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14. 19:07ㆍ★ 수도권 55산 종주/수도권 55산 종주
수도권 55산 제7구간 서대문역에서 안산, 인왕산, 북악산, 국민대까지
◈ 산 행 지 :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동, 종로구 무악동, 부암동, 성북구 정릉동 일대의 산
◈ 산행일시 : 2019년 4월 14일(일요일, 당일산행)
◈ 산행코스 : 서대문역 1번출구-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천연뜨란채아파트-170 m봉-안산봉수대-안산-
독립문파크빌정문-서대문구 의회-한성과학고등학교-I'PARK아파트-무악재-인왕산-창의문-
북악산(백악산)-청운대-숙정문안내소-성북천발원지-북악스카이웨이 제2산책로(제2 김신조
루트)-호경암-하늘전망대-하늘교-하늘마루-여래사-북악매표소-국민대 정류장
◈ 산행시간 : 10시55분~16시40분(5시간45분, 식사 및 휴식 포함)
◈ 산행거리 : 약 13km
◈ 산행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날씨 : 가랑비가 내리는 봄날씨
◈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 도상거리(12.77km),실제거리(13km),소요시간(5시간45분), GPS(12.77km)
◈ 교통 : 대중교통(지하철, 버스)
- 갈때 : 하남-강동역 5호선-서대문역 1번출구
- 올때 : 국민대 110번A- 우이,신설 경전철 보국문역-성신여대(4호선)-동대문역사역(5호선)-천호역-하남
◈ 산행 상세안내
5호선 서대문역 1번 출구로 나와 약 30m 진행 후 삼거리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경기대 서울캠퍼스 통과 후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천연뜨란채아파트 정문앞에서 좌틀하여 진행
목책계단 오르막을 올라 우틀하여 진행/우측으로 인왕산 조망
170 m봉(gps 214m)/넓은공터 체육시설 및 정자/삼각점 확인 못함
능안정 사거리/직진으로 진행
넓은 전망테크/ 좌측 안산과 우측 인왕산 조망
복수천 약수터 등로길 이정표 : 복수천 약수터(북아현동) 415m, 능안정 315m, 전망대 137m
봉원사 삼거리/직진으로 오름길 진행
능안정 팔각 정자/이정표
정자와 체육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는 넓은 공터 통과
119 현재위치 안산자락길 23 이정목
봉원사 갈림길 통과/직진으로 통과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사거리 이정표(현위치 안산자락길 24)
암봉/조망지/안산의 암봉이 시작됨
백암약수터 삼거리
안산 오름길 좌측편에 있는 얼굴바위/조망대
봉수대 갈림길/좌측방향 봉수대
무악동 봉수대(烽燧臺)/조망지
헬기장
안산(해발 296 m)/정상은 군부대 시설물이 시설되어 있음
백암 약수터 갈림길 복귀/ 좌틀 내리막 진행
백암 약수터 갈림길/ 좌측 약수터, 우측 안산초등학교
백암 약수터 갈림길 복귀/ 직진으로 진행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삼거리/좌측방향 안산자락길 버리고 직진으로 진행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사거리에서 직진으로 진행
독립문역에서 연신내역으로 이어지는 둘래길 나무테크 만나 우측방향으로 진행
사각정자와 운동시설/안내판/바로 좌측편 아래로 독립문 파크빌 아파트/좌측 시멘트도로로 진행
시멘트도로 통과 후 좌측편 급경사 내림 계단으로 진행
도로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
독립문 파크빌 아파트 좌측편에 두고 통과
한성과학고등학교 좌측편에 두고 통과
서대문 구의회 좌측편에 두고 통과
서대문 독립공원 입구 우측편에 두고 통과
무악재(gps 74 m)/왕복 6차선 도로를 건너 좌틀하여 인왕산 I'PARK 아파트 뒤편으로 진행
인왕산 들머리/이정표/안내판/나무계단길로 진행
무악공원 약수터 좌측편에 두고 진행
인왕정 갈림길/우측방향 인왕정방면으로 진행
선바위가 보이는 나무계단 오르길 진행/뒤돌아 보면 지나온 안산 조망
인왕정/팔각정자/우측방향 암릉지로 진행/ 나무계단 접속
전망대/좌측방향으로 진행
해골바위/ 좌틀 오르길 진행
좌측편으로 기도처 보임
내림길 삼거리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성곽앞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
무악동 갈림길/ 나무계단에서 좌측방향으로 성벽을 넘어 다시 좌측방향 성벽 따라 돌계단으로 오름길 진행
철계단 통과
119 현위치 A5 이정목
성벽 따라 나무계단 내림길 진행
사직공원 삼거리/경계점이정표/현위치 A4/ 직진으로 진행
철계단 오름길 진행
창의(자하)문 삼거리
인왕산(해발 338 m)/큰 바위 위 대형 삼각점(서울 467 1994 복구)/정상 나무석/이정표/조망지/좌측방향진행
기차바위 갈림길 직진으로 진행
수성동계곡 갈림길 현위치 A1 이정목
인왕산 날머리지점/좌측방향 도로 따다 진행
윤동주시인의 언덕/지석
2차선 차도를 만나 길 건너 좌틀/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현장 경찰의 표상” 故 정종수 경사 통과
창의문/ 우측편 안내소(신분증 필용없음)/출입 명찰을 받고 출입게이트 통과/성벽계단길 진행
돌고개 쉼터(gps 197 m) 통과
백악 쉼터
백악산(白岳山해발 342m)/넓은공터/정상석/북악산 옛 모습으로 복원 표지석
총 맞은 소나무/1968년 1월21일 사태 소나무 안내판 통과
청운대(靑雲臺, 해발 293m)/넓은공터/의자가 있는 쉼터/조망지/정상석/성곽 밖으로 진행
성곽안으로 진입하는 통로(성곽 밖으로 진행 후 안으로 들어 감)
백악 곡성 갈림길/좌측편으로 곡성 돌아보고 복귀하여 진행
백악 촛대바위 갈림길/좌측편에 돌아보고 진행
숙정문(
숙정문 안내소/출입 명찰 반납/이정표/안내판/좌측방향으로 진행
나무계단길 진행 후 두갈래 등로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삼청각 쉼터 통과
북악산의 유래 안내판이 있는 삼거리 통과
성북천 발원지 갈림길/무장공비 김신조 루트 안내도/이정표/우측방향으로 진행
시멘트 계단 오름길 진행
서마루(gps 256 m)/나무 계단 오름길 진행하면 우측편에 쉼터/우측편 급경사 나무계단 내림길 진행
계곡마루(gps 214 m)/솔바람교/이정표/샘터/오르막 나무계단으로 진행
남마루 쉼터 통과
화장실/송전탑/좌측편으로 진행
총알맞은 바위(gps 318 m) 통과/호경암 안내판/호경암 등산 안내도
호경암(gps 332 m)/정상석과 삼각점/조망지
북악하늘전망대(gps 309 m)/전망테크/조망지
북악 스카이웨이 갈림길 직진으로 진행
하늘교 통과
팔각정자와 체육시설물 있는 삼거리/직진으로 진행
국민대, 여래사 갈림길/여래사방향으로 진행
등로길 좌측편으로 유격훈련때 이용하는 시설물이 있는곳 통과
성북구 숲체험장 갈림길/좌측방향으로 진행
여래사/등산로 좌측편에 있음/여래사 일주문 통과
형제봉 갈림길/ 직진으로 진행
포장도로 따라 진행/삼곡사, 여래사 삼거리에서 우측방향
청학사다른 삼거리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림길 진행
북악공원 지킴터 입구 통과
국민대학교 정문
산행종료
◈ 에필로그
어제는 67산방 신임대장 북한산 산행이 있어 오래간만에 진달래능선, 대동문, 백운대에 올라 갔었다.
북한산 정상 백운대에 수많은 인파로 인하여 인증샷도 못 남기고는 백운산장으로 하산하여
친구일행들을 기다려 보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하루재를 거쳐 우이동으로 복귀하여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는 집으로 복귀한다.
내일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관악산 6봉, 8봉 신임대장 공지 참석을
포기하고 수도권 55산 서대문역에서 안산, 인왕산, 북악산, 국민대까지 탑사 산행을 계획해 본다.
집으로 가는길에 내일 먹을 간식을 준비하고는 오늘 하루를 마무리해 본다.
기상벨 소리에 몸은 일어났지만 비가 내린다는 소리에 만사가 귀찬아 지는 순간이다.
얼마나 더 잤을까?
문득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가 거쳤다.
빨리 간단하게 씻고는 베낭을 챙겨 밖으로 나선다.
서대문역 1번 출구에 올라오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어 구내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안산으로 향한다.
사전에 오늘 코스에 대해 많은 선답자의 후기글을 보아서 인지 잘모르는 지역이 생소 하지가 않다 ㅎ
무리없이 안산 들머리지점에 도착하고 비내리는 우중산행이 시작된다
오늘도 아무런 사고없이 무사히 국민대학교 앞까지 진행할수 있길 바라며
첫 번째 봉우리인 안산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검단지맥 개념도
[한남정맥 검단지맥]
칠장산에서 분기한 한남정맥은 석성산을 거처 향린동산(88CC 입구)에서 아스팔트 도로 따라 경부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아차지고개를 지나 수원 광교산으로 이어가고, 또 하나의 산줄기가 향린동산(88CC 입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법화산(383m), 불곡산(335m), 영장산(414m), 검단산(542m), 청량산(438m), 용마산(596m), 검단산(657m)을 거처 하남시 창모루마을 한강변에서 그 맥을 한강에 넘겨주는 도상거리 43km인 이 산줄기를 한남검단지맥(漢南黔丹枝脈)이라 부른다.
[수도권 강동&강남 25산(약104km)]
하남 검단산-용마산-고추봉-남한산(벌봉)-청량산(수어어장대)-성남 검단산-망덕산(왕기봉)-고불산-영장산-불곡산-광교산-백운산-바라산-우담산-국사봉-이수봉-청계산(망경대)-매봉-인능산-대모산-구룡산-우면산-관악산-삼성산-호암산(민주동산)
[수도권 강북30산(도상거리150km)]
예빈산(직녀봉)-예봉산-철문봉-갑산-고래산-백봉-천마산-철마산(철마산남봉)-내마산(북봉)-시루봉-주금산-수원산-국사봉-죽엽산-노고산-천보산-북곡산(상봉)-상투봉-임꺽정봉-호명산-한강봉-꾀꼬리봉-챌봉-사패산-도봉산-영봉-백운대-형제봉-북악산-인왕산-안산
검단산-용마산-남한산(벌봉)-청량산-검단산-왕기봉-영장산-불곡산-시루봉-광교산-백운산-바라산
예빈산 → → → → 국사봉
예봉산 이수봉
철문봉 ↑ ↓ 청계산/망경대
적갑산 매봉
갑산 인능산
백봉 * 또는 반시계방향 * 대모산
천마산 붉은 글씨는 강동/강남 25산 구릉산
멸도봉 ↑ 푸른 글씨는 강북 30산 ↓ 우면산
둥글봉 관악산
철마산 삼성산
시루봉 민주동산
주금산 와우산
수원산 ↑ ↓ 안산
국사봉 인왕산
죽엽산 ← ← ← ← 향로봉
노고산 백운대
천보산--상봉(불곡산)-상투봉--임꺽정봉--호명산--한강봉-꾀꼬리봉-챌봉--사패산-도봉산-- 영봉
5호선 서대문역 1번 출구
서대문역 1번 출구 밖으로 나와 직진으로 도로 따라 약 30m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오고 우측방향으로 전환하여 올라가면 우측편으로 인창 중,고등학교 정문이 나오고 사거리에 도착한다. 사거리에서 직진으로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경기대 서울캠퍼스가 나오고 계속하여 직진으로 진행하면 우리은행, 마을버스 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우측방향으로 오르면 천연뜨란채아파트 정문에도 도착한다.
경기대 서울대캠퍼스 입구 삼거리의 모습
경기초등학교, 인창 중,고등학교 정문의 모습
인창 중,고등학교 정문을 우측편에 두고 직진으로 진행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직진으로 통과
우리은행지점과 마을버스 정류장의 모습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오르면 마을버스 정류장 앞 삼거리에 도착하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천연뜨란채아파트 정문앞에 도착한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 천연뜨란채아파트방향의 모습
아현김밥집의 모습
마을버스 정류장 삼거리 코너에 작은 김밥집이 있는데 이 김밥집이 등산객 사이에서는 유명한 집이다.
수도권 55산 안산구간 선답자의 후기글을 보면 나타나는 김밥집이다.
아침을 먹지 못하여 김밥집에 들려 아침, 점심으로 먹을 김밥 두줄을 사는데 돈도 셀프다.
김밥을 열심히 말고 있는 손에 참기름이 묻어있어 셀프로 거스름돈을 교환해 가라 하신다.
주인 아주머니의 인상좋은 모습과 김밥속 푸짐한 내용물을 보면서 선답자들의 칭찬하는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주인아주머니와 몇마디 나누고는 비속길을 걸어 천연뜨란채아파트로 향한다.
천연뜨란채 아파트 정문
천연뜨란채 아파트 입구 우측편으로 서대문 마을버스 02 번 정류장이 위치하고 있고 안산 들머리지점은
천연 뜨란채 아파트 정문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
안산 들머리지점에는 안산자연공원 등산 안내도와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고 목책으로 만든 나무계단을 오르면 안산 봉수대까지는 완만하게 진행할수 있다.
안산 들머리지점의 모습
처음에는 어떻게 서대문역에서 들머리지점까지 찾아갈지가 걱정이었지만 선답자의 후기로 마음 도움이 되었고 막상 찾아가니 쉬운 길이 었다.
안산 들머리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안산도시자연공원 종합안내도
천연 뜨란채아파트 정문 맞은편 안산 들머리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
안산 들머리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등산 안내도
개나리꽃이 만발한 나무계단 오름길 진행
안산 들머리지점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두갈래 등로길이 나온다. 우측방향은 둘래길이고 좌측방향으로 무명봉으로 오르는 등로길 좌측방향 나무계단으로 올라 산행을 시작한다.
170봉의 모습
170봉에는 체육시설물과 사각정자가 설치되어 있고 삼각점이 정자 좌측편에 있다는데 확인을 못하고 진행한다.
갈림길 좌측방향으로 진행
안산은 아현동 뒷산이라 등로길이 여기 저기 많이 있지만 어느곳으로 진행하여도 가능하다.
우측 테크나무길은 편안한 등로길이고 좌측편 통나무 계단길은 우회하여 능선으로 올라서는 등로길이다.
개나리꽃이 만발한 숲길 통과
능안정 사거리의 모습
조금전 삼거리에서 나무테크 등로길 우측편으로 진행하면 이 지점에서 만나게 되고 능안정으로 진행하면 되지만 직진으로 무명봉을 거쳐 내려선다.
능안정 사거리 이정표
전망대의 모습
능안정 전에 있는 전망대이며 바로 앞에 안산 정상이 조망된다.
안산 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오르지 못하고 안산 봉수대를 정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
앞으로 이어갈 등로길을 가늠해 보고 바로 앞에 우뚯 솟아있는 산이 인왕산이고 바로 뒤편으로 솟아 있는 산이 북악산이다. 북악산을 넘어 국민대까지 가야하는 여정길...
잔망대에서 바라본 안산정상부의 모습
복수천 약수터 삼거리 통과
조금전 능안정 사거리에서 좌측방향 시멘트도로 따라 진행하면 이지점에서 만나게 되고 잠시후 능안정 정자에 도착한다.
복수천 약수터 등로길 이정표 : 복수천 약수터(북아현동) 415m, 능안정 315m, 전망대 137m
봉원사 삼거리의 모습
봉원사(奉元寺)
위치 :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 120 (봉원동 26)
천년고찰이자 명찰인 봉원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한국불교와 전통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써 한국불교 김구해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시며 불교의 현대화 및 생활화를 위한 전법도생에 그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절이다.
봉원사(奉元寺)는 신라(新羅) 51대(代)(서기 889년)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년)가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처음으로 지었던 것인데 이후 고려시대에는 고려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크게 중창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당시 사람들로 부터 크게 찬탄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산군(韓山君)이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태조 5년(1396)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제14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전각이 소진됨에, 17대 효중 2년(1651)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동, 서 요사채가 다시 소실되어 극령(克齡), 휴엄(休嚴) 두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제21대 영조 24년(1748)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寺)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22대 정조 12년(1788)에는 전국의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제25대 철 종 6년(1856) 은봉(銀峯), 퇴암(退庵)화상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제26대 고종 21년(1884)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 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
고종 31년(1894) 주지 성곡(性谷)스님이 약사전을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다.
봉원사 삼거리 이정표
능안정의 모습
능안정에서는 등산객들이 비를 피해 이른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고 잠시 휴식를 취하고는 안산정상으로 향한다.
능안정 앞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
무명봉에 설치되어 있는 삼각점
지적삼각점의 모습
정자와 체육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는 넓은 공터 통과
체육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는 곳 통과
안산 등로길에는 주민들의 편의시설물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언제라도 찾아와 휴식과 운동을 할수 있도록
정자와 체육시설물들이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위치 안산자락길 23 이정목
봉원사 갈림길 통과
봉원사 갈림길 삼거리 이정표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사거리의 모습
안산정상은 직진으로 진행하지만 독립문방향은 우측편 나무계단으로 내려 진행하면 된다.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사거리 이정표(현위치 안산자락길 24)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사거리 이정표(현위치 안산자락길 24)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사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등산 안내도
암릉길의 모습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사거리 이정표(현위치 안산자락길 24)에서 직진으로 오르면 암릉이 나오고 암릉길로 오라서면 확트인 조망지 앞에 도착한다. 그러나 비와 운무로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조망이 없어 좌측편 안산 정상으로 진행한다.
조망지에서 바라본 안산의 모습
백암약수터 삼거리의 모습
안산정상을 찍고 이지점으로 복귀하여 백암약수터 방향으로 내려서 무악재 한성과학고등학교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일단은 안산 암릉지를 올라서면 봉수대가 나오고 보우대를 지나면 헬기장이 나오는데 안산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여 올라갈수 없고 주변에 삼각점이 있다고 하는데 찾을수가 없다.
백암약수터 삼거리 이정표
안산 오름길 좌측편에 있는 바위의 모습
등로길에 설치되어 있는 무악재 안내도
백암약수터 삼거리에서 직진으로 진행하면 두갈래 등로길이 나오고 직진방향은 암릉지 오름길이고 좌측방향은 능선 오름길로 진행한다.
무악재
모아재·안현·길마재·무학재·모래재·추모현·사현이라고도 한다. 무악재는 안산(296m)과 인왕산(338m) 사이의 나지막한 고개로, 도심과 서대문 외곽지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구실을 한다. 1번 국도인 의주로가 놓여 있으며, 지하철 3호선이 통과한다.
조선시대부터 의주를 비롯해 황해도·평안도와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특히 명·청의 사절들이 들어오는 길목의 관문구실을 했고 고개 아래 현저동에는 영취락이 발달했다.
현재 독립문(사적 제32호) 자리에는 중국 사절단의 영접을 위한 모화관과 영은문(사적 제33호)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의 가장 큰 내란인 이괄의 난이 종결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고개 정상에는 평안도·황해도는 물론 부산·회령·의주까지 급보를 전했던 옛 봉화터가 2군데 남아 있다. 이 고개는 가파르고 길목이 좁았으며, 도적과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10명 이상이 모여야만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오랜 침식작용으로 고개가 낮아지기는 했으나, 겨울철에는 눈이 조금만 내려도 교통 소통에 장애가 있다. 주변에 있었던 서대문 구치소는 의왕시 고일동으로 이전되었고, 그 터가 1991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봉수대 갈림길의 모습
안산 봉수대는 정상 직전 우측편에 설치되어 있고 정상부는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봉수대 갈림길 이정표
안산 봉수대의 모습
무악동 봉수대(烽燧臺)
위치 :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산 33-44
태조 때부터 안산에는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여 매일 저녁 봉홧불을 올리게 했다. 무사하면 봉홧불 하나를 올리고 외적이 나타나면 두 개, 국경에 가까이 오면 세 개, 국경을 침범하면 네 개, 싸움이 붙으면 다섯 개를 올리도록 했다. 따라서 평화 시에는 늘 봉홧불 하나가 정상에서 타올랐다.
원래 이 봉수대는 각각 동서 두 봉우리에 설치돼 있었는데 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지 쪽에서 전해오는 신호를 남산 제3봉수대로, 서쪽 봉우리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다 쪽에서 오는 신호를 받아 남산 제4봉수대로 보내는 것이다. 즉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조정에 알려주는 마지막 전령 역할을 했던 안산 봉수대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국가 위기상황을 조기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봉수대는 이괄의 난에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봉수를 지키는 봉수군만 포획하면 얼마든지 거짓 혹은 허위 정보를 후방에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단점은 병자호란 때도 드러난다.
이괄의 난 이후 민심은 흉흉했다. 인조가 피난 갈 때 한강에서 배 한 척 구할 수 없었을 만큼 민심은 인조 정권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환도 한 뒤에도 반군에게 붙은 도당들을 신고하라고 하자, 백성 가운데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해 '반란군 머리'라고 보고하고 상을 받는 자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안산 봉수대에서 인증샷
안산 봉수대에서 인증샷을 찍기 위해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부부 두분이 정상에서 내려오신다. 남자분께 사진을 부탁드리고는 봉수대에서 인증샷을 직고는 안산정상으로 향한다.
안산 봉수대에서 인증샷
봉수대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
앞으로 이어갈 등로길이 한눈에 들어오고 바로 아래에 있는 독립문파크빌 거쳐 한성과학고등학교, I'PARK아파트 옆으로 진행한다.
안산 헬기장과 정상부의 모습
안산(鞍山)의 '안(鞍)'은 말안장이란 뜻이다. '鞍'이란 글자는 두 글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가죽 혁(革)' 또는 '고칠 혁'과 '편안할 안(安)'이다. 도성 서쪽 산인 안산은 서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아야 편안하다고 해서 안산이라고 한다. 말 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글자 뜻을 찬찬히 살펴보면 역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 인조반정으로 혁명을 일으킨 서인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노론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까지 정권을 놓치지 않았다. 반면 동인 세력들의 근거지인 낙산(駱山)은 어떤가? '낙(駱)'이란 글자는 낙타를 뜻한다. '말 마(馬)'와 '각각 각(各)'이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로 각각 말을 타고 간다는 의미다. 이는 곧 동인 세력의 분열을 뜻한다. 실제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으며 그 때문에 이들은 한때 정권을 쟁취하기도 하나 분열을 거듭하다 결국 탄압받는 정치 세력으로 남는다.
오늘날 보수 정권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기득권을 놓치지 않는 반면 진보는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도 늘 분열을 반복하다 재야 세력으로 남는 지금의 정치 현실과 어찌 그리 똑같을까?
안산은 산의 생김새가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실을 때 사용한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재, 추모련이라고도 불렀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조선 시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안산은 무악산(毋岳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악이라는 명칭은 한양 천도를 위해 지금의 청와대 뒤에 있는 북악산, 인왕산 등과 함께 도읍의 주산을 다투는 과정에서 태조 이성계가 안산을 무악산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아이가 어머니의 등에 업힌 것 같은 한성의 부아암(負兒岩: 북한산 인수봉)이 마치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듯한 형상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안산을 어미 산, 즉 모악(母岳)"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적고 있다.
봉수대 삼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등산로 안내도
봉수대 삼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무악산 동봉수대터 안내도
안산(鞍山, 해발 296m)
안산 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실지적으로 헬기장이 정상을 대신하고 있으며, 무악이라고도 부른다. 두산이 마치 말 안장과 같다고 해서 안산(鞍山)이라고 하며, 안산(鞍山)의 '안(鞍)'은 말안장이란 뜻이다.
'鞍'이란 글자는 두 글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가죽 혁(革)' 또는 '고칠 혁'과 '편안할 안(安)'이다.
도성 서쪽 산인 안산은 서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아야 편안하다고 해서 안산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는데 말 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글자 뜻을 살펴보면 역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는것을 느낄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인조반정으로 혁명을 일으킨 서인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노론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까지 정권을 놓치지 않았다. 반면 동인 세력들의 근거지인 낙산(駱山)은 어떤가? '낙(駱)'이란 글자는 낙타를 뜻한다. '말 마(馬)'와 '각각 각(各)'이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로 각각 말을 타고 간다는 의미 임으로 동인 세력의 분열을 뜻한다.
실제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으며 그 때문에 이들은 한때 정권을 쟁취하기도 하나 분열을 거듭하다 결국 탄압받는 정치 세력으로 남는다.
오늘날의 보수 정권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기득권을 놓치지 않는 반면 진보는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도 늘 분열을 반복하다 재야 세력으로 남는 지금의 정치 현실과 비슷하다고 볼수 있다.
안산은 산의 생김새가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실을 때 사용한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재, 추모련이라고도 불렀고 정상 직전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조선 시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안산은 무악산(毋岳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악이라는 명칭은 한양 천도를 위해 지금의 청와대 뒤에 있는 북악산, 인왕산 등과 함께 도읍의 주산을 다투는 과정에서 태조 이성계가 안산을 무악산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아이가 어머니의 등에 업힌 것 같은 한성의 부아암(負兒岩: 북한산 인수봉)이 마치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듯한 형상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안산을 어미 산, 즉 모악(母岳)"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적고 있다.
안산(鞍山, 해발 296m) 시그널
안산 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실지적으로 헬기장이 정상을 대신하고 있다보니 정상석이 없다.
정맥이나 지맥을 걷다보면 마주하는 서래야 박건식님의 시그널을 이곳에서도 마주하니 참! 고마울 따름이다
전국 방방곡곡 산에 이렇게 정상 시그널을 붙혀 주시는 고마움을 지면으로 대신한다.
백암약수터 갈림길 복귀
안산 정상을 찍고는 다시 백암약수터 삼거리로 복귀하여 좌측편 백암약수터 방향으로 내려서 진행한다.
백암약수터 갈림길 이정표
백암약수터 삼거리의 모습
안산에서 내려서면 백암약수터 삼거리가 나오고 백암약수터 삼거리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또 다른 백암약수터 삼거리에 도착한다. 인왕산 독립문방향은 우측방향 이정표 안산초등학교 방면으로 진행하면 되지만 가까운 거리에 약수터가 있어 물 한모금 마시고 진행하도록 한다.
백암약수터 삼거리 이정표
백암 약수터의 모습
산새에 비해 물이 풍부하게 흘려 나온다.
휴식을 취하면서 약수터에서 물 한잔 마시고는 독립문방면으로 진행한다.
백암약수터 삼거리 복귀하여 직진으로 진행
백암약수터 삼거리 이정표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삼거리의 모습
백암약수터 삼거리에서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오고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방향 직진으로 진행한다.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삼거리 이정표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사거리의 모습
백암약수터 삼거리에서 진행하면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사거리에 도착하고 직진으로 내려서면 독립문역에서 연신내역으로 이어지는 둘래길에 도착한다.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이정표
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이정표
완만한 내림길의 모습
등로길에 피어난 벚꽃나무의 모습
독립문역에서 연신내역으로 이어지는 둘래길의 모습
한성고등학교 방향은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사각정자가 나오고 사각정자를 지나면 두갈래 길이나오는데 우측편 나무테크길 버리고 좌측편 시 멘트 도로로 내려서 진행한다.
나무테크 둘래길의 모습
사각정자가 있는 쉼터의 모습
바로 아래로 독립문 파크빌 아파트가 있으며 잠시 후 독립문 파크빌 아파트가 정문앞을 지나 무악재방향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안산 자락길 안내도
이강년(李康秊,1858년(철종 9) ) 낙인(樂仁), 낙인(樂寅), 운강(雲岡)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崗). 경상북도 문경 출신.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礻+甫)의 18대손이다. 아버지는 이기태(李起台)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남복영(南福永)의 딸이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이 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가산을 털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을 체포해 농암(籠巖)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의 문인이 되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 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해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다. 그 곳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와 단양금채동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여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선위하고 정미칠조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해 9월 16일에는 싸릿재[杻峙],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故里平), 10월 23일에는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각도 의병장을 따라 양주에 집결해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의병부대의 서울진격작전이 미수에 그치자, 다음 해인 1908년 봄부터 휘하장병들을 독려하여 2월 17일의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를 비롯해 2월 26일의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3월 12일의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4월의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강년의 의병활동 지역은 주로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 일대에 걸쳤다. 그 밑에서 활약한 김상태(金尙台)·이만원(李萬源)·백남규(白南奎)·하한서(河漢瑞)·권용일(權用佾)·윤기영(尹基榮)과 그 밖의 장졸들은 모두 이 지방출신자들이다.
이들은 이 지역의 지리에 밝고 또 엄격한 군율로 의병부대의 기강이 서 있어서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의병세력이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작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수원의 일본수비대에 구류되었다가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평리원으로 옮겨져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부하인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과천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 아래 장례하였다. 나중에 제천으로 옮기고 다시 상주군 화북면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이 있고, 또 그 제자와 의병시절의 부하들에 의해 엮어진 『운강선생창의일록』이 있다.
사각정자에서 바라본 조망
전기홍 (1879년(고종 16), 수용(垂鏞), 해산(海山))
초명은 전종기(全鍾棄).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수용(垂鏞), 호는 해산(海山). 전라북도 임실 출신. 아버지는 전병국(全炳國)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다. 9세에 이한룡(李漢龍)의 문하에 입문해 24세까지 수학하였다. 특히 『춘추좌씨전』에 심취, 정치에 관심과 안목을 갖게 되었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그 해 겨울 임실의 이석용(李錫庸)을 찾아가 기병하였다. 이 때 호남 일대에서 제일 먼저 의거를 일으킨 고광순(高光洵)과 기삼연(奇參衍)이 붙잡히자, 기삼연의 부하 김준(金準)이 의병을 재수습해 장성(長城) 일대를 중심으로 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에게 김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할 것을 제안, 이들은 남진하고 이석용의 의병들은 북진해 장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즈음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한 정원집(鄭元執)에 의해 7월 25일 대동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은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은 불갑산(佛甲山)으로 진군해 약간의 적을 포살하고, 27일에 나주 석문동(石門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10월 16일의 대명동(大明洞), 10월 24일 대치(大峙), 11월의 고막병참(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명성을 듣고 입대하는 의병의 수도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일제가 ‘의병대토벌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1월 17일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고향 일대에 「본고을 반당(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 의병들을 거느리고 화산(化山)을 거쳐 궁관산(宮冠山)으로 행군해 3월 27일 영광 오동치(梧桐峙)에 이르자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 뒤 장수고래산(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조두환(曺斗煥)·이경오(李景五)의 밀고와 김현규(金顯圭) 인솔로 붙잡혀 영산포 일본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광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5책이 있으며, 그 중 2책이 전해지고 있다.
최익현(1833(순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崔益鉉)
대한제국 때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포하고 국권회복에 힘쓴 문신. 본관은 경주, 아명은 기남, 자는 찬경, 호는 면암으로 1855년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후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등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포고팔도사민〉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1906년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으나 곧 잡혀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고, 병을 얻어 순국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기남(奇男).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아버지는 대(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9세 때 김기현(金琦鉉)에게 유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때부터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공부했다. 1855년(철종 6)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어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이조정랑·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866년(고종 3)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후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해 10월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聚斂政策)의 혁파,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사대문(四大門) 문세(門稅)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대내정책을 비판했다. 이 상소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곧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양주 직곡(直谷)으로 내려가 학문에 힘썼다.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대신을 비롯한 관리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그를 극렬히 비난했으나 당시 친정(親政)을 생각하고 있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소문의 문구 가운데 지나치게 과격한 내용이 있어 삼사(三司)를 비롯한 대신들의 탄핵으로 국문(鞫問)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1875년 2월 풀려났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위정척사론). 그는 이 상소에서 첫째, 일본과의 강화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비(武備)를 갖추지 못하여 고식책으로 강화를 추진한다면 앞으로 적의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일본의 물화(物貨)는 모두가 요사기완(搖奢奇玩)으로서 우리나라의 유한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셋째, 일본을 왜(倭)라고 일컬었으나 실은 양적(洋賊)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일단 강화가 성립되면 금수와 같은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했다.
이 상소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1879년 풀려나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약탈·잔학행위를 일삼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해 6월 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친일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했으며,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의 처단과 역적들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를 요구했다.
1895년 8월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보낸 순검(巡檢)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되어 있다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풀려나 향리로 내려갔다. 이어 고종에 의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을 회유하여 해산시키기 위한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8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2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여기서 그는 강렬한 화이관(華夷觀)과 양이주의(攘夷主義)의 입장에 서서 갑오개혁을 부정하고 구래의 봉건적 지배체제의 회복을 주장했으며,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을 추진하는 독립협회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라 칭하며 연호를 제정함은 종사(宗社)가 거의 멸망 지경에 이른 현시점에 있어서 명실(名實)이 일치하지 않는 헛된 일이라며 그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말에는 중추원의 설치를 건의한 자 및 박영효의 등용을 상소한 자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만민공동회가 열려 헌의6조(獻議六條)를 제출하는 등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자 독립협회류는 일체 혁파할 것이며 주모자를 모두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1900년 거주지를 충청도 정산으로 옮긴 후 홍천·지평·제천·안동·경주 등지를 여행하면서 친척과 벗들을 방문하고 강회를 여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2월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8월에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상경하여 자문에 응할 것을 요청하고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의 벼슬을 내렸다.
1905년 1월 고종을 면담하고 국세가 금일과 같이 위란(危亂)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까닭은 민비학살사건 이후 복수심이 결여된 때문이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재택용(人才擇用)·취렴금지(聚斂禁止) 등 5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상소를 올려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다. 그의 반일활동을 계기로 김학진(金鶴鎭)·허위(許蔿) 등의 반일상소가 잇따르자 그해 3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포천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며칠 후 다시 상경하여 상소문을 작성했으나 재차 강제 송환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전국에 걸쳐 반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포고팔도사민 布告八道士民〉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는 동시에 비통한 전도(前途)를 예시하고, 오직 우리는 궐기투쟁해야 할 것과 을사5적을 토륙(討戮)할 것, 이들이 국왕을 압박하여 일본의 포로로 하려는 등의 흉악한 음모를 방지할 것, 결세(結稅) 상납을 거부하고 일본이 경영하는 철도를 타지 말고 군기(軍器)·총포(銃砲) 이외의 일본상품을 사지 말 것 등을 촉구했다.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전라북도 태인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고, 113명의 지사들과 〈동맹록 同盟錄〉을 작성한 후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동참을 촉구했다.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창의구국(倡義救國)을 결의하고,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했으며, 격문을 열읍(列邑)에 보내 호응을 촉구했다.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인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에서는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이 저지른 기만적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태인읍을 무혈점령하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했으며, 이튿날 정읍에 도착해 무기와 병력을 증강했다.
다시 순창으로 행군, 많은 주민과 이속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소총과 화약 등 무기를 수합했으며,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의병의 수는 500명에 달했다. 이때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출동하자 이를 물리쳤다.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의병 수는 900명으로 증가했으며 소총 등의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력이 증강되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고종의 선유조칙을 전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날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진위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고석진(高石鎭) 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嚴原衛戍營)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으로 사절(死節)하기로 결심하고, 임병찬에게 구술(口述)로 유소(遺疏)를 전했다. 유소에서 그는 왕에게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국제관계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은 반드시 미구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단발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그해 11월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했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봉환되었다.
윤봉길(1908, 충남 예산, 윤우의, 尹禹儀)
1932년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수뇌부에 폭탄을 투척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파평,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이며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1918년 덕산공립보통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식민지 노예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1932년 봄 임시정부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몸과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해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서 물통폭탄을 단상에 던져 일본의 군부와 관부 인사들을 사상시켰고 현장에서 체포된 후 사형 당했다. 이 거사는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항일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시양리(柿梁里)에서 농민 윤황(尹璜)과 어머니 경주 김씨(金元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매헌(梅軒),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별명이 봉길(奉吉)이다.
1913년 6세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18년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3 ・ 1운동이 일어나자 어린 마음에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보통학교를 자퇴하였다.
1921년 14세 때부터 마을 부근의 유학자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熟)에서 6년 간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과 한학을 수학하였다. 특히 시재가 뛰어나서 오언 ・ 칠언 등 한시를 잘 지어 『명추(鳴椎)』, 『옥타(玉唾)』, 『임추(任椎)』 등의 제목으로 시집을 꾸며, 3백여 편의 자작 한시를 수록하였다. 오치서숙 수학 시기에 한문만 아니라 신문과 『개벽』 잡지 등을 탐독하면서 신학문을 자습하고 민족 문제와 농촌 문제들을 학습하였다.
1926년 19세 때 스승 성주록은 윤봉길에게 “나로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석별 기념으로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하여 첫 단계로 자기 집 사랑채에 야학을 차리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갑 ・ 을 2개 반으로 나누어 한글을 가르치고, 마을 청년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지식향상에도 노력하며, 월례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야학교재로 3권의 『농민독본』을 저술하였는데, 『농민독본』의 내용을 보면, 20세의 청년 윤봉길이 매우 선진적인 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체계화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갈림길의 모습
이지점에서 어느곳으로 진행해도 무방하나 좌측편 시멘트도로 따라 진행하면 단축로이다.
갈림길의 모습
사각정자가 있던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또 다시 갈림길 나무테크나 나오고 여기에서도 좌측편 급경사 내리막 나무계단을 이용하여 내려서면 된다.
나무계단 내림길의 모습
도로에 내려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독립문 파크빌 아파트와 한성과학고등학교 정문 앞으로 이어진다.
안산 날머리지점의 모습
안산 날머리지점 이정표
안산 날머리지점 좌측편의 모습
독립문 파크빌 아파트 앞 통과
한성과학고등학교 통과
서대문 독립공원 담벼락의 모습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애국인사와 항일투사들이 체포, 투옥되어 가장 많은 성교을 치른 곳이다.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에는 서대문 형무소로, 1967년 7월에는 서울 구치소로 여러번 개칭되었다가 1987년 11월 15일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함에 따라 서울시가 1988년 옥사·담장·망루 등을 대거 철거하고 독립공원을 조성하였으며1992년 광복절 제47주년에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장소라는 배경 이외에도 이들이 시민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이웃하여 그 역사적 의미가 더욱 깊다.
서대문 구의회 통과
서대문 구의회 앞 이정표
서대문 독립공원 입구
위치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
인왕산 서쪽 자락 독립문역 사거리, 서울역에서 구파발로 가는 통일로 왼편에 독립공원이 있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건축물이 독립문(獨立門)이다. 남동쪽 상단에는 ‘독립문’ 현판 글씨를 한글로 새겼고, 북서쪽 상단에는 한자로 새겼다. 좌우에는 네 개의 괘 위치가 상하로 뒤바뀐 태극기 문양이,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李花, 자두꽃) 문장이 방패 모양으로 박혔다.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이 세운 파리 개선문을 본떠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했다. 전쟁 영웅들이 개선식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는 장식문은 고대 로마의 유습이다. 근대에 국가주의가 일어나면서 유럽 도시에는 이런 독립된 형태의 문들이 유행했다.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했다가 돌아온 개화파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이른바 친러, 친미 성향의 정동파를 부추겨 독립협회를 창립한다. 안경수(安駉壽, ?~1900)가 회장을 맡고 이완용이 위원장이 된다. 독립협회의 첫 사업이 바로 독립문을 세우는 일이었다.
독립문 바로 앞에는 두 개의 석주(石柱)가 어색하게 서 있다. 중국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迎恩門) 기둥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줄곧 중국을 사대(事大)해왔고 이 문으로 드나들던 중국 사신들은 그야말로 ‘칙사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1895년 2월 청일전쟁 막바지에 이 영은문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물론 총독 같은 위세를 떨쳤던 위안스카이도 도망치듯 조선을 떠난 뒤였고 청나라의 힘은 더 이상 조선에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는 고종이 스스로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중이어서 조선은 러시아 천하나 다름없었다. 이런 정국에서 굳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자축하는 기념물을 세웠던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고종을 등에 업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던 러시아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더 절박했던 게 아닐까.
문(門)은 경계를 넘어가는 구조물이다. 인간사 길흉화복이 드나드는 길목이자 시대정신의 표상이기도 하다. 독립문을 통과하면 번쩍 치켜든 오른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선 서재필 동상이 보인다. 1890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양의사가 된 그의 영어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서재필을 거꾸로 읽을 때의 발음과 같다. 그가 국민의 대변지를 기치로 창간한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한국 사회의 발전과 민중계몽에 큰 역할을 한 기념비적인 신문이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의 탄압을 받고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추방되고 만다. 갑신정변 때 좌절된 꿈이 또 한 번 꺾여버린 것이다. 체제가 지닌 한계를 몇몇 개인의 힘으로 극복하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다.
순국선열들의 위패가 봉안된 독립관과 3·1독립선언기념탑을 지난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현장이 바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다.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발길이 착잡하다. 100년이 넘은 오래된 감옥의 문턱에서 미셸 푸코를 떠올린다. 그가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Surveiller et punir: Naîssance de prison』에서 말한 것처럼 감옥은 권력 유지의 도구다. 감옥은 곧 처벌을 위한 건축물이다. 처벌이란 범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이다. 제국주의에 희생된 식민지 백성의 독립운동이 범죄가 되는가. 인류가 광기와 망령에 사로잡혔던 시절에 일제는 한반도를 강제 점령했다. 그때 정당한 형벌이라는 게 성립될 수 있었던가. 불행한 역사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그릇된 폭력 행사를 우선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강자의 이해타산이 가치판단 기준이었음은 물론이다.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곳에 붙잡혀온 독립지사들이 3·1운동 때만도 자그마치 3,000명이나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4만여 명이 구속 수감되었고 그 가운데 400여 명이 처형 혹은 옥사 등으로 순국했다. 그들은 무죄이며 역사는 위인으로 기린다. 그렇다면 감옥은 허상이 아니겠는가. 인간을 교화시키는 규율이 도리어 자유를 구속하는 비극적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곳을 찾는 이들 가운데 5퍼센트가량이 일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한국인들에게 자행한 만행의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합니다. 이곳은 한일 양국 국민들의 공동 역사교육장이지요.”
‘유관순 굴’이라고도 불리는 지하 감옥, 0.7평짜리 독방, 고문실로 안내한 서대문구 도시관리공단 김태동 씨가 벽관(壁棺) 앞에서 말했다. 벽관은 산 사람을 시체처럼 관 속에 구겨넣고 꼼짝도 못하게 세워두는 고문 기구다.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를 붙잡고 울었다는 사형수들. 하늘이 준 생명을 제국의 이름으로 처형했다. 해방되고 1992년에 독립공원으로 탈바꿈했지만, 그 이전인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기 전까지 이 ‘서울구치소’에는 감옥과 사형장의 기능이 존속됐다. 대한민국 헌법은 사형 제도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曺奉岩, 1898~1959), 정치깡패 이정재(李丁載, 1916~1961),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 저격범 문세광(文世光), 위장 귀순간첩 사건의 이수근, 인혁당 관련 인사 8명,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 김재규(金載圭, 1926~1980), 강력범 김대두 등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형장 교도관들은 정당한 집행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었겠지만 대개 살인의 악몽에 시달려 알코올중독자가 되거나 사직서를 내고 잠적하는 예도 많았다고 한다.
독립문에서 무악재로 이어지는 도로의 모습
한성과학고등학교에서 내려서면 도로에 도착하고 좌측편 횡단보도를 건너 인왕산 I'PARK아파트 입구에서 좌측방향 무학재방면으로 약 100m 진행후 우측편 나무계단으로 진입한다.
선답자의 후기글을 보면 일부 산객님들은 I'PARK아파트 경내를 지나 인왕사를 거쳐 인왕산으로 진행하는 산객들도 있었다.
인왕산 들머리지점에서 뒤돌아본 모습
무악재(모래재, 사현)
위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무악재는 안산(鞍山, 296m)과 인왕산(仁王山, 338m) 사이에 있으며, 의주가도(義州街道)인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안산과 인왕산은 화강암 산지이고, 무악재는 두 산 사이에 형성된 안부(鞍部)이다. 무악재는 여러 번에 걸쳐 깎여 고개가 점점 낮아졌다.
무악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는 모래재 또는 사현(沙峴)이라고 불렸다. 또 말안장 같은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고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렸다.
무악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초기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이 어린 아이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라고 하여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안산을 어머니의 산으로 삼아 무악(毋岳)이라 하고,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별칭으로 무학재 또는 무학현이라고도 한다. 이는 이성계가 하륜(河崙)의 건의에 따라 무악의 남쪽을 도읍으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일부에서 명당이 좁다고 반대를 하였고, 결국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의견에 따라 북악산 밑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조는 부왕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의 역사를 시작하고, 이 고개에 올라서서 명릉을 바라보며 고개의 이름을 추모현(追慕峴)이라고 하였다. 명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안에 자리잡고 있다.
무악의 정상에는 조선시대의 봉화터가 두 군데 있다. 이곳의 봉화대는 평안도·황해도는 물론, 부산·회령까지 급보를 전하였다. 무악재는 조선시대에 의주와 통하는 주요 교통로였고, 지금도 서울 시내와 서대문 외곽을 연결하는 주요 고개이다.
인왕산 들머리지점
무학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에 있는 고개. 조선 태조 3년(1394)에 태조가 도읍터를 물색하기 위하여 몸소 무학 대사를 데리고 와서 조사하였다 하여 ‘무학재’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한양으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인왕산 들머리 이정표
인왕산 들머리에 설치되어 있는 인왕산 안내도
인왕산 들머리 나무계단의 모습
나무계단을 이용하여 올라서면 소공원이 나오고 계속하여 진행하면 정자와 약수터가 나온다.
인왕산 들머리 이정표
계속되는 나무계단의 모습
장승이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
약수터 쉼터의 모습
약수터의 모습
개나리꽃과 벚꽃의 조화
인왕정 갈림길의 모습
직진방향은 연신내, 무학재 하늘다리방면이고 인왕산 정상방향은 우측방향 인왕정방면으로 올라서야 한다.
인왕정 갈림길 이정표
인왕정으로 이어지는 나무계단의 모습
인왕사 갈림길의 모습
인왕사 갈림길 이정표
인왕사(仁旺寺)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68,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일로18가길 9-6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경복궁을 수호하는 호국도량(護國道場)으로서 인왕사(仁旺寺)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 박선묵이 선암정사(禪巖精舍, 현 본원정사)를 세우면서 이 절을 중창하였다. 1914년에 탄옹이 인근에 대원암(大願庵)을 세웠고, 1924년에는 자인이 안일암(安逸庵)을 지었다. 이어 1927년에는 춘담이 극락전을 세우고 1930년에는 묘법이 치성당을 신축하는 등 1930년경에 이르면 10여 개의 암자가 모이며 군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1942년에 분리된 여러 개의 암자를 통합하여 다시 ‘인왕사’라 칭하고 봉은사(奉恩寺)의 말사로 등록하였다.
현재 5개 종단의 11개 사암이 ‘인왕사’라는 한 명칭의 사찰 아래서 공존하고 있다. 각 암자마다 종단이 다르고 주지가 따로 있지만, 4년에 한 번씩 대표역할을 하는 총주지를 선출하여 절을 운영하고 있다. 인왕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본원정사(本願精舍)는 대웅전과 요사, 유물관인 심우장(尋牛莊) 등의 건물과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주요 법회와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조선 초에 호국도량으로 창건된 단일 사찰이었지만, 근대기에 들어와 여러 개의 암자가 군락을 이루며 ‘인왕사’라는 하나의 사찰로 공존해 오고 있다.
인왕정의 모습
인왕정에는 등산객들이 비를 피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인왕산 방향은 좌측편은 암릉지대라서 금지구간이며 우측편 등로길로 진행하면 해골바위 앞에 도착한다.
산수유 전망대의 모습
개나리꽃이 만발한 등로길 진행
해골바위, 선바위 갈림길의 모습
산수유 전망대 이정표
해골바위 위에서 바라본 조망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선바위와 바로 아래에 있는 인왕사의 모습
선바위(禪巖)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형상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 ‘禪(선)’자를 따서 선바위[禪巖]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이것은 인간이 죽어서 석불(石佛)이 되었다는 인간의 화신으로 설화되고 있으며, 여기에 빌면 소원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자식 없는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정성을 드리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임’이라 하며, 이러한 바위를 ‘붙임바위’라고도 한다.
일제가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선바위 곁으로 옮기게 한 뒤로 더욱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밀착되게 되었다. 국사당은 무신당으로서 굿을 행하는 곳이니 바로 옆에 있는 선바위와 복합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선바위는 전국적으로 보이는 암석숭배의 일종이었겠으나 이것이 전설화되고 무속신앙과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주요지가 된 듯하다.
인왕사(仁旺寺)
인왕사(仁旺寺)는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전통사찰이다. 서울 중심에서 가장 가깝고 손쉽게 오를 수 있는 산. 그 중턱에 수많은 기자신앙과 토속신앙의 상징이 어우러진 선바위와 호국도량 인왕사가 있다.
풍수상으로 조산인 북한산에서 주산인 북안산에 연결되고 낙산이 좌청룡이며, 인왕산이 우백호가 되는 산. 동쪽 기슭은 아늑하고 풍치가 빼어나 장안 제일의 명승지가 되며, 북쪽은 무계동(武溪洞)이라 불리워 중국의 무릉도원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인왕산 호랑이하면 서울 시민 중 모르는 이들이 없으며, 서울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 하면 모르는 이 없는 산이다.
조선 초기 태조가 경복궁을 수호하는 호국도량으로 창건한 인왕사는 많은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는 서울 사대문 안에 자리한 도량이었다. 인왕사는 선바위ㆍ국사당으로 불리는 무불습합의 신앙지와 함께 특이한 가람을 구성하고있다.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
무당 굿터의 모습
인왕산 해골바위에서 좌측방향으로 올라서니 여기저기에 무속인 굿터가 나오고 등로길이 없다는 문구를 보고는 아래로 내려와 진행한다.
인왕사 갈림길의 모습
무속인 굿터에서 내려서면 인왕사 갈림길 앞에 도착하고 인왕산 방향은 좌측방향으로 진행한다.
인왕사 갈림길 이정표
인왕산약수터 갈림길의 모습
인왕산약수터 갈림길 이정표
인왕산정상 갈림길의 모습
인왕산약수터 갈림길에서 진행하면 성곽앞에 도착하고 인왕산정상은 우측편으로 진행하다가 성곽을 통과하여 성곽따라 올라서면 정상부에 도착할수 있다.
인왕산정상 갈림길 이정표
무악동 갈림길의 모습
성곽앞에서 우측편으로 내려서면 나무계단 내림길에 두갈래 갈림길이 나오고 직진 내림길 버리고 좌측방향으로 성곽을 통과 후 다시 좌측편 성곽 따라 오르면 된다.
무악동 갈림길 이정표
성곽 통과 후 바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
성곽따라 돌계단으로 진행
철계단 통과
성곽따라 돌계단을 올라서면 좌측편으로 군부대가 있어 출입금지구간이고 우측편 철계단을 올라 다시 내려섰다가 한차례 밀어 올리면 인왕산 정상에 도착한다.
현위치 A5 이정목의 모습
현위치 A5 이정목
현위치 A5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는곳에서 바라본 인왕산정상
인왕산 정상부는 구름에 갈려 정상부를 볼수가 없다. 그리고 가랑비가 내리고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와 보온에 유의하면서 산행을 한다.
현위치 A5 이정목 뒤편 암릉바위의 모습
사직공원 삼거리의 모습
사직공원 삼거리 이정표
사직공원 삼거리 이정표
사직공원 삼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경계점
사직공원 삼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목(현위치 A4)
철계단 오름길 진행
사직공원 삼거리를 통과하여 오르면 두갈래 등로길이 나온다. 하나는 성곽길 따라 오르는 등로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철계단으로 오르는 등로길이다. 성곽 등로길에는 계단이 급하여 위험하여 우회하도록 조치하고 있어 철계단으로 진행란다.
창의(자하)문 삼거리의 모습
철계단으로 올라서면 창의(자하)문 삼거리에 도착하고 바로 앞에 보이는곳이 인왕산 정상이다. 북악산으로 갈려면 이 지점(창의(자하)문 삼거리)에서 우측편 로프가 설치된곳으로 진행하면 된다.
정상부에 도착하니 중학교들이 역사탐방을 위해 인왕산 정상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창의(자하)문 삼거리 이정표
인왕산(仁王山, 해발 338.2m)
인왕산은 산 전체에 화강암으로 된 암반이 노출되어 있으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곳곳에 솟아 있어 조선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왔다. 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중이 장삼을 입은 듯한 선바위(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는 예로부터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잘 이루어졌다고 하여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무신당인 국사당을 선바위 옆으로 옮긴 뒤부터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되었으며,
주위에 많은 무신당이 생겨 지금도 굿이 성행하고 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서울의 성곽이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는 자하문·명륜동·동대문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사직동·홍제동까지 이어진다.
군사적인 이유로 한때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사직공원·청원 아파트·무악재길 등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다. 인왕산에는 태조, 무학대사의 기도터와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서울 외곽을 쌓았던 성곽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 이름마저 왕(王)자를 쓰지 못하고‘인왕(仁旺)’으로 고쳤다가, 1995년에 와서야‘인왕(仁王)’이란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정상에 오르면 경복궁을 중심으로 인왕산과 함께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내사산인 낙산, 남산, 백악산이 펼쳐진다. 정상 아래편에 겸재의‘인왕제색도’에 나오는 매바위와 치마바위가 장관을 이룬다.
인왕산(仁王山, 해발 338.2m)
인왕산(仁王山, 仁旺山)은 서울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산이며 전체 면적은 1,086,696.50m2이다.
바위산이기 때문에 조망도 좋고 기차바위·치마바위·매바위·범바위·이슬바위·모자바위·선바위·지렁이바위 등이 저마다 기이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다. 산수화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가 유명하다.
서울 서쪽, 종로구와 서대문구 사이에 있는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곳곳에 약수가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시민이 소풍 장소로 즐겨 찾는 곳이다
인왕산(仁王山, 해발 338.2m) 정상목에서 인증샷
서울시 종로구 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산이며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우백호다.
한양도성의 산으로 북악산이 가장 높으며 인왕산과는 약 3.8m 차이가 난다.
한자 표기는 전자와 후자 모두 쓰인다. 후자는 일제가 덴노를 기념하기 위해 억지로 바꾸었다는 설이 있으나 일본어 잔재론 문서에도 있다시피 낭설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잡식남들의 히든카드 M16 E34(160905)에서 인왕산에 대한 설명 중 '일제는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 仁王山이라는 우리의 이름 대신 仁旺山을 썼다. 1995년 원래 이름을 되찾은 인왕산(仁王山)' 라고 설명해 두었다. 심지어 인터넷 기사에도 버젓이 올라온다.
옛 기록 통틀어 仁旺山이라는 표기가 영조실록에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이 그게 다다. 같은 영조실록이라 해도 딱 한 번 仁旺山이라 표기된 걸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仁王山으로 표기되어있다. 다른 왕의 실록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고종실록에도 마찬가지로 딱 한 번 仁旺山이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이는 기록 자체에 신뢰성의 문제가 있으니 논외로 한다.
인왕산(仁王山, 해발 338.2m) 정상목에서 인증샷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누상동·사직동과 서대문구 현저동·홍제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되었다.
인왕산(仁王山, 해발 338.2m) 지역석의 모습
풍수지리설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한양의 도읍을 정할 때 정도전의 뜻대로 주산을 북악산으로 하지 않고 무학대사가 말한 인왕산(仁王山)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이따금 하게 된다. 인왕산 서편에 궁궐이 들어섰다면 '어진 임금'이라는 인왕산의 이름처럼 조선도 개국 초기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기보다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경복궁 왼쪽에 자리한 인왕산은 예로부터 황제가 태어날 명당이 있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돌았다. 도성의 풍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풍경, 한양을 대표할 풍경은 모두 이곳 인왕산 주변을 맴돌고 있다. 특히 필운대(弼雲臺), 청풍계(淸風溪), 반송지(盤松池), 세검정(洗劍亭)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국도팔영(國都八詠)'에 꼽혀 한양 명승지의 절반을 인왕산 자락이 차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왕산 주위로 아파트가 병풍처럼 들어서 땅의 기운을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인왕산(仁王山, 해발 338.2m)에 설치되어 있는 종로구 경계점
인왕산 삼각점(서울 467 1994 복구)
인왕산은 서울시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 경계에 있는 산이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鎭山)중 하나.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北岳)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조선초에 도성(都城)세울 때, 북악산을 主山, 南山을 案山, 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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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정상에서 바라본 자하문방향의 모습
인왕산에는 태조, 무학대사의 기도터와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서울 외곽을 쌓았던 성곽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 이름마저 왕(王)자를 쓰지 못하고‘인왕(仁旺)’으로 고쳤다가, 1995년에 와서야‘인왕(仁王)’이란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는 사직터널을 출발 기점으로 성곽터와 정상을 지나 부암동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청와대 앞길과 연결되어 있어 여유가 된다면 팔판로, 효자로, 경복궁까지 걸어보는 것도 좋다. 사직공원 뒤에서 본격적인 등산로를 오르는 길목에는 황학정이 있다. 조선시대 궁술을 연습하던 터였지만 일제 때 경희궁 안에 있던 황학정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숲으로 둘러싸인 너른 터를 조팝꽃 군락이 눈부시게 장식하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경복궁을 중심으로 인왕산과 함께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내사산인 낙산, 남산, 백악산이 펼쳐진다. 정상 아래편에 겸재의‘인왕제색도’에 나오는 매바위와 치마바위가 장관을 이룬다. 사직공원에서 삼거리를 지나 오르는 코스에서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을 즐기는 직장인들도 자주 보인다. 향긋한 내음이 풍기는 나무 계단을 지나 범바위에 오르면 동쪽으로 청와대 전경이 보인다. 종주 코스로 잡으려면 정상을 지나 홍제동 채석장이나 부암동 하림각, 자하문 방면으로 하산하면 된다.
성곽 따라 걷는 옛길
성곽길은 오르는 길 자체보다도 뒤쪽 전망을 쉬엄쉬엄 돌아보며 걷기 좋은 코스다. 창의문을 지나 성곽 안쪽 길을 따라 쭉 걷다가 돌계단을 오르면 성곽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성곽 밖 길은 200m 정도 이어지는데 태조·세종·숙종 때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성돌들을 볼 수 있다. 성돌에 낀 거무스름한 이끼가 서울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다시 성 안쪽 길에 들어서서 숨을 몰아쉬며 계단길을 오르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사방팔방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인왕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인왕산의 미끈한 바위 표면 위로 탕춘대성이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보강된 성곽으로 북한산성과 연결된다. 정상에 올라 삿갓바위 근처에 서면 서울을 둘러싼 산들과 한강 물줄기 사이로 빽빽하게 들어찬 빌딩숲이 보인다. 정상을 지나 청운동으로 내려가는 길의 성곽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성벽 원형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서대문구의 홍제동과 종로구의 무악동, 누상동, 옥인동, 부암동에 걸쳐있는 인왕산(仁王山)은 정상의 높이가 338.2미터이다. 북한산에서 볼 때, 북악산을 중심으로 좌측에 낙산, 우측에 인왕산이 있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룬다. 특이한 형태의 암석과 암벽의 웅대함이 등산객의 감탄을 자아내며, 정상에 서면 서울 중심가의 빌딩들과 청와대 부근의 녹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기차바위 갈림길의 모습
성곽 밖으로 나가면 약 260m 거리에 기차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한번도 다녀온적이 없이 한번 가볼까 했는데 비가 내리고 미끄러워 다음을 기약하며 직진 계단으로 내려서 진행한다.
기차바위 갈림길 이정표
성곽 내림길에서 바라본 북악산의 모습
수성동계곡 갈림길의 모습
수성동계곡 갈림길 이정표
수성동계곡 갈림길 현위치 A1 이정목
성곽 내림길에서 바라본 북악산
성곽 등로길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
성곽 등로길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
인왕산 날머리지점의 모습
북악산방향은 도로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창의(자하)문으로 이어진다.
인왕산 날머리지점 이정표
인왕산 날머리지점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한 등로길 통과
정자가 있는곳 통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의 모습
위치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산 4 일대
청운동길을 올라 부암동과 청운동의 경계에서 멈춘다. 머리 위로 고가가 지난다. 인왕산길과 북악산길을 잇는 아스팔트다. 옛날에는 인왕산 줄기가 그 길을 따라 창의문과 잇댔겠지. 그리고 다시 북악산으로 이어졌으려나. 서울성곽도 나란했겠지. 아주 먼 시절이다. 그럼에도 부암동과 청운동은 서울에서 가장 고전적인 동네다. 아련한 그리움을 품은 마을이라지. 대변하듯 저만치에 ‘클럽 에스프레소’다. 부암동의 오래된 카페다. 진한 에스프레소향이 걸음을 부른다. 시인의 언덕 앞에서 잠깐 망설인다. 시(詩)와 커피다.
걸음을 돌려 계단을 오른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최규식 동상을 지나 왼쪽으로 첫 번째 길이 난다. 너른 아스팔트를 따라 청운공원의 진입광장에 이른다. 하지만 부암동을 앞둔 고가 아래 두 번째 길을 택하는 것이 낫다. 첫 번째 길은 청운공원과 시인의 언덕 가운데를 가른다. 두 번째 길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올라 청운공원으로 내려가는 행로가 자연스레 이어진다. 물처럼 흐르는 동선이다. 산책에 알맞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오르는 콘크리트 계단은 매혹적이다. 곱게 써내려간 붓글씨는 시의 운율처럼 걸음을 이끈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한눈에 들어온다. 사뿐히 즈려밟고 내려설 이유가 없겠지. 여운과 은유가 없는 시어(詩語)라니. 계단을 올라갈 때는 숨은 그림처럼 한 구절씩 차례로 고개를 내민다. 한 걸음에 한 줄의 시구(詩句)다. 하지만 거꾸로 읽어가는 시다. 그것이 또한 묘미다. 몇 계단 올라서 한 편의 시가 끝나면, 그제야 지나온 걸음을 돌아본다. 계단을 걷는 한 편의 시 위로 긴 그림자가 발자국처럼 남는다.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다던 「자화상」 같은 풍경이다. 시인의 길에서는 시처럼 걸어도 나쁘지 않겠지.
윤동주 시인의 언덕 표지석
일제 강점기 민족의 고통을 문학으로 달래준 윤동주 시인의 뜻을 기리며 만든 동산이다.
윤동주시인의 "서시" 시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반드시 여명은 오리라 믿고 써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남아 있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윤동주를 ‘일제 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생전에 그는 유명 시인도 아니었고 독립투쟁의 목소리를 높이던 열혈청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100여 편의 시는 진실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시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두에 붙여진 작품으로, ‘서시(序詩)’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집 전체의 내용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시는 현실의 어둠과 괴로움 속에서 자기의 양심을 외롭게 지키며 맑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한 젊은 지식인의 모습을 간결한 언어와 상징어들을 통해 보여 준 작품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창의문고개
자하(창의)문고개는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개 마루턱에 자하문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자하문의 정식 이름이 창의문이므로 창의문고개라고도 하였다. 자하문은 청운동 막바지에 있는 서울성곽의 북소문으로서, 자하골(청운동)에 있으므로 자하문이라 하였다. 태조 5년(1396) 성을 쌓을 때 건립되었는데, 다락에 나무로 만든 닭을 걸어 놓았다. 풍수설에 이 문 밖의 지형이 지네의 형상이므로, 그 기세를 억누르기 위해서 지네와 상극인 닭을 만들어 걸었다 한다.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李貴 등이 이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문루에는 그때 반정공신의 명단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
위치 : 서울 종로구 청운동 산 1-1
故 최규식 경무관은 1932년 9월 9일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으며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경찰관이 되었으며 1967년 10월 서울 종로경찰서 서장으로 부임. 최규식 경무관이 종로 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이던 1968년 1월 21일, 게릴라전 특수 훈련을 받은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124군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폭파와 정부 요인 암살에 관한 지령을 받고 청와대를 기습하는, 일명 1.21 사건(김신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기관 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군사 분계선(DMZ)을 넘어 서울까지 숨어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사 많은데, 특히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 지명이 환원되었다. 군사적인 이유로 통제되었다가 1993년 부터 개방되었다
최규식 서장이 이를 뿌리치고 현장에 배치되어 있던 8명의 경찰관들에게 이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 하자 뒤따라 오던 김신조 일당들이 외투 속에 감추고 있던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 안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 중에도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최규식 서장은 교전 중에 가슴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청와대를 사수하라”고 외치며 계속 현지
에서 배치 경찰관을 지휘하였으며, 쓰러지면서도 간첩 1명을 사살하는 등 필사의 저지로 뒤따르던 간첩들을 분산 도주하게 하여 결국 이들의 청와대 기습을 완전 저지하였습니다.
최규식 서장은 즉시 경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사망했으며, 군경은 31일까지 소탕작전을 벌여 28명 사살, 1명(김신조)을 생포 하였으며, 2명은 북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자백했고 도주한 1명은 박재경 북한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훗날 밝혀졌다. 북악산 호경암 등에는 당시 총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규식 경무관은 특정지역을 관할하는 치안 책임자로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투철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으로 임무를 완수하여 정부는 1968년 1월 25일 경무관으로 특진을 추서하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러한 까닭에 무장 공비의 침투를 몸을 던져 저지한 곳에 표석을 마련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이 바라보이는 이곳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창의문) 고개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과 추모비를 세워 드높은 충절을 기리고 있다.
경찰박물관에서 소장·전시 중인 '최규식 경무관의 순직 때 근무복'은 웃옷 오른쪽과 왼쪽 가슴 등 여러 곳에 총탄 자국이 뚜렷하고 왼쪽 팔이 찢겨진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향토 예비군이 창설되는 등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현장 경찰의 표상” 故 정종수 경사
당시 무장공비를 저지하였던 8명중 2명이 목숨을 일었는데, 한 명은 최규식 경무관 다른 한 명은 정종수 경사다. 정종수 경사는 1935년 7월 17일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60년 경찰에 투신하여 서울종로경찰서에서 형사과 재직 중 1.21사태 당시 최규식 서장과 함께 무장공비와 교전 중 순직하였다. 이에 정부는 1계급 특진시켜 경사로 추서하고 화랑 무공훈장을 수였다.
아산시에 있는 경찰교육원은 2016년 9월 20일, 故 정종수 경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강의동 정의관 501호를 '정종수홀'로 명명하고 청동 부조상을 만들어 제막식을 가졌다.
정의관 501호는 경찰청 주관 워크숍, 특강 등 교육 빈도가 가장 많은 강의실로 고인의 업적을 가르치는 정규수업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고인의 장남 창한(56)씨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역사 속에 잊히는 것 같아 소외감을 느꼈다. 아버지를 잊지 않고 이런 행사를 마련해 주어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다. 유가족으로써 감동스럽고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자하(창의)문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18 (부암동)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제 구실을 못하였기에 이 문이 그 문의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는 자하가 많이 끼였는가 서울 내기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은 4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등치로는 건축면적 49.587m²(15평) 안팎의 조그마하지만 매우 단단하고 굳건한 기풍을 풍기는 건축물이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 놓은 것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 이귀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자하(창의)문(보물 제1881호)
자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일명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한다.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로는 폐쇄되어 일반적인 출입은 금지되었고 다만 왕명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하였다.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문은 세웠으나 수백년간 사용하지 않았고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처럼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건물의 건축적 성격을 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석축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작은 규모로 쌓고 그 위에 세운 단층 문루이다. 가구(架構) 방식은 평주(平柱)의 주두(柱頭) 위에 바로 대들보를 얹고 이 위에 다시 화반형(華盤形) 부재를 놓아 마룻보와 중도리의 짜임을 받쳤다. 마룻보 위에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뜬창방·장여·도리로 짜여진 마룻도리를 받고 있다. 천장은 서까래를 모두 노출시킨 연등천장[椽背天障]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 물매는 가파르지 않다.
마루마다 회반죽을 바르고 취두[鷲頭 : 매 머리모양의 장식]·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열하고 추녀 끝의 사래[蛇羅]에는 토수(吐首 : 龍頭나 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현재 문 서쪽으로 도로가 나 있어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으므로 이 문은 여전히 닫혀 있다.
자하(창의)문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돌로 쌓은 홍예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으로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이 있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탐방 안내도
탐방사간 및 절차간소화 안내
예전에 북악산을 오르려면 신분증이 필요했는데 2019년 4월5일(금)부터 탐방 절차 간소화로 인하여
신분확인 절차 없이 북악산을 탐방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상시개방이 되며 탐방시간도 확대 개편되었다.
겨울(11~2월 : 09시~17시),
봄, 가을(3~4월, 9~10 : 07시~18시),
여름(5~8 월: 07시~19시)
북악산 성곽의 모습
돌고래 쉼터의 모습
돌고래 쉼터 안내판
돌고래 쉼터의 설치되어 있는 북악의 식생 안내판
백악 쉼터의 모습
백악 쉼터 안내판
백악 쉼터 통과 후 뒤돌아본 모습
북악산(北岳山<백악산 白岳山>, 해발 342m)
북안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해발 338m), 남쪽의 남산(南山, 해발 262m), 동쪽의 낙산(駱山, 해발 125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일컬어졌다.
남산에 대칭하여 북악이라 칭했다. 조선시대까지 백악산(白岳山), 면악산(面岳山), 공극산(拱極山), 북악산(北岳山) 등으로 불렸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악 또는 백악산으로 불렸으며 일부 북악이라고 불렸다.
북악산은 북한산의 남쪽 지맥의 한 봉우리에 해당한다. 산경의 흐름을 보면 한북정맥(漢北正脈)의 끝자락인 북한산 보현봉에서 서남 방향으로 형제봉을 거쳐 북악터널 위의 보토현(補土峴)으로 이어진다. 이어 표고 328m의 봉우리와 팔각정 휴게소 앞 능선을 따라 북악 뒤편에 구준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울의 부주산(副主山)인 응봉(鷹峰)으로 이어져 경복궁의 배산인 북악에 다다른다.
북악산에서 청계천이 발원하는데, 2005년 11월종로구청에서 조사한 청계천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고개에 있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에서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있는 약수터이며 서울 성곽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 성은 1395년(태조 4)에 궁궐이 낙성된 뒤 같은 해 1월 기공식과 함께 착공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은 성저(城底)를 측정(5만 9500자)하고 이를 97구로 나누어 각 1구를 약 600자로 하였으며, 각 구마다 천자문(千字文)의 글자로 번호를 붙였다.
다시 말하면 북악산의 정상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일주하면서 천(天)ㆍ지(地)ㆍ현(玄)ㆍ황(黃)·……의 순서로 글자를 붙여나가다가 95번째 글자인 조(弔)자에 이르러 북악산에 도달하도록 하였다. 현재도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북악산 기슭은 왕궁 및 관청과 가깝고, 또 경치가 좋았던 관계로 왕족과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별서가 많았다.
그리고 많은 문인과 화가들은 이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그림과 시문으로 남겼고 숙정문 북서쪽 약 400m 지점에는 촛대바위가 있는데, 일제 때 이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었고, 광복 후 이 바위의 쇠말뚝을 제거하고 우리 민족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며 이름을 ‘촛대바위’라 정하였다. 현재는 쇠말뚝을 제거한 부분이 콘크리트 기중으로 마감되어 있다.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鞍部 :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곳)에는 서울 4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 일명 자하문)이 남아 있다. 창의문에서 정릉의 아리랑고개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는 창의문, 팔각정, 풀장 등을 연결하는 관광도로로 울창한 숲과 서울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조망이 좋은 경승지이다. 북악산의 남동쪽 산기슭에는 삼청공원(三淸公園)이 있고, 동쪽에는 숙정문(肅靖門)이 있으며 숙정문은 조선의 도성 4대문 가운데 정북에 위치한 문이며 속칭 북문(北門)이다.
이 문은 태조 5(1396)년 백악산의 동쪽 고갯마루에 세웠는데, 도성 북쪽 방향을 출입할 때 이용하였다. 1968년 1ㆍ21사태 이후 북악산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던 것이, 서울성곽 백악산(북악산) 일원 전면개방계획에 따라 일차적으로 2006년 4월 1일숙정문과 함께 삼청터널 북쪽 홍련사(紅蓮寺)에서 도성(서울 성곽)을 따라 촛대바위까지 약 1.1㎞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북악산(北岳山<백악산 白岳山>, 해발 342m )
기반암은 화강암으로, 仁王山, 駱山, 南山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 이들 산지 능선을 연결한 옛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에는 서울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이 남아있다. 북악산을 노송이 울창한 경승지를 이루고 그 남쪽 기슭에 청화대가 있으며 창의문에서부터 정릉(貞陵) 입구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가 북악산 주봉 북쪽 사면을 끼고 돌면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달리고, 남동쪽 산기슭에는 삼청(三淸) 공원이 있다.
북악산(北岳山)은 서울의 경북궁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낙산, 남산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기반암은 화강암이며, 높이는 약 342m이다.
북악산(北岳山<백악산 白岳山>, 해발 342m) 정상석에서 인증샷
서울의 경복궁 북쪽에 있는 산. 서울 분지를 둘러싸는 자연 요새의 하나로 기반암은 화강암이며, 이 산을 중심으로 서울 북쪽의 성벽이 축조되었다. 높이는 342미터. 광화문 광장에서 본 북악산. 왼쪽 앞의 봉우리가 북악산이며, 중간의 다소 멀리 보이는 돌산은 북한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보현봉이다.
종로구 부암동, 삼청동, 혜화동에서 성북구 돈암동, 정릉동, 성북동 사이에 걸쳐있는 산이며 높이는 해발 342m. 근처의 아리랑고개나 미아리고개와도 묘하게 연결되고 산 북쪽에는 평창동이 있다. 그리고 한양도성 성문 중 가장 인지도가 낮은 숙정문도 이 산에 있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중턱 정도까지는 이미 개발되어 아스팔트로 뒤덮혔고 아파트도 잔뜩 있다. 정확히는 아리랑고개 사거리부터 성북구민회관 까지의 구간과 삼선동일대가 해당. 그래도 덕분에 산책 시설이나 운동시설이 잘 되어있어 주변 주민들이 운동할 때 자주 사용한다. 단, 중간중간 산책로가 끊긴 점이 흠. 산책로가 끊겨서 당황하다가 저 멀리에 길이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외에도 골프장 등 시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탐방코스는 창의문에서 시작해서 숙정문으로 끝나는 서울성곽 계단길인데, 2019년 4월 5일 이후 상시 개방으로 변경하면서 신분확인 절차가 생략되어 부담없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북악산(北岳山<백악산 白岳山>, 해발 342m) 정상석에서 인증샷
청와대 후산(後山)을 북악산(北岳山) 이라고 한다. 경복궁 북쪽에 있는 산이며 이산 본래 명(名)은 백악산(白岳山) 인데 일제가 개악을 한 산 이름인것이다. 북(北)자는 북녁북자도 되지만 도망할 북. 배반할 북. 패하여달아날 배자 인것입니다.
본 북악산(北岳) 을 해석해보면 배반할 산. 도망할 산. 패하여 달아날 산으로 백성을 배반하고 패망하여 달아날 산인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고 한스러운 이름인것이다.
본래는 백악산(白岳山, 근거:고산자 대동여지도) 이였다. 백(白)자는 흰백자도 되지만 깨끗할 백, 밝을 백 청백할 백, 고할 백 자 이다. 백악을 해석해본다면 밝고 청결하고 고귀한 산인것이다. 이러한 고귀한 산지명을 백성을 배반하고 패하여 도망할 산으로 부르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시간을 다투어 백악산(白岳)으로 바로잡아줘 신성한 본래의 지명으로 바로 잡아줘서 지령(地靈)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곳에 올림니다.
북악산 옛 모습으로 복원 표지석
1968년 1월21일 사태 소나무
북한 124군부대 김신조 등 31명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타운(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오앙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현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1968년 1월21일 사태 소나무 안내판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안내판
각자성석이란 글자가 새겨진 성벽 돌을 의미합니다. 성을 처음 쌓거나 보수하고 난뒤 공사에 참여했던 책임자의 이름을 적어넣은 것이며, 요즘 말로 하면 공사실명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사 후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고 공사 책임자들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했던 것이다.
북악산 탐방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각자성석은 2곳이 있는데, 청운대 근처 탐방로를 살펴 보면 영조때와 순조때 여장을 수리한 후 각자를 새겨넣은 성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청운대 안내판
청운대의 모습
청운대(靑雲臺, 해발 293m)
청운대는 북악산 정상 동쪽에 있는 높이 293m의 봉우리로서 정상석(靑雲臺 해발 293m)과 벤취가 설치된 쉼터로 조망권이 있는 개활지 공터이다
청운대(靑雲臺, 해발 293m) 표지석에서 셀카
성곽 밖으로 진행
청운대에서 조금 진행하면 성곽 안에서 밖으로 나가 진행 하도록 유도를 해 두고 있고 나묵 ㅖ단을 내려 성곽 밖으로 진행하다가 다시 성곽안으로 진행한다.
성곽안으로 진입하는 통로
서울 한양 도성 및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 안내도
성곽안으로 진입하는 통로 안에 설치되어 있는 장승과 이정표
넓은 쉼터 통과
백악 곡성 갈림길 이정표
숙정문은 직진으로 진행하면 되지만 좌측편 백악곡성이 무엇인지 몰라 몰라가 본다. 그리고 다시 복귀하여 숙정문 방향으로 진행한다.
곡성(曲城)
백악 곡성(曲城)의 모습
백악 곡성(曲城)에서 바라본 지나온 북악산, 인왕산 안산의 모습
백악 곡성(曲城)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모습
백악 곡성(曲城)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남산의 모습
백악 촛대바위 갈림길의 모습
백악 촛대바위 갈림길 이정표
촛대바워
숙정문(肅靖門)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北大門)으로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의 예를 숭상한다는 뜻과 대비하여 숙정문은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태종13년(1413년)에는 풍수학자가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부터가 지난번에 왔었던 길이다. 촛대바위가 촛대를 닮지 않았다
숙정문(
조선
숙정문(
본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하였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숙청문(肅淸門)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창의문(彰義門, 일명 紫霞門)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崇禮門: 南大門)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俗說)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이 문이 음방(陰方: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 때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고 ‘肅靖門(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정문으로 개칭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523년(중종 18) 『중종실록』의 기사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어 숙정문이라 호칭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531년(중종 26) 북정문(北靖門), 1587년(선조 20) 숙정문(肅靜門)으로도 표기된 것을 볼 때,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숙정문(肅靖門)’으로 명명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다락 없는 암문(暗門)인 것이 특색이다.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을 이에 대신해 흔히 북문이라고 하였다.
숙정문(
숙정문(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북쪽의 대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三淸洞)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다.
한양도성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숙정문(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1]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월 21일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나무계단 내림길의 모습
숙정문을 내려서면 나무계단이 나오고 잠시후 숙정문 안내소에 도착한다. 창의문에서 받은 표찰을 반납하고는 사거리 좌측편으로 진행한다.
숙정문 안내소 안내판
계속되는 나무계단의 모습
숙정문 안내소의 모습
스카이웨이 팔각정 갈림길의 모습
국민대방향은 좌측방향으로 진행 하다가 성북천 발원지 앞 삼거리에서 호경암방면으로 진행하면 된다. 이 구간은 김신조 루트로 일반인들 한테 개방된것이 얼마되지 않는곳이다.
숙정문 안내소앞 이정표
북악산 개방 안내
북악 하늘길 등산로 안내도
두갈래 등로길의 모습
숙정문 안내소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두갈래 나무계단 등로길이 나오고 어느곳으로 진행하여도 무방한 등로길이다.
삼청각 쉼터 통과
두갈래 등로길 합류지점의 모습
북악산의 유래
1394년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남경(南京)인 한양(漢陽)>의 옛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그곳을 새로운 수도의 터로 내정하고 개경으로 돌아와 궁궐 조성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395년 9월 대체적인 공사가 마무리되어 조선 왕조 최초의 궁궐인 경복궁(景福宮)이 창건된 것인데, 당시 규모는 내전 영역 173칸, 외전 영역 192칸, 궐내각사와 회랑 등 기타 건물 390칸을 합하여 전체 755칸이었다.
경복궁(景福宮)이란 명칭은 큰 복을 누리며 번성하라는 뜻으로서,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인데, 시경(詩經) 기취(旣醉)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경복궁(景福宮)의 어원
경(景)의 상형은 <日 + 京>로서, <햇빛(日)이 좋고 큰(京) 것>을 뜻하며, 르완다어 <kira (to get well, saved, rich) + ungura (to cause to gain, make profitable)>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햇빛이 풍부하고 유익한 것을 의미한다. 京은 르완다어 kira + unga (to join)에서 유래
한양 즉 서울은 외사산(外四山)인 북한산, 관악산, 아차산, 덕양산이 크게 감싸고, 내사산으로 주산(主山)인 북쪽 백악(白岳; 342m)과 안산(案山)인 남쪽 목멱(木覓; 262m) 그리고 동쪽 타락(酡酪;125m)과 서쪽 인왕(仁王; 338m)이 감싸안은 풍수의 명당이다.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은 <백악산> 즉, 현재의 <북악산(北岳山)> 남쪽에서 서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다. 그런데, 풍수적으로 보면, 경복궁은 주산인 <북악산(北岳山)>이 단봉으로서 고립된 느낌을 주며, 인왕산이나 목멱산에 비하여 높이는 약간 높지만 산세는 오려 작은 것이고, 좌청룡인 동쪽의 낙산이 빈약하고 허하며, 명당수가 거의 없는 문제점이 있다.
명당수 문제는 인공수로와 경회루 그리고 청계천 개설 등으로 다소 비보하여 해결을 보았지만, 낙산의 좌청룡이 빈약하고 인왕산의 우백호가 너무 강한 것은 조선 518년 역사에서 두고 두고 큰 우환거리였으니, 적장자 왕위 상속이 거의 이루어 지지 못하였다. 또한,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었지만, 남산과 더불어 조선 초기부터 북악산으로 불리웠으니, 북과남의 의미는 원래 좋은 것이 아니다.
북악산(北岳山)의 어원.
북(北)의 갑골문 상형은 匕人+匕人로서, 칼을 든 두 사람이 등지고 서있는 모습인 것이니, 고기나 음식을 조리하는 것과 배반하여 죽이고 도주하는 것의 2가지 뜻이 있는 것이다. 한자 북(北)은 르완다어 vuga (to mix food)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이 있는 방향을 의미하고, 중국어 발음인 běi 는 baga (to butcher)로서, 도살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岳)의 상형은 丘 + 山로서, 산(山) 위에 언덕(丘)이 있는 것이니 험한 산을 뜻하며, 르완다어 aka (to be burning, very thirsty)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물이 없는 산 즉, 우뚝 솟은 단봉 또는 쌍봉의 산으로서 계곡이 없는 산을 의미한다. 산(山)의 갑골문 상형은 날카로운 3>으로서 남성의 발기된 성기와 불알 두쪽을 뜻하며, 르완다어 shanyura (to tear)에서 유래하여, 하늘을 찢어 은하의 정기를 받는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명당 자리는 명산의 바로 아래에 있는 것이니, 그것은 하늘의 은하수 미르의 정기를 받기 위함인 것이고, 마니산 참성단이나 경주 첨성대는 바로 미르의 정기를 받는 곳이다. 결국, 북악산(北岳山)은 모반이 상시 일어나는 물이 없는 우뚝 솟은 산이며, 하늘의 정기를 받는 곳>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경복궁은 북악산의 정기를 받는 명당인 것이니, 북악이 모반의 산이며, 또한 물이 없는 산이니, 은하의 미르의 영혼을 잘 모셔오지 못하는 곳을 뜻하므로, 경복궁은 조선 518년간 제대로 명군들이 태어나지 못하고 제대로 후사 조차 잇지 못하며 법궁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경복궁에서 남산은 정남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사좌해향(巳坐亥向)인 것이니, 양택 명당의 발복기간은 5 x 5 = 25 의 대수 즉, 250년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 도읍한지 197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고, 빈터로 내려오다가 흥선대원군이 1867년 고종 4년에 중건하였으니, 197년 + 43년 = 240년으로서 조선 전후기 합하여 240년간 발복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발복이 끝난 터에, 일제가 1926년 총독부를 건설하였으니, 5 x 5 = 25 의 단수 즉 25년에 미치지 못하는 1945년 패망하였다. 그리고, 다시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995년 총독부 건물 철거까지 <5 x 5 = 25>의 2배수인 약 50년간 중앙청으로서 다시 발목하였다가 과천으로 이주하였다. 이렇게 파란만장할 정도의 굴곡을 가진 북악산의 정기는 현재의 청와대가 있는 경복궁 후원에도 미치는 것이니, 청와대의 주인공 치고 모반의 정치 역정을 겪지 않은 사람이 드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복기간을 가진 경복궁에 도읍한 이씨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에 망하지 않고 어떻게 518년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조선왕조가 창덕궁(昌德宮)이라는 또다른 궁궐을 가졌기 때문인 것이다. 창덕궁(昌德宮)>은 조선 초기부터 이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정궁으로서 고종이전까지 계속 사용되었으므로, 발복기간이 다한 경복궁의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창덕궁(昌德宮)의 발복기간
창덕궁(昌德宮)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으므로, 안산인 남산이 정남쪽에 있는 것이니, 명당의 발복기간은 6 x 6 = 36의 대수 즉, 360년인 것이다. 결국, 조선왕조 518년은 경복궁 240년 + 창덕궁 360년이 이어진 것이니 만일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안하고 그대로 창덕궁에 있었더라면, 창덕궁의 발복기간이 많이 남았으므로 발복기간이 만료된 경복궁과는 달리 왕조가 멸망하지 않고 최근까지도 왕국을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안산인 <남산>의 의미
남(南)의 상형은 一+丿+ 网 +十>로서, 일(一)이 끝나고(丿) 잡은 그물(网)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十) 것을 뜻하며, 갑골문 상형은 火 + ㅒ로서, 사다리 (ㅒ) 위에 올라간 가벼운(火) 사람 즉, 화장을 앞둔 시신을 의미한다. 한자 남(南)은 르완다어 nanu (emaciated person)에서 유래로서, 송장 같은 사람을 뜻하며, 또한, nani (inheritance) 로서, 망자의 유산 즉 묘지가 있는 양지바른 남쪽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南)의 중국어 발음은 nan이고, 일본어 발음은 minami 인데, 르완다어 nani (inheritance)의 복수형은 minani인 것이니, 시신은 사다리 같이 쌓은 장작더미에 얹어서 화장하는 것이고, 유골은 따뜻한 산의 남녘에 매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남산의 의미는 망자를 매장하는 산을 의미한다.
남산(南山)의 옛 이름은 목멱(木覓)산이었는데 목멱(木覓)은 나무를 채취한다는 의미인데, 목(木)은 치체와어 nyamuka (to stand up)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수목을 의미하며, 멱(覓)은 르완다어 myora (to shave head completely, exterminate) + uka (to spray, squirt)로서, 뽑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목멱(木覓)은 나무를 뽑아내고 묘지를 설치하는 공동묘지가 있는 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목멱(木覓)이 남쪽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남(南)이 양지바른 묫자리의 방향이므로 맞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목멱은 나무를 뽑아낸다는 의미이니 틀리다고 볼 수도 있다. 경복궁은 북악산의 정기와 남산의 발복을 받는 명당인 것이고, 그것의 발복기간은 이미 조선시대에 완료된 것이므로 현대의 경복궁은 관광을 위한 고궁이 되는 것이고 현대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명당은 다른 산의 정기를 받는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경복궁 후원인 청와대의 터도 역시 발복기간이 만료된 곳이므로 이곳도 관광지로 개발하고 대통령궁을 정기가 살아있는 새로운 곳에 짓는 것이 집권자가 국민을 배반하는 역사의 굴레를 끊을 수 있는 것이다.
완만한 등로길의 모습
성북천 발원지의 모습
서울의 비무장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잘 보존된 숲 사이로 뻗은 산책로를 통해 42년간 금단의 땅이었던 북악산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이다.
성북천 발원지 안내판
성북천(城北川)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북악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지역에 따라서 안암천(安岩川)으로도 불린다. 1960년대까지도 물이 맑아 일대에서 복숭아를 재배하고 물가에서 빨래를 하였다고 하나, 1960년대 말부터 총 3.66km 구간에서 복개가 이루어져 수질 또한 악화되었었다. 지금은 삼선교 이남에서 복원을 진행하여 한성대입구역 앞부터 청계천 합류부까지가 생태하천으로 복원되어 있다.
성북천발원지
한강지류 지방 2급의 하천으로 다양한 생물서식지로서의 역할을 하며 등산객 및 인근 주민의 생태체험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무장공비 김신조 루트 안내도
성북천발원지 앞 이정표
시멘트 계단 오름길의 모습
서마루 쉼터의 모습
급경사 내림길의 모습
서마루 쉼터에서 좌측방향 등로길은 금지구간으로 막혀 있다. 바로 위에 군부대가 있어 그런것 같았다. 어쩔수 없이 우측편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면 솔바람교를 지나고 바로 옆 우측편으로 계곡마루 쉼터에 도착를 한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나무계단을 한차례 밀어 올려 진행한다.
솔바람교 통과
바로 아래에 약수터가 있지만 부적합이라고 적혀 있어 음료로는 사용하기가 어렵다.
솔바람교 통과후 지나온길 뒤돌아본 모습
계곡마루의 모습
박목월의 청노루
박목원시인. 향토적 서정을 민요가락에 담담하고 소박하게 담아냈다.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의 한 사람이다. 대표작으로 <청노루>, <산도화> 등이 있다.
한국시단에서 김소월과 김영랑을 잇는 시인으로, 향토적 서정을 민요가락에 담담하고 소박하게 담아냈다. 본명은 영종.
태어난 지 100일 만에 경상북도 월성(지금의 경주)으로 이사가 그곳에서 자랐다. 1933년 대구에 있는 계성중학교에 다닐 때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고, 그해 〈신가정〉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바 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인과 어울려 지냈으며, 1946년경부터 계성중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이어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문필가협회 상임위원,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문총구국대 총무, 공군종군문인단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57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로 있다가 1968년 회장이 되었다.
한때 '산아방'·'창조사' 등의 출판사를 운영했고,〈아동〉·〈동화〉·〈여학생〉·〈시문학〉 등에서 편집일을 했다. 1962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취임해 1976년 문리대학 학장을 지냈다. 1973년 시전문지 〈심상 心象〉을 펴냈다.
박목원 산이 날 에워싸고
1939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문장〉에 시 〈길처럼〉·〈그것은 연륜이다〉·〈산그늘〉 등이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청록파). 이어 발표한시들은 초기·중기·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는 시집 〈청록집〉(1946)·〈산도화 山桃花〉(1955)를 펴낸 시기이며, 중기는 시집 〈난·기타〉(1959)·〈청담 晴曇〉(1964)을 펴낸 시기이고, 후기는 〈경상도의 가랑잎〉(1968)을 펴낸 이후의 시기이다. 초기에는 자연을 보는 입장에 서 있고 후기에는 사회현실을 인식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있는데, 소재가 자연에서 일상적인 삶으로 바뀌고 표현방법도 객관적인 스케치에서 주관적내지 자아응시로 바뀌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보는 자'로서의 입장에 충실했다면 후기에는 '느낀 자'로서의 입장에 충실했고,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동화내지 화해를 꾀했던 것이, 후기에 와서는 어긋남과 비틀어짐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자연을 노래하고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을 그리는데 힘썼던시적 태도, 율격과 간결미에 치중했던 시적방법은 시집 〈난·기타〉에 와서 변화를 겪게 된다. 이시집에 실린 〈넥타이를 매면서〉·〈모일〉·〈서가〉·〈정원〉 등을 보면, 초기시보다 운율과 시각적 효과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시적 대상도 자연에 대한 순수한 관심에서 일상적인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으로바뀌어 생활인의 아픔과 소시민의 고달픔을 읊고 있다.따라서 〈난·기타〉는 〈청록집〉이나 〈산도화〉에서 보여주었던 '동화적 욕구'의 좌절을 알리는 첫 신호라할 수 있다. 대표작 〈나그네〉는 조지훈의 시 〈완화삼 玩花衫〉에 화답한 것으로서, 초기 시가 그렇듯 향토성이 짙고 민요가락을 빌려 섬세한 서정을 읊고 있다.
그의 시관(詩觀), 시 기능론, 시 방법론은 전통적인 것에 아주 가깝다. 그의 시는 "시는기껏 시인 자신을 정화하고 구제해주는 것"이라는 시효능론에 뿌리를 두고있으며, 시는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고 읽히고 에네르기화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시는 신념 또는 철학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양식이라는 통념을 완강하게 뿌리치고, 한편의 시를 쓰는 과정이나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나칠 만큼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밖에 평론으로 〈동요교육론〉(새교육, 1949. 9)·〈시와 관조의 세계〉(세대, 1963.11)·〈자전적 시론〉(사상계, 1965.8) 등을 발표했다.
시집으로〈구름에 달가듯이〉(1975)·〈박목월시집〉(1983)·〈달빛에 목선가듯〉(1986)·〈소금에 빛나는 아침에〉(1987)등과 동시집으로 〈동시집〉(1946)·〈산새알 물새알〉(1962)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시〉(1956)·〈여인의 서(書)〉(1959)·〈밤에 쓴 인생론〉(1966) 등이 있다. 1955년 아세아 자유문학상, 1969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72년 국민훈장모란장, 197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계곡마루에 설치되어 있는 삼무(三無) 삼청(三靑) 안내도
삼무(三無)란 전파가 없고, 소음이 없고, 걱정이 없음
삼청(三靑)안 산이푸르고, 하늘이 푸르고, 마음이 푸름을 뜻함
계곡마을 등산 안내도
계곡마을 사색의 공간 안내도
솔바람교 아래 옹달샘 이정표
옹달샘의 모습
나무계단 오름길 진행
남마루 쉼터의 모습
화장실과 송전탑의 모습
호경암
1968.1.21사태 격전지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한 김신조외 30명이 자하문 일대에서 경찰과 접전을 벌이다가 습격에 실패하여 분산 도주하다. 호경암 일대를 수색하다 도주하던 적을 발견하여 교전 끝에 일부를 사살한 현장이며, 호경암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
호경암 안내판
북악산 일대와 호경암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현장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정예요원들이 대통령 및 정부요인들을 암살하고 체제를 전복하고자 청와대 바로 뒷산까지 침투해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곳입니다. 당시 30여명의 무장공비 중 1명만 생포되고 나머지는 교전 중 사살되었습니다.
호경암 등산 안내도
호경암 정상석
1968.01.21사태 격전지로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한 김신조 외 30명이 습격에 실패하자 호경암 쪽으로 도주하다 33대대 2중대 와 교전을 벌였고 그 상황을 보여주듯 50여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 바위이다.
호경암 삼각점
소나무 숲길 진행
천이(遷移)
천이란 어떤 지역 내의 생물 군집이 오랜 시간에 걸쳐 생물의 종류와 수가 변해 가는 과정
어떤 지역 내의 생물 군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군집의 구조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도 변화한다. 여러 가지 원인이 군집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기후 변화와 같은 환경 요인의 변화, 외래종의 유입, 생태계 교란 등 많은 요인들이 한 지역의 생물 종을 다른 종으로 대체시키고 그 수에서도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이러한 변화 과정을 ‘생태학적 천이(ecological succession)’ 또는 ‘천이’라고 한다. 천이에는 1차 천이와 2차 천이가 있다.
천이 초기에는 토양에 물이 어느 정도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환경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후기 단계로 갈수록 빛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따라서 극상 단계에서는 온대 지방의 경우 대부분 음수림이 된다.
북악산 하늘 전망대의 모습
북악산 하늘 전망대의 안내도
북악산 하늘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모습
북악산 하늘 전망대의 안내도
북악산 하늘 전망대의 서울시가지의 모습
등로길 내림길에 피어난 진달래, 개나리의 모습
북악 스카이웨이 갈림길의 모습
북악 스카이웨이 갈림길 이정표
북악 스카이웨이 갈림길 앞 등산 안내도
북악 스카이웨이 갈림길 우측편 쉼터의 모습
하늘교의 모습
정자와 체육시설물의 모습
하늘교를 지나면 넓은 공터에 팔각정자와 체육시설물이 설치되어 있고 국민대학교 방향은 여래사방면 직진으로 진행하면 된다. 일부 선답자의 후기글을 보면 숙정문 안내소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여 성북천발원지에서 호경암방향으로 진행하지 않고 직진으로 스카이웨이 팔각정으로 올라 도로 따라 내려오면 이지점에서 합류하게 된다.
정자와 체육시설물이 있는곳 이정표
정자와 체육시설물 있는 이정표
정자와 체육시설물 앞 등산 안내도
국민대, 여래사 갈림길의 모습
국민대, 여래사 갈림길 이정표
국민대, 여래사 갈림길 등산 안내도
등로길 좌측편으로 유격훈련때 이용하는 시설물이 있는곳 통과
성북구 숲체험장 갈림길의 모습
성북구 숲체험장 갈림길 이정표
성북구 숲체험장 갈림길 등산 안내도
성북구 숲체험장 갈림길 앞 이정표
성북구 숲체험장 갈림길 앞 여래사 안내도
여래사 안에는 순국선열 봉안소가 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 투쟁하다 순국한 순국선열들의 위패가 모셔진 호국사찰이며 현충사찰이다. 대다수가 자손이 없고 유해를 찾지 못한 무후선열이며, 대한민국장 이준 열사 외 21명을 포함하여 총 373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불기 2502년(1958) 창건된 이래 나라의 안녕을 위해 호국기원 법회를 열었고, 1963년부터 해마다 불교 의식에 따라 정초, 백중, 현충일, 추석에 신도들과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순국선열 추모제를 열고 있다.
여래사 위 쉼터의 모습
여래사에 있는 부처상
여래사 순국선열위령탑의 모습
여래사 순국선열위령탑 안내판
여래사 경내의 모습
여래사 경내의 모습
여래사 경내의 모습
여래사 순국선열 봉안소 안내판
여래사 대웅전
위치 : 서울 성북구 정릉로 57-57 (우)02703(지번 : 정릉동 산 87-1)
여래사 안에는 순국선열 봉안소가 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 투쟁하다 순국한 순국선열들의 위패가 모셔진 호국사찰이며 현충사찰이다. 대다수가 자손이 없고 유해를 찾지 못한 무후선열이며. 대한민국장 이준 열사 외 21명을 포함하여 총 373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불기 2502년(1958) 창건된 이래 나라의 안녕을 위해 호국기원 법회를 열었고, 1963년부터 해마다 불교 의식에 따라 정초.백중. 현충일. 추석에 신도들과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순국선열 추모제를 열고 있다
포대화상(布袋和尙)의 모습
설탄 한시각은 17세기 조선 화단에 선종화의 영향을 강하게 남긴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던 경험도 그의 이런 화풍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림 <포대화상(布袋和尙)>에서 포대는 정웅대사라고도 부르는 고승을 뜻한다. 이 고승은 늘 자루 하나를 메고 다니면서 동냥을 해서 ‘포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포대 하나를 어깨에 메고 유유자적, 느릿느릿 걸어가는 고승의 모습이 단순한 선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 후량(後梁) 사람으로 법명은 계차(契此)이다. 우리가 불상으로 자주보는 배가 튀어나오고 포대를 걸머진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이었다. 또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 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이라고 불렸다. 기이한 행적을 수없이 남겼으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 등을 예언하여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천백억으로 몸을 나누어도 낱낱이 참 미륵일세. 항상 세인에게 나뉘어 보이건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 이 없네” 라는 게송을 남기고 반석 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대화상이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임을 알아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중국에는 포대화상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있는데 아마도 포대를 메고 다녔던 그의 행적 때문인 듯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현대에 들어 포대화상에 대한 신앙과 함께 기복적인 이유에 의해 포대화상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이 많이 제작되고 있는데 중국적인 영향이다.
조선시대 작품으로 몇 점의 포대화상도가 전하는데 본래 선종화의 하나로 그려졌던 것이며 현대에 만들어지는 중국적인 포대화상과는 차이가 있다.
"나에게 한자루의 포대가 있는데 닫으면 바늘 하나 들일 곳 없지만 열어놓으면 온 세계가 함께 하네"
포대화상의 전언에는 시대를 초월해 어느곳에서나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닫으면 바늘 하나 들일 곳 없지만 열어놓으면 온 세계를 들일 수 있는 것. 그것은 마음이다. 함께 나누는 마음, 베푸는 마음이다.
포대화상 참배방법도 친근하고 재미있다.
포대화상의 배꼽을 만지면서 아랫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돌리며 만진다. 그렇게 손길이 많이 닿아서인지 배꼽부분이 거무스레하다.
포대화상이 크게 웃을 때 그 웃음을 따라 함께 웃으면 세가지 복이 생긴다 한다.
무병, 장수, 부귀이다. 그래서 포대화상은 우리말로 옮기면 '복(福)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영어로는 '해피 부다(Happy Buddha)'이다. 또다른 참배법으로는 포대화상의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책갈피나 책상앞에 놓고 웃는 연습을 하는 것도 있다.
한사람이 포대화상에게 물었다.
"스님께선 매우 높은 깨달음에 도달하신 훌륭한 스님이라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귀중한 시간을 아이들과 노는 데만 허비하고 계십니까? 정말 스님께서 불법에 통달하셨다면 저희들에게 법문을 하나 해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대화상은 자신의 포대를 땅바닥에다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다! 이것이 불법의 진수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어안이 벙벙하여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포대화상은 이렇게 들려주었다. "이것이 내가 보여 주고자 하는 전부이다. 내가 짐을 내려놓았듯이 그대도 자신의 짐을 벗어버려라."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그는 아무 말 없이 포대를 다시 걸머지고는 발길을 내디디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다음 일이다. 나는 짐을 짊어졌지만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짐이 더이상 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지.."
포대화상, 마지막 게송
夜夜胞佛眠(야야포불면) 밤마다 부처를 보듬고 자다가
朝朝還共起(조조환홍기) 아침마다 같이 일어난다.
起坐鎭相隨(기좌진상수) 일어나건 앉건 서로 붙어다니며
語默同居止(어묵동거지) 말을 하건 않건 같이 머물고 눕는다
纖豪不相離(섬몽불상리)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如身影相似(여신영상사) 몸의 그림자 같구나
欲識佛居處(욕지불거처)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할진대
只這語聲是(지어어성시) 다만 말하는 이놈이니라
一鉢千家飯(일발천가반) 하나의 바릿대 천 집에 밥을 빌며
孤身萬里遊(고신만리유) 고고히 몸은 만리를 노닌다
靑目覩人小(청목관인소) 알아보는 이 별로 없어
問路白雲頭(간로백운두) 떠도는 흰 구름에게 길을 묻노라.
彌勒眞彌勒(미륵진미륵) 미륵 참 미륵이여
分身千百億(분신백천억) 천백 억의 몸으로 나투어
時時示市人(시시시시인) 때때로 세속 사람들에게 보이나
市人自不識(시인자부지) 세속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
我有一布袋(아유일포대) 나에게 한 포대가 있으니
虛空無가碍(허공무가애) 허공도 걸림이 없어라
展開遍宇宙(전개변우주) 열어 펴면 우주에 두루 하고
入時觀自在(입시관자재) 오므려 들일 때도 자재로움을 보노라.
여래사 일주문의 모습
삼각산 여래산 일주문 통과
형제봉 갈림길의 모습
형제봉 갈림길 이정표
형제봉 갈림길 이정표
산사길 안내도
시멘트 포장도로 내림길의 모습
여래사 일주문 통과 후 뒤돌아본 모습
여래사 삼거리의 모습
여래사 삼거리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여래사 삼거리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청학사 갈림길 이정표
청학사 안내판
북악터널 입구의 모습
북악산(해발 342m)을 동서방향으로 관통한다. 길이 810m, 너비 12.5m, 높이 6.25m. 1970년 착공해 1971년 준공·개통되었다. 터널 단면은 순차선너비 9.7m이며, 노견폭 및 유지관리원의 통행에 필요한 좌우 각각 1.2m의 공간이 있다.
터널의 서쪽 지역인 서대문구 홍은동, 종로구 부암동·평창동, 은평구와 터널의 동쪽 지역인 성북구 정릉동, 강북구·동대문구 사이의 교통소통에 큰 도움이 되어왔다. 시설이 노후해 누수방지와 벽면 미관을 위해 1987년 지반 그라우팅(grouting) 공사와 타일 부착공사 등의 대규모 보수공사를 했다. 1991년 12월 7일에는 길이 810m, 너비 10m인 2차선의 쌍굴 터널이 개통되었다. 쌍굴 터널의 개통으로 미아·수유·도봉·상계 등 서울 동북부지역과 구파발·수색·불광동·신촌 등 서북부지역 간의 교통이 원활해졌다.
북악터널의 모습
북악터널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으로 연결하는 터널이다. 길이 810m, 너비 12.1m, 높이 6.25m로서 1971년 8월 31일 준공, 개통되었다. 터널단면은 순차선너비 9.7m에 갓길너비 및 유지관리원의 통행에 필요한 공간이 좌우 각각 1.2m로 구성되었다.
벽면 미관이 불량하고 조도가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소화설비도 노후한 상태여서 1차 보수를 하였다. 또한, 터널 입구부의 누수를 방지하기 위한 보수방안으로 지반그라우팅을 계획하고 있다. 이는 산마루에 설치되어 있는 기존 측구(側溝) 전방의 지중선(地中線)을 관통하는 그라우팅을 실시하여 지하수의 유입을 차단하는 방법이다. 이는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는 장점이 있으나 절리충진을 완벽하게 하는 데 다소 미흡함이 있는 방법이다. 벽체 미관을 위하여는 기존 라이닝면을 깨끗이 청소하고 측벽부의 3.0m 높이까지 백색 자기질타일을 부착하였다.
북악공원 지킴터의 모습
수도권 55산 제8구간 들머리지점이기도 한곳이다.
맥을 잇다보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을 해야 하는데 요즘 산객들은 자신의 편리되로 산행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원래는 여래산 일주문 아래 형제봉 삼거리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는것이 맥을 잇는것이라 생각하는데 대다수 산객들이 이곳으로 이용를 한다.
추후 답사시 궁금을 해야겠다.
북악공원 지킴터 앞 이정표
북악공원 지킴터 앞 북한산 국립공원 안내도
북악공원 지킴터 앞 이정표
국민대학교 앞 버스정류장 노선도
국민대학교 정문의 모습
국민대학교(國民大學校)
위치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861-1(정릉길 77)
국민대학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이며 1946년 12월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에 의해 야간 국민대학관으로 설립되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한 신익희는 국가개발을 위해서는 민족의 계몽과 유능한 인재 양성이 우선이라는 신념에서 1946년 3월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 등을 고문으로 하고 조소앙을 명예회장으로 하며, 회장으로 신익희, 부회장으로 윤백남(尹白南)·옥선진(玉善珍)이 중심이 되어 국민대학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대학을 설립하였다.
학부와 전문부에 각각 법학과ㆍ경제학과를 설치하였으며, 초대 학장에 신익희가 취임하여 ‘이교위가(以校爲家)’ㆍ‘사필귀정(事必歸正)’을 학훈으로 제정하였다. 1948년 2월서울 종로구 창성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같은 해 8월 정규 주간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교명을 국민대학으로 변경하고, 정치학과를 신설하였다.
1957년 4월 야간부를 설치하였으며, 1959년 10월 김성곤(金成坤)이 재단법인 국민학원을 인수함에 따라 심한 재정난을 겪던 학교는 새로운 중흥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969년 야간부를 폐지하고, 1971년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현재의 위치에 캠퍼스를 조성하여 이전하면서 15개 학과로 편성하였다.
1974년 공과대학을 신설하고, 1976년 3월 석사과정의 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79년에 야간부를 신설하고 대학원에 박사과정을 개설하였다. 1981년 3월 종합대학교로 개편하면서 국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해 초대 총장에 정범석(鄭範錫)이 취임하였고, 사범대학원ㆍ교육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82년에 경영대학원, 1984년 행정대학원, 1987년 임업대학, 1992년 정보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3년 6월 성곡도서관을 준공하고, 1994년 3월 디자인대학원 및 평생교육원을 신설하였으며, 1995년 3월 중등교원연수원을 신설하였다. 같은 해 6월 정치대학원을 신설하고, 11월 형설관을 준공하였다.
1996년 3월 스포츠산업대학원을 신설하고, 1997년 3월 학부제를 도입하였다. 1998년 3월 예술대학ㆍ자동차공학전문대학원ㆍ산업재산권대학원ㆍ문예창작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공학관 별관 및 영빈관을 준공하였다. 1999년 2월 국제교육관을 준공하고, 3월 체육대학, 9월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을 신설하였다.
2001년 3월 건축대학, 2002년 3월 비즈니스IT전문대학원ㆍ종합예술대학원을 신설하였고, 2002년 3월 예술관을 준공하였다. 2003년 3월 생활관을 개관하고, 2004년 3월 산학협력단 및 제로원디자인센터를 설치하였다.
2004년 6월 종합정보시스템(KTIS)을 구축하였으며, 8월 산업자원부 산업기술기반조성사업 주관기관으로 선정되었다. 2005년 9월 종합복지관을 준공하고, 2006년 3월 경영대학ㆍ전자정보통신대학을 신설하였으며, 2007년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국민대학교 앞 버스정류장 노선도
국민대학교 앞 횡단보도 건너편 버스정류장 노선도
국민대학교 앞 횡단보도 건너편 버스정류장 노선도
국민대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 길음역으로 나가는 버스에 올라 오늘 산행의 마무리를 해 본다.
우중 산행길에서도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칠수 있게 도움을 주신 산객님들께 지면으로 감사의 말씀 전하며 홀로 산행의 묘미를 느껴보는 하루 였다.
다음 수도권 제 구간 국민대에서 형제봉, 대동문, 위문, 백운대, 영봉, 우이동방향은 어느곳으로 진행할지를
고민을 하고 진행할 예정이다.
하남집 근처에서 간단하게 홀로 해단식을 하고는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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