 내려서면 계백문위 동물이동통로을 통과하여 국궁장 중앙을 관통하여 능선안부에서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부여 새로남교회가 나온다.
새로남교회에서 우측편으로 내려서면 직진으로 도로을 횡단하고 100여미터 진행하면 막다른 도로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부여도서관이 나오고 조금더 진행하면 좌측편으로 부여여고 정문이 나온다.
부여여고 정문으로 들어가니 방학기간이라 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조용하였다. 운동장을 지나 계단을 올라 학교뒤편으로 진행하니 백제 왕궁에서 이용 하였다는 우물이이 나오고 팔각정(우물) 뒤편 능선으로 오르면 부소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온다.
금성산방면의 들머리지점
4번국도(석목고개)을 횡단보도을 이용하여 횡단후 우측편으로 약30m 진행하면 금성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좌측편에 설치되어 있다.
석목고개 이정표 :능산리 고분군 1.0km, 동문로타리 0.6km, 청마산성 등산로 입구 4.0km
석목고개 이정표 : 사비길(왕릉), 백제왕릉원2.5km, 사비길(금성산), 통수대1.5km, 정림사지2.5km
석목고개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석목고개는 부여읍 석목리와 능산리를 잇는 4번 국도가 금남정맥의 주 능선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도로는 왕복4차선 아스팔트포장도로이고 가나다 SK가스충전소와 버스정류장이 있다. 차량이 꽤나 다니는 도로를
용감하게 무단으로 횡단하여 편안한 산책길로 금성산을 향한다.
석목고개 쉼터
이정표 : 사비길(왕릉) / 사비길(정림사지)
석목고개에서 계단으로 올라서면 쉼터가 나오고, 넓은 등로길을 올라서면 금성산 정상부에 도착한다.
갈림길 우측편으로 통과
갈림길 우측편으로 통과
이정표가 있는 우측방향 " 정림사지" 방면으로 진행
정림사지 가림길 이정표 : 좌측편 사비길(왕릉), 우측편 사비길(정림사지)
이정표 :사비길(왕릉,정림사지), 백제왕릉원 2.2km, 통수대 1.1km, 정림사지 2.0km
안부통과
금성산방향은 안부에 내려 직진으로 오르면 쉼터가 나오고, 계단을 올라서면 금성산정상부에 도착한다.
가탑리와 쌍북리를 연결하는 임도길이다.
안부사거리 임도 이정표 : 청마산성 3.5km(LPG충전소0.5km), 가탑리 0.5km, 쌍북리(왕궁아파트) 0.3km,금성산(조왕사) 0.9km, 통수대0.7km,
금성산 오름길의 쉼터
금성산정상부로 이어지는 계단의 모습
안부에서 올라서면 편안한 등로길이 펼쳐지고 잠시 후 쉼터가 나온다. 쉼터에서 물한모금 마시고는 계단을 올라 금성산 통수대 정자에 올라 부여시가지을 조망.
금성산 통수대(錦城山 統帥臺, 해발121.2m)
금성산 통수대는 해발 121.2m 밖에 되지 않지만 백제의 삼산(三山) 가운데 하나이며, <삼국유사> 남부여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중에는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일산(日山)과 오산(吳山), 부산(浮山)이다라고 적혀있다.
백제국 전성기에는 이들 삼산 위에 신선이 살며 서로 날아 왕래함이 아침저녁으로 끊임이 없었다고 한다.
삼산 중에 일산(日山)은 부여 시가지의 동편에 있으며, 지금의 금성산(錦城山)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산(吳山)은 현재의 오석산, 부산(浮山)은 백강 마을 뒷산을 말한다. 이들 삼산(三山)은 금성산을 중앙에 놓고 서쪽에 부산과 동쪽에 오산이 3㎞씩의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삼산의 중앙 금성산은 백제 전역의 각 산성에 송수신을 담당하는 통수대(統帥臺)를 세워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발생했을 때 군사 행동의 지시와 통제 및 총괄적 연락의 시작점이 되거나 종착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 통수대가 눈앞에 있다. 통수대는 말 그대로 장군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금성산정상부에 설치되어 있는 부여 금성산성 안내판의 모습
통수대 정자위에 있는 현판의 모습
금성산(錦城山,해발121m) 표지기의 모습
통수대 좌측편 나무에 서래야 박건식님께서 정상을 알리는 표지기을 붙혀 놓았다.
금성산정상에 있는 통수대 누각의 모습
금성산 통수대에서 내려서면 갈림길이 나오고 이지점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 했지만 얼마 후 잘못된 등로길임을 알게됨. 이지점에서 직진으로 진행하여 성화대방향으로 진행하면 단축코스이다.
금성산에서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오고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쉼터가 나온다. 쉼터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성화대 삼거리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한다. 우측편으로 진행하면 금성산 정상부로 이어진다.
성화대 삼거리 이정표 : 통수대0.3km, 조왕사0.3km, 무노정0.1km, 성화대0.2km, 바비길(정림사지)
금성산에서 내려서면 성화대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방향은 조왕사방면이고, 마루금은 직진 우측방향 무노정,성화대 방면으로 진행한다.
성화대 삼거리 또 다른 이정표 : 성화대250m, 통수대250m
무노정(無老亭)의 모습
무노정 입구 삼거리에서 마루금은 직진 무노정방면 버리고 우측방향 임도길로 진행하다가 다시 임도삼거리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무노정(無老亭) 현판의 모습
無老亭에 오르니 白馬江이 굽이치고 눈앞에 宮南池는
옛 百濟武王의 恨이 그리네
떠나가는 저구름은 百濟의 恨인가
지는 해에 산 비둘기 옛가지에 찾아 드네
-계미년 가을 부여군수 작-
임도갈림길 통과
임도갈림길에서 좌측방향 버리고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계백공원이 나오고, 동물이동통로가 나온다.
야산 이달선생 강역사적비 (계백문 위)
이달 선생(1889~1958)은 전설적인 기인으로 독창적인 주역을 해석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유명한 일화는? 일제 강점기 말엽에 조선 총독부는 한반도에 대규모의 신궁(神宮)을 건립하려고 하였는데 한군데는 서울 남산이었고 또 한군데는 부여 부소산이었다.
남산은 조선의 한양이었으니까 세우려 했던 것이고 부여의 부소산은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에 세우려 했던 것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아니고 하필이면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고 했던것은 자신들의 뿌리가 백제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제는1944년 무렵 부소산의 삼충사터에 신궁을 짓기 위한 기초 작업을 시작하였다. 일본신을 조선땅에 안치시키므로써 영적인 영적인 차원에서마져 조선을 병합하고 말겠다는 의도가 담긴 공사였다.
조선 주역의 대가이자 조선의 호국신을 신봉하였던 야산 이달선생은 공사현장을 지켜보다 미친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네 놈들이 상랑식도 하기전에 망할것이다.” 일본 경찰은 현장에서 잡아다가 취조를 하였지만 광인(狂人)으로 취급되어 풀려놨다. 그리고 해방 4,5개월전부터 조선의 독립을 예감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다고 한다. 이곳에 이달 선생의 사적비가 세워진 것은 부여와의 인연 때문인 것 같다.
1889년 경북 금릉군 구성면에서 태어난 이달선생은 1951년 부여 은산으로 이사를 했고 65세에 다시 부여읍 구교리로 이사를 하여 부여와 인연을 맺고 살았다고 한다.
계백로의 "계백문" 상부는 동물이동통로
지도상에는 동물이동통로라고 해놨지만 산책로라고 봐야 맞을것 같다..
계단통과
동물이동통로 통과하면 계단이 나오고 진행하면 도로가 나온다. 도로에서 우측방향 버리고 좌측직진방향으로 진행한다.
도로 직진으로 통과
지적삼각점(충남 135, 2007.12) 통과
동물이동통로 통과후 도로 따라 진행하면 우측편에 지적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다.
국공장 입구 진입
도로 따라 내려서면 우측편에 화장실이 나오고 활살표방향으로 진행하여 국공장 중앙을 통과한다.
국궁장통과
국궁장 감시초소옆으로 오르면 등로 흔적이 없고 희미하다. 능선에서 좌측방향으로 전환하여 내려서면 부여 새로남교회가 나온다.
부여읍 국궁장의 모습
국궁장을 관통하여 감시초소앞에서 바라본 모습. 타 산악회는 국공장 관리사무실앞을 지나 내려섰다고 하는데 우리는 맥을 이어간다.
새로남교회 통과
국공장 능선에서 내려서면 부여 새로남 교회가 나오고 교회을 끼고 좌측방향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부여여고에 도착한다.
부여새로남교회 통과
부여 새로남교회앞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부여여자고등학교까지 직진하게 되며, 4차선 도로 건너편에 부여도서관이 자리하고 있고,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으로 진행하면 다시 노로가 나오는데 우측방향으로 전환하여 진행하면 좌측편에 부여여고 정문이 나온다.
새로남교회에서 우측방향 골목길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회림참치집이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4차선 도로가 나온다. 도로 건너편에 부여도서관이 있고 횡단보도를 직진으로 건너 골목길로 진행하며 막다른 도로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좌측편 부여여고 정문 운동장으로 진행하면 된다.
부여도서관 앞 4차선도로 진직으로 통과
부여시내방향
2차선도로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부여여고방향으로 진행
부여도서관 통과
우측편으로 부여 도서관이 나오고 직진으로 100m 정도만 가면 좌측편으로 부여여고 정문이 나타난다.
부여여자고등학교.
부여여고 운도장을 통과하는 방법과 부여여고 우측방향으로 우회하여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
학교 통행을 금지하고 있는데 방학기간이라 학교 운동장으로 진행한다.
부여여고등 정문으로 들어가 우측방향 또는 운동장을 관통하면 "성지관" 앞이 나오고, 식수대과 왕궁 우물터을 지나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좌측편 능선으로 오르면 금성산으로 진행할수 있는 등산로가 나온다.
부여여고 통과 루트의 모습
화살표방향으로 진행하여 왕궁 우물터에서 우측방향으로 직진하다가 막다른길에서 우측방향 그리고 좌측능선으로 진행하면 된다.
부여여고 운동장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부여도서관에서 100m 진행후 좌측편 부여여고 정문에서 운동장 통과하여 계단으로 올라서면 된다.
부여여고 경내에서 화살표방향으로 진행
팔각정의 모습
백제 왕궁의 우물터.
마루금 진입
왕궁 우물터에서 진행하면 건물이 있는데 건물끼고 우측방향으로 이어가다가 좌측편 화살표 방향으로 올라서면 부소산으로 진행할수있다.
부소산으로 연결되는 도로
이정표 : 삼충사 200m, 영일루 400m
삼충사(三忠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백제말기 의자왕 때 삼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957년 <삼충사 봉건기 총회>라는 모임에서 처음 지었으며 국가 성역화 사업으로 1981년 11월에 다시 지었다.
삼충사는 외삼문(밖에 있는 삼문), 내삼문(안에 있는 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년 10월 백제 문화제행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성충(成忠?-656)은 백제 의자왕 때 백제 최고의 관직인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興首?-?)도 좌평으로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5천 결사대를 이끌고 무너져 가는 백제를 구하려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군과 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계백(階伯 ?-660)장군은 2등관직인 달솔에 이르러렀으며, 성충, 흥수, 계백은 이름이고, 성은 전해오지 않고 있다.
삼충사 사당 건물의 용마루 양끝에는 치미(망새)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치미는 부소산 절터(서복사지)에서 출토된 것을 복제하여 장식하였는데 진품은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치미는 주로 사찰이나 궁궐 건물에 사용되었으며길상(吉祥)과 벽사를 상징한 것으로 상상의 새인 봉황을 형상화하여 만들었다.
삼충사 경내에 모셔진 세분의 충신
죄측부터 성충, 흥수, 계백장군순으로 영정사진의 모습
이정표 :관광안내도 800m, 주차장 750m, 부소산문 580m, 삼충사420m, 영일루 200m,태자골숲길 250m, 군창지 350m
궁녀사갈림길 이정표 : 군창지0.2km, 삼충사0.5km, 부소산문매표소0.6km,궁녀사1.2km
이정표 :관광안내도 1.0km, 주차장 950m, 부소산문 850m, 삼충사600m, 영일루 200m,태자골숲길 150m, 군창지 200m
영일루(迎日樓)의 모습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영일루(迎日樓)의 편액의 모습
현재의 건물은 1964년 5월 홍산관아의 문루를 옮긴 것으로 기단은 정갈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1단으로 쌓고 주춧돌은 키가 큰 8각 장초석을 썼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으로 하고, 기둥위의 공포는 화려한 다포식으로 짜 올렸다.
영일루의 현판 글씨는 부여출신 서예가 원곡 김기승선생의 글씨로 영迎과 루樓자는 크게 하고 일日는 작게 썼는데, 이것은 산봉우리 사이에 해가 떠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고, 누각안의 [寅賓出日인빈출일]은 정향 조병호선생의 작품으로 <삼가 공경하면서 뜨는 해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서경]의 요전에 나오는 말이다.
영일루(迎日樓)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백제시대에 영일대가 있었던 곳으로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지금의 건물은 1964년 홍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문을 옮겨와 세운 것으로 이름을 영일루라고 하였다. 누각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르게 다듬는 공사를 할 때 백제의 와편이 많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청마산성이 바라다 보이며, 계룡산의 연천봉(739m)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태자(太子)골 숲길
옛 백제 왕자들의 산책로... 가벽게 편안한 맘으로 걷는 것 만으로도 족한 곳이다.
고대 백제의 태자처럼 세상을 덛은 마음으로 걸어보자.
고목이 된 참나무와 부소산 소나무 향을 음미하여...
봄이면 새순의 싱그러움을,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과 백마강 바람을 끌어안고,
가을이면 오색낙엽을 헤아려보고, 겨울이면 나뭇가지에 핀 눈 꽃이 아름답다.
약수가 있는 태자천의 흙길은 맨발로 걸어보며 백제의 지혜와 기를 받을 수도 있는 숲길이다.
호젓한 태자골 숲길
이 숲은 [산림청.생명의숲가꾸기국민운동.유한킴벌리]에서 주관하는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어 우수상을 수상한 숲이다. 특히 태자(太子)골 숲길이라 하여 옛 백제 왕자들의 산책로...가볍게 편안한 맘으로 걷는 것 만으로도 족한 곳이다.
고목이 된 참나무와 부소산의 소나무향, 봄이면 새순의 싱그러움,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과 백마강 바람을 끌어앉고, 가을이면 오색 낙엽을, 겨울이면 나뭇가지에 핀 눈꽃이 아름답다.
태자숲 주변 관광안내도
군창지(軍倉址)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
부여 부소산성(사적5) 동쪽 정상부(해발98)에 있다.
1915년 이곳 지하에서 쌀.보리.콩 등의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터의 규모가 상세히 밝혀졌다.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는데 , 길이 약70m 넓이 약7m 당속 깊이 약47Cm 정도이다.
지금도 이 일대를 파보면 불에 탄 곡식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주변에서 분청사기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조성연대를 고려말에서 조선초로보고 있다.
옛 군창지
백제 때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부소산 동쪽에 있는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군창지는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건물터의 규모를 자세히 밝혀냈다. 백제 때부터 자리잡은 이곳 군창지를 조선시대에도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에 공간을 두고 동 서 남 북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군창지 배경으로 인증샷
이정표 : 부소산문1.2km, 삼충사950m, 영일루300m, 군창지200m, 고란사1.2km, 낙화암1km, 부소산성광장450m, 수혈병영지230m, 반월루330m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 / 사적5호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쌍북리)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부소산성( 扶蘇山城)
국가사적 제5호로 백제의 26대 성왕(聖王) 16년(538) 공주公州에서 이곳으로 옮겨 부소산에 쌓아 123년간 사용한 사비도성(泗沘都城)의 중심 산성으로이중의 성벽(城壁)을 두른 백제식 산성이다.
테뫼식(머리띠를 두르듯 산봉우리를 중신으로 쌓은 모습)과 포곡식(산능선과 골짜기의자연지형을 따라 쌓은 모습)이 혼합된 백제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이다.
부소산성은 성둘레 2,495m와 면적 746,198평방m 의 규모로 군창지와 영일루를 중심으로 쌓은 길이 840m 정도의 테뫼식 산성과 군창지 동쪽에서 반월루를 거쳐 사자루를 향해 골짜기를 감싸며 부소산을 크게 둘러싼 길이 1,655m2의 포곡식 산성으로 돌과 흙을 섞어 다져 쌓은 토석 혼축의 토성이다.
부소산성의 반월루(半月樓)
부소산성의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이 만나는 등성이에 1972년 지은 2층 누각으로 현재 부여의 시가지와 부여를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 부산의 대제각, 규암진 수북정이 아련하게 들어와 부여가 반월성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곳이다. 백마강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 남쪽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1972년에 지은 2층 누각으로 반월루(半月樓) 편액은 "임자 정월 국무총리 김종필"이라 되어 있다
반월루(半月樓) 현판의 모습
반월루 누각에서 바라본 부여(扶餘)시가지와 금강의 모습
부여는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홍산현, 임천군, 석성현이 부여현에 합쳐져 이루어진 곳으로 백제시대에는 소부리 또는 사비로 불렸다.
사비는 원래 새벽이라는 이 지역 토속 사투리였다고 하며 지금의 이름인 부여도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나온 토박이 말로서 나중에 한문으로 표시하다보니 扶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부여라는 뜻은 이 땅이 새벽의 땅이며 아침의 땅이라는 뜻이다.백제는 성왕(26대)때인 538년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이곳 부여로 수도를 옮겨 122년동안 나라를 지켰는데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망한때는 의자왕(31대)때인 660년 7월이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망하기 직전에 나라안 곳곳에서 기이한 조짐이 보였다고 한다.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고 개구리 수만마리가 나무위에 올라 앉았고 귀신이 대궐에 들어가 ‘백제가 망한다’고 외치고는 땅속에 들어가므로 그 땅을 파보니 거북이 한마리가 있고 그 등에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 같다”는 글귀가 씌여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옳은 충고를 하는 충신들을 가두고 사비강가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반월루(半月樓) 누각에 있는 현판의 글
낙화암의 시비의 모습
고란약수의 전설
아득한 옛날 소부리(옛 부여지명)에 살던 노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금실이 참 좋았으나 늦도록 자식이 없어 늘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고 있던 중 어느날 할머니의 꿈속에 일산(日山)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에 있는 지금의 고란사 바위에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강한 물, 곧 유강(柔剛)이 합한 음양(陰陽)약수가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날밤 남편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걱정에 찬 할머니는 다음날 아침 약수터로 가봤더니 왠 간난아기가 남편의 옷속에 누워 울고 있었다.
도사가 약수 한잔 마실때 마다 3년이 젊어진다고 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할머니는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그 아이가 자라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에
최고 큰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삼거리 이정표 : 주차장1km 부소산문950m, 군창지1.0km, 부소산성광장400m, 궁녀사700m, 태자골 숲길350m, 화장실20m, 낙화암450m, 고란사650m 고란사선착장700m ,사자루300m
삼거리 이정표 : 주차장1.2km, 부소산문1km ,부소산성광장400m, 군창이1km, 태자골숲길500m, 궁녀사650m, 사자루80m, 낙화암200m, 고란사400m, 고란사선착장450m
사자루((泗沘樓)
사자루는 금남정맥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아래에 백마강이 한눈에 보인다.
부소산 정상에 있는 누각으로서 편액의 글씨는 조선 고종황제의 다섯째 왕자인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라고 한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비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비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비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부소산(扶蘇山)
해발 106m밖에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동쪽과 북쪽으로 두 봉우리로 나누어진 부여의 진산이다. 그 산의 정상과 능선을 흙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 부소산성으로 사적 제5호로 지정돼 있다. 백제 도성으로 추정되는 부소산성은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전쟁 시에는 최후 방어성으로 이용했던 사비백제시대의 대표적 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식량을 저장하던 군창지(軍倉址),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낙화암, 고란사와 고란초, 해맞이 명소 영일루(迎日樓), 사자루 등 백제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은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보는 학설이 유리하다 .
고란사 삼거리 통과
금남정맥 마루금은 사자루 부소산에서 마감하고 부여 구드래나루터까지는 이지점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야 하지만 우측편에 있는 낙화암과 고란사을 구경하고 복귀하여 구드래나루터로 내려서기로 하고는 우측방향으로 내려선다.내림길이다.
고란사 삼거리에 있는 연리지 소나무 안내판의 모습
낙화암 갈림길 이정표 : 부소산문1.3km 주차장1.5km.부소산성광장500m 사자루150m/ 낙화암100m 고란사300m 고란사선착장350m
이정표 : 사자루200m, 낙화암 백화정20m, 유람선 선창장220m, 고란사200m
낙화암 비석
백화정(百花亭) / 충청남도 문회재자료 제108호
부여 부소산성 북쪽 금강변의 낙화암 정상부에 있는 육각의 정자건물이다.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의 발의로 부풍시사라는 시우회에서 세웠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소동파가 해주에 귀양가 있을 적에 성밖의 서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라는 시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부여외곽을 감싸고 도는 백마강과 주변의 낮은 산들이 어울려, 내려다 보이는 풍광이 아주 일품이어서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대하는
듯하여 부여를 찾는 관광객이면 반드시 들르는 명소이기도 하다.
낙화암의 있는 백화정(百花亭)의 모습
낙화암의 바위위에 있는 정자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 적국의 병사들에게 유린을 당하느니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한 3천 궁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서 매년 10월 백제 문화제때 제사를 지내는곳이라고 한다.
의자왕은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武王)과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백제의 오랜 전통에는 다른 나라의 혈통을 받은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금기시 되어있었다 한다.
그러나 의자왕이 왕자시절에는 신라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극복하여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포섭하기에 힘쓰는 한편, 부왕인 무왕과 모후인 선화공주에게 극진히
효도를 다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한다. 그래서 결국 나이가 40이 되어서
태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마침내 왕위에 오르자 반대세력을 거세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고,
신라를 침공하여 100여성을 함락시켜 국토를 확장하는 등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재위 20년 중 초기에 이룩한 업적과는 달리 신라의 적의를 크게 자극하였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 득세한 왕으로서의 오만이 생겼는지 국정을 소홀히 하고 충신의 충간을 물리치며
주지육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이라도
했어야 할 터인데, 살아서 당나라에 끌려가는 그 처량한 모습에 백성들은 얼마나 원망하였으리.
낙화암(落花巖) 아래의 백마강
백제의 3천 궁녀 꽃들이 떨어진 금강... 백제가 멸망하던 날(660년 7월) 백제의 여인들이 굳은 절개와 충절을 지키기 위해 백마강에 몸을 던졌던 곳으로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을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교훈적인 문화적 유산으로 패자(敗者)의 역사로 대표된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 색인데 당시 백제의 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였기 때문이라는 전설이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 고적조에 ‘(낙화암은) 부여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되자 궁녀들이 쏟아져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불렀다 한다’고 적혀 있다.
낙화암은 부소산 서북쪽 강변의 단애로 백제의 700년 왕조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의 3,000 궁녀와 함께 최후를 맞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삼국유사를 인용하고 있으나, 이는 철저하게 백제를 무너뜨린 당사자인 신라가 문화대국 백제왕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3,000 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 쫓기고 쫓기던 병사와 민초들이라 한다. 3,000 궁녀는 패배한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을 강조하려는 교묘한 각색이라는 주장으로 본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 옆 절벽에 송시열이 쓴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하지만 낙화암 위에서는 볼 수 없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만 1,500여 년 전의 역사를 간직한 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낙화암에서 바라 본 금강의 백마강바라본 백마강
백마강은 <백제의 제일 큰 강>이라는 뜻으로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km의 금강을 일컫는데 백제 사람들은 이 강을 사비강, 백강이라고 불렀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신무내산 뜬봉샘에서 시작하여 장항, 군산앞 서해바다까지 401km를 흐르는 큰 강으로 금강을 지역에 따라 고유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금산군 제원부근에서는 광석강(廣石江) 대전시 회덕에서는 부강芙江 또는 절강, 공주에서는 곰강 또는 금강(錦江) 금강천이 합류되는 천정대 부근에서는 창강(蒼江)으로 불리며, 백마강 이하 서해바다까지는 진포鎭浦라고 부른다.
원래 금강은 곰강(웅진熊津)의 음역이므로 공주부근에서는 한정하여 불렀으나 점점 확대되어 지금의 금강 전체를 지칭하게 된 것이다.
낙화암(落花岩)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백제의 사직이 무너지던 날(의자왕 20년, AD660년) 백제의 여인들이 적군에게 잡혀 치욕스런 삶을 이어가기 보다는 충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백마강에 몸을 던졌던 곳으로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날리는 것과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데 당시 백제 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20)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여인들이 죽음을 면치못할 것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던져 죽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후세 사람들이 낙화암이라 불러 백제여성의 절개와 고귀한 충령의 표본이
되고 있다. 암벽은 60m 정도이며 절벽 아래에는 송시열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이 새겨져 있다.
위치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689외 1필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扶餘邑) 부소산(扶蘇山)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고란사(皐蘭寺) 극락보전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본사인 공주 마곡사의 말사로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백제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절 이름은 뒤편 암벽에 자라고 있는 고란초에서 따 왔다. 법당 건물은 조선 정조 21년(1797)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 기중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겨진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험준하며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고란사극락보전 법당내부의 모습
고란사 영종각의 모습
고란사 삼성각의모습
고란사 극락보전 뒷편의 벽화
고란사 극락보전 뒷편의 벽화
고란산 삼성각 내부의 모습
고란약수의 전설
아득한 옛날 소부리(옛 부여지명)에 살던 노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금실이 참 좋았으나 늦도록 자식이 없어 늘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고 있던 중 어느날 할머니의 꿈속에 일산(日山)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에 있는 지금의 고란사 바위에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강한 물, 곧 유강(柔剛)이 합한 음양(陰陽)약수가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날밤 남편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걱정에 찬 할머니는 다음날 아침 약수터로 가봤더니 왠 간난아기가 남편의 옷속에 누워 울고 있었다.
도사가 약수 한잔 마실때 마다 3년이 젊어진다고 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할머니는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그 아이가 자라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에
최고 큰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고란초의 발견
옛날 원효대사가 사자강[錦江] 하류에서 강물을 마시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진란(眞蘭)과 고란(皐蘭)이 있음을 알고 물맛을 따라 올라 이곳 부소산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는데 지금은 진란은 없어지고 고란만 남아 있으나 고란마저 아깝게도 멸종의 위기에 있다.
고란초와 약수의 비석
극락보전 뒷쪽에 있는 고란정
약수의 전설
백제 왕들은 이 고란 약수를 즐겨 마셨는데 고란 약수가 틀림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약수에 진귀한 이 고란초(皐蘭草)를 한잎씩 띄워 오도록 분부 하였다고 한다.
고란사 극락보전 뒷편의 벽화
고란사 극락보전 뒷편의 벽화
고란사 극락보전 뒷편의 벽화
고란사 극락보전 뒷편의 벽화
고란초 자생하는 모습
고란정 위 바위에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수량이 많았는데 지금은 얼마 없다고 한다.
백마강의 유람선
고란사 극락보전의 모습
낙화암의 나루터
조룡대(釣龍臺)
충청남도 부여군의 쌍북리(雙北里) 고란사(皐蘭寺) 북동쪽으로 백마강 가운데에 있는 바위이다.
조룡대(釣龍臺), 용바위, 용암이라고도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호암(虎岩)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扶蘇山)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怪石)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으니,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조룡대는 관아의 북쪽, 강 가운데에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비바람이 크게 몰아쳐 군사들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소정방이 바위 위에 서서 흰 말을 미끼삼아 용을 낚았다. 잠깐 사이에 비가 멎고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들이 강을 건너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런 까닭에 강의 이름을 흰 말의 강이라는 뜻으로 '백마강'이라 부르고, 바위는 용을 낚았다는 뜻에서 '조룡대'라고 불렀다. 바위 위에는 아직도 신발자국이 남아 있다."라고 적혀 있다.
부여구드래나루터의 모습
구드래나루터 선착장 모습
구드래나루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구드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 ‘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 기슭을 따라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함리절터, 부소산성, 부여나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중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부여 구드래나루터에서 인증샷
금남정맥 주화산에서 부여 구드래나루터까지 도상거리 약128km 완주 기념촬영.
구드래 나루터 표지석
'구드래'는 부소산(扶蘇山) 서쪽 기슭의 백마강(白馬江)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백제왕이 왕흥사(王興寺)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泗沘水)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구드래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구드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 ‘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 기슭을 따라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함리절터, 부소산성, 부여나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중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금남정맥 완주증 수려식
송백 집행부
좌측부터 송백회장님, 수석김대장님,마루금 선두 이대장님 수고 많았습니다
금남정맥 마루금 함께한 심삿갓님과 함께 인증샷
금남정맥 완주 기념사진
가자티고개 좌측편에 금남정맥 마루금 등산로 안내도가 있는 낙석방지 철조망 옆으로 이용하여 완만하게 올라서면 가시넝쿨밭과 잡목들로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완만하게 약10여분 오르면 됨봉갈림길에 도착한다.
됨봉은 마루금에서 약간 우측편으로 비껴 있지는 거리가 얼마되지 않아 왕복하고는 좌측편으로 내려선다.
됨봉갈림길에서 내려섰다가 오르면 187m 개활지가 나오고 이지점에서 우측방향 숲으로 들어서면 직진방향으로 진행하지 말고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희미하게 등로가 나온다.
무명봉을 넘어 내려서면 연달아 3기의 묘지가 나오고, 완만하게 오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이지점에서 우측방향 버리고 좌측으로 방향전환하여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벌목지가 조망되고 신앙고개에 도착하게 된다
신앙고개를 통과 후 완만하게 능선을 진행하면 좌측편으로 공동묘지가 나오고 묘지 정상부에는 천주교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190봉을 넘어 내려서면 넓은공터가 나오고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임도길이 나온다. 이곳을 일명 신 신앙고개로 칭하고 직진으로 올라서면 감투봉 삼거리가 나오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182봉에 도착하게 된다.
182봉에서 벌목지대을 내려서면 안부가 나오고 직진으로 통과하면 완만한 등로길이 이어지고 잠시후 송전탑이 있는곳을 통과하게 된다. 송전철탑을 지나 완만하게 오르면 성터의 흔적이 있는곳을 지나게 되며 지도상에 없는 조석산에 도착한다.
조석산에서 무명봉 몇개을 넘어서면 청마산 갈림길 안부에 도착하고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되지만 좌측방향에 있는 청마산을 왕복하고는 청마고개로 진행한다.
청마산 갈림길에서 내려서면 완만한 등로길로 진행하다 보면 양옆으로 참나무 같은 나무숲을 지나 급경사지을 한차례 오르면 능선 안부에 무인산불감시탑이 나오고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밤나무단지옆을 지나게 된다.
청마산성 흔적이 있는곳을 통과하니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고 돌계단을 따라 내려서니 청마고개 또는 오산고개에 도착된다.
청마고개에서 직진으로 올라 진행하니 부여사비내성 장대지에 도착하고 우측방향으로 편안하게 진행하니
진주강씨묘지ㅏ 나온다. 묘지에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표고버섯 재배 하우스가 나오고 조금 진행하면 4번국도 석목고개에 도착한다 이곳 민가에서 물을 공급할수 있다.
SK가나다 충전소에서 4번국도을 횡단하여 맞은편으로 오르니 안부에 쉼터가 나오고 금성산까지는 편안한 등로가 이어진다. 금성산정상의 높이가 상일동 일자산보다 낮은 해발121.2m 있다. 이것도 산이라고 말할수 있는지 해발300m이상이 되어야 산이란 칭할수 있을것 같은데...
금성산 통수대에 올라 부여시가지을 조망하고는 성화대방향으로 진행 무로정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후 또 다시 갈림길이 나오는 지점에서 우측11시방향으로 내려서면 계백문위 동물이동통로을 통과하여 국궁장 중앙을 관통하여 능선안부에서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부여 새로남교회가 나온다.
새로남교회에서 우측편으로 내려서면 직진으로 도로을 횡단하고 100여미터 진행하면 막다른 도로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부여도서관이 나오고 조금더 진행하면 좌측편으로 부여여고 정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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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여고 정문으로 들어가니 방학기간이라 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조용하였다. 운동장을 지나 계단을 올라 학교뒤편으로 진행하니 백제 왕궁에서 이용 하였다는 우물이이 나오고 팔각정(우물) 뒤편 능선으로 오르면 부소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온다.
가자티고개에서 부여 구드래나루터까지의 오늘 진행하는 등로길은 고도가 약200m 이내이며 최고봉은 마루금에서 약간 비껴있는 청마산(233m)이다. 비교적 야트막하고 굴곡이 심하지 않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가시덩굴이 가끔 함께 놀면서 쉬어가라며 붙잡는다.
무더위속에 진행하는 금남정맥 마지막구간길 마음은 편안하지만 발걸음은 무거워지는 이유는 무얼까? 아마도 지난구간(17번국도 벌문이재~가자티고개) 땜방 산행이후로 3주간 산행없이 여름휴가와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하는 관계로 체력이 약해져 있어 오늘 진행하는 산행은 후미에서 진행하리라 생각하고 산행길에 임한다.
후미에서 진행하다보니 무더워을 먹은 대원과 체력이 소진된 대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몇분이 나타나고 함께 진행하기 위해 기다림이 계속되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그래도 오늘 만큼은 후미에서 대원들을 위해 봉사하리라 생각하며 여유롭게 마루금 이어간다.
누군가(선답자)가 정맥의 꽃은 금남정맥이라 했던가!
금남정맥 시작지점인 주화산을 지나면 아름다운 호남알프스구간이 나오고, 연석산 운장산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멋진 암릉과 설경에 취해 마루금을 걸어보았고, 또 수계상 금남정맥을 금강정맥이라 불리어지는 왕산봉갈림길에서 군산 장계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접고 부여 부소산 우측방향으로 전환하여 진행한다.
대둔산에서 월성봉으로 이어지는 힘찬능선길은 때늦게 찾아온 함박눈으로 인하여 멋진 설경속에서 진행한 추억들...그리고 뒤이어 금남의 백미라 말할수 있는 계룡산이 나타나는데 계룡산 비탐방지역과 주능선을 넘어설때의 그 벅착 심장박동의 뭉클함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뇌리을 스쳐지나간다. 계룡산을 지나면서 부터는 야트막한 봉우리와 넝클가 싸우며 완만하게 진행하면서 부여 부소산을 거쳐 구드래나루터에서 금남정맥 마루금을 종료한다.
주화산에서부터 부여구드래나루터까지 선두에서 리딩해주신 송백 이철주대장님
금남정맥을 위해 기획해 주신 송백 송인서회장님
금남정맥 대원들의 영양을 책임진 송백 수석김대장님
그리고 중간 후미 사진봉사해 주신 대원들
금남정맥 부여 부소산, 구래나루터까지 함께한 대원들에게 감사와 박수을 보내며 건강하시고 다음 산행길에서 반갑게 뵙길 기대합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금남정맥 대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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