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55산 2구간 은고개-남한산성-검단산-망덕산-이배재까지 산행 후기

2019. 1. 30. 08:43★ 수도권 55산 종주/수도권 55산 종주

수도권 55산 2구간 은고개에서 이배재까지





산 행 지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성남시 중원구/하남시 남한산(해발 522.1m), 청량산(해발480m),

                  검단산(해발534.7m),망덕산(해발503.3m)


◈  산행일시 : 2019년 2월 9일(토요일, 당일산행)


산행코스 : 은고개-300.4봉(삼각점)-철탑-남한산-벌봉-동장대-남한산성 북문-남한산성 서문-청량산

                     (수어장대, 480m)-남한산성 남문-임도-검단산-506봉-사기막고개-왕기봉(500.3m)-475봉-

                     465봉-이배재

                     

산행시간 : 10시10분~14시20분(총시간(4시간10분)


산행거리 : 약 13.6km, GPS거리(14.7km)


◈ 산행인원 : 2명


◈ 산행날씨 : 영하9도~영하1도


◈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 도상거리(13.6km), 소요시간(4시간10분), GPS 거리(14.7km)     

     은고개-3.5km-벌봉-3.6 km-청량산-0.5km-남한산성 남문-2.4 km-검단산-3.6km-이배재(2차선도로)

◈ 교통 : 대중교통(지하철, 버스)

    - 갈때 : 하남-천호역 3번 출구 밖 버스 정류장-13,13-2번 시내버스-은고개

       * 전철 5, 8호선 천호역 3번출구 밖 현대백화점 버스정류소(13번버스 : 배차간격 10~25분,

         13-2번은 배차간격 15~25분 ) 에서 은고개까지 약 50분 소요 하며 버스정류소 뒷편 교차로신문사

         건물 뒤편 돌계산으로 올라 시작한다

    - 올때 : 이배재- 3-3, 31-3번-모란역-천호역-하남



에필로그

설 명절 연휴를 이용하여 사전에 수도권 55산 제2구간 코스를 탐사한다.

이 코스는 검단지맥의 마름금이며 가장 편안한 등로길이기도 하다

탐사를 마치고 시골로 내려가 설 연휴를 마치고 일과에 복귀를 한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려 내일 산행시 먹을 간식을 준비하고는 집으로 향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기상벨 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챙겨둔 베낭을 가지고 천호역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은 단촐하게 단둘이라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하산할것 같은 예감

종전 지리산 산행시 그 친구의 산행 실력을 확인하였다

천호역사 만남의장소에서 만나 3번 출구 밖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도착하는 시내버스

13~2번 버스에 올라 은고개로 출발한다.


천호역에서 은고개까지 약40분이 걸려 도착하고 장비를 정리하고는 은고개 정류장 뒤편

교차로신문사 건물에서 우측편 만두집 식당으로 조금 진행 후 좌측편 시멘트로 만든 계단을 이용하여

오르면서 수도권 55산 제2구간 산행이 시작된다.


호젓하고 편안한 숲길이 이어지고 걷기에 제격인 등로길 중간 중간에 엄미리방면으로 내려서는 등로길이 나오고 가파른 경사지를 한차례 밀어 올리면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303봉에 도착한다.

303봉 경사지를 내려서면 완만한 등로길이 나오고 잠시후 송전철탑을 지나게 되고 로프가 설치된 지점에서 내려서면 편안한 등로길이 이어지고 약1시간 진행하면 남한산성 한봉갈림길 외성벽 앞에 도착하게 된다.

남한산성 한봉갈림길에서 우측편으로 진행하면 성벽 위에 남한산 정상석(521.1봉)과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지점이 나오고 잠시후 벌봉앞에 도착한다.


벌봉에 올라 인증샷을 남기고는 동암문을 거쳐 남한산성 본성에 진입하게되며 동암문을 지나 남한산성 북문, 서문을 차례로 지나면 청량산 수어장대에 도착 하게된다. 수어장대 외벽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는 영춘정를 거쳐 남한산성 남문을 빠져나와 성남 누비길로 진행한다


남한산성을 끼고 성남 누비길로 진행하면 남한산성 제1남옹성 발굴터가 나오고 잠시후 공군부대와 KT 통신시설물로 연결되는 포장 도로에 진입하게 된다. 잠시후 포장도로에서 산길로 접속하여 완만하게 진행후 다시 포장도로를 만나 포장도로 따라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철조망과 과거지뢰지대 표지판이 나오고 군부대앞 사거리에 도착한다. 군부대 사거리에서 좌측편 비포장 임도길로 약50m 진행하면  검단산 정상에 도착하고 정상부에서 좌측편 나무계단을 이용하여 내려서면 마지막 산인 망덕산으로 향한다.

 

등로길에서 약간 비껴있는 506봉(돌탑봉)을 찍고는 망덕산 가기전 좌측편에 있는 만수 약수터에서 물한모금

마시고 망덕산(왕기봉)으로 올라선다. 망덕산에서 인증샷을 남기고는 오늘 산행에서 마지막 봉우리인 이배재정상(형제봉)으로 향하는데 등로길이 너무도 편안한다.


형제봉(이배재고개 정상)에 올라 물한모금 마시고는 이배재로 내려서는데 예상시간 보다 빠르게 하산하여 다음구간을 조금더 진행할까도 생각하였지만 그리하면 다음구간이 너무 짧아 여기에서 종료하기로 한다.


경기도 광주에서 성남 모란역으로 연결되는 3-3번 버스를 이용하여 모란역에 내려 맛집으로 유명한

모란 족발집에서 가볍게 소주 한잔 마시고는 집으로 귀가한다. 단촐한 산행 이지만 그런대로 묘미가 있는

산행이었다. 함께해준 수경친구 수고 많았고 다음 산행길에서 보자구나



산행 상세안내

은고개(gps 204 m)/‘은고개입구’ 버스정류소 도착/버스정류장 뒤편 교차로신문사 건물 뒤편으로 진행

만두집 입간판 좌측 시멘트 계단으로 진행

우승지 안동김공 묘역을 좌측편에 두고 진행

무명봉 우측편으로 진행 

편안한 등로길 진행후 하얀로프 설치된 오르길 진행

303.1봉(gps 332 m)/‘학교림’이라는 표지판/ 판독이 어려운 삼각점/급경사 내림길 진행

현위치 303고지 입간판/엄미리계곡 갈림길 이정표(은고개 0.9km, 벌봉 3.4 km)

#84번 철탑 통과

갈림길 안부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

하얀로프가 설치된 내림길 진행

쉼터/나무의자 2개있는 봉우리 통과

편안한 등로길 진행

안부에서 직진으로 진행/우측편으로 진주안공 묘지

현위치 346고지 갈림길/이정표(은고개 1.7km, 벌봉 2.0 km), 119 입석 이정표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쉼터/나무의자 2개있는 봉우리 통과

엄미리계곡 갈림길(gps 361 m)/ 이정표(벌봉 1.3 km)

갈림길 좌측방향 오름길 진행/하얀로프/통나무계단

쉼터/나무의자 2개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 내림길 통과

이정표(벌봉 1.0 km) 2개 있는 지점 통과 

남한산성이 조망되는곳 통과

한봉갈림길/우측방향 벌봉으로 진행

남한산(552.1m)/이정석/삼각점

벌봉(gps 519 m)/우측편으로 진행/ 용암석 같은 ‘벌을 닮은 기암이 정상/ 정상석 없음

벌봉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 원점회귀하여 동문방향으로 진행

현위치 은고개갈림길 119 입간판/ 우측방향으로 진행 

봉암성 통과

산성길 따라 진행

제3암문(봉암성 암문)을 지나 우측방향으로 진행

넓은 공터(gps 499 m)/제2군포터 좌측편에 두고 진행

제4암문(북암문) 옆을 지나 좌측방향으로 진행

제1군포터 좌측편에 두고 진행

남한산성 북문(gps 360 m) 통과

북장대터 통과

제5암문(연주봉 옹성 암문)

매탄터 좌측편에 두고 통과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gps 452 m)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

소나무 숲길 진행

수어장대(gps 500 m)

청량산(480 m)/넓은 구조물/성벽 옆에 삼각점

제6암문(서암문)

영춘정/정자/이정표/주변 산성 공사중/급경사 내림길 진행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gps 378 m)/남문 통과 후 좌측방향으로 성남 누비길 진행

제1남옹성 좌측편에 두고 진행

쉼터/정자/넓은 공터 우측편에 두고 진행

포장도로 접속/산길 또는 포장도로 둘중 한곳으로 진행

공군부대 앞 넓은 시멘트삼거리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

검단산(535 m)/헬기장/ 정상석

509봉 통과

상대원 능선 119 입간판 통과

만수천'약수터 통과

사기막 갈림길 통과

사기막능선 119입간판 통과

망덕산(500 m)/식탁의자가 있는 쉼터/직진으로 ‘이배재’ 로 방향으로 진행

보통골 갈림길 통과

이배재정상봉 통과/쉼터 나무의자/내림길 진행

이배재(gps 295 m)/'이배재정상'버스정류소/‘이배재고개’ 표지석/연리지 안내판/나무계단



<수도권 55산 제2구간 은고개~이배재구간 지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검단지맥 개념도>


[한남정맥 검단지맥]

칠장산에서 분기한 한남정맥은 석성산을 거처 향린동산(88CC 입구)에서 아스팔트 도로 따라 경부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아차지고개를 지나 수원 광교산으로 이어가고, 또 하나의 산줄기가 향린동산(88CC 입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법화산(383m), 불곡산(335m), 영장산(414m), 검단산(542m), 청량산(438m), 용마산(596m), 검단산(657m)을 거처 하남시 창모루마을 한강변에서 그 맥을 한강에 넘겨주는 도상거리 43km인 이 산줄기를 한남검단지맥(漢南黔丹枝脈)이라 부른다.


[수도권 강동&강남 25산(약104km)]

하남 검단산-용마산-고추봉-남한산(벌봉)-청량산(수어어장대)-성남 검단산-망덕산(왕기봉)-고불산-영장산-불곡산-광교산-백운산-바라산-우담산-국사봉-이수봉-청계산(망경대)-매봉-인능산-대모산-구룡산-우면산-관악산-삼성산-호암산(민주동산)

 

[수도권 강북30산(도상거리150km)]

예빈산(직녀봉)-예봉산-철문봉-갑산-고래산-백봉-천마산-철마산(철마산남봉)-내마산(북봉)-시루봉-주금산-수원산-국사봉-죽엽산-노고산-천보산-북곡산(상봉)-상투봉-임꺽정봉-호명산-한강봉-꾀꼬리봉-챌봉-사패산-도봉산-영봉-백운대-형제봉-북악산-인왕산-안산






검단산-용마산-남한산(벌봉)-청량산-검단산-왕기봉-영장산-불곡산-시루봉-광교산-백운산-바라산

예빈산                    →                       →                    →                 →                       국사봉

예봉산                                                                                                                   이수봉

철문봉              ↑                                                                               ↓       청계산/망경대

적갑산                                                                                                                      매봉

갑산                                                                                                                      인능산

백봉                                          * 또는 반시계방향 *                                                 대모산

천마산                                    붉은 글씨는 강동/강남 25산                                         구릉산

멸도봉             ↑                        푸른 글씨는 강북 30산                          ↓                 우면산

둥글봉                                                                                                                   관악산

철마산                                                                                                                   삼성산

시루봉                                                                                                                민주동산

주금산                                                                                                                   와우산

수원산             ↑                                                                                ↓                    안산

국사봉                                                                                                                   인왕산

죽엽산                           ←               ←                ←                ←                             향로봉

노고산                                                                                                                   백운대

천보산--상봉(불곡산)-상투봉--임꺽정봉--호명산--한강봉-꾀꼬리봉-챌봉--사패산-도봉산-- 영봉


 

 

 

 

 

 

당일 산행한 기록이 핸드폰을 잘못 만져 어디론가 날라가버려 지난번 답사 했던 기록을 올려본다 


천호역 3번 출구의 모습

은고개로 가는 버스정류장은 직진으로 횡단보도 건너면 좌측편에 있다.


천호역 3번출구에서 바라본 버스정류장의 모습

 

 버스 정류장의 모습


 은고개의 모습

은고개는 경기도 하남시의 남동부 산곡리에서 광주시 중부면 광지원으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하남시에서 가장 큰 고개이며 은고개는 문헌상에 엄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광주부 도엽에 "엄현(掩峴)은 관아의 동쪽 10리에 있다. 남한산성과 길이 통하는 요충지이다. 돈대는 성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성안이 내려다보이는 매우 중요한 곳이므로 돈대를 쌓아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 후 두 개의 옹성을 쌓고 수초의 군사를 머물게 하여 적의 형세를 살피고, 위험이 닥치면 신호를 보내게 하는 곳으로 삼았다."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방비해서 적의 침입을 막을 만하다고 알려져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광여도'엄현(掩峴)'으로, 1872년지방지도대동여지도에는 '엄현(奄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광주군 군내면 영치현명이 아닌 주막명 부분에 엄현리에 속한 엄현주막(음고개 주막)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을 은고개 마을이라고 부르며, 은고개 계곡 · 엄미천 · 엄미교 등에서 그 유래를 엿볼 수 있다. 엄미리 장승이 유명하다.


은고개 (해발165m)

은고개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이며 43번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바로 옆으로 중부고속도로가 두 갈래(제1, 제2)로 갈라지는 곳이다. 대동여지도에도 菴峴(암현)으로 표기되었을만큼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다. 



은고개 들머리지점의 모습

좌측편 시멘트 계단을 이용하여 산행이 시작된다.

은고개 들머리지점의 모습

베낭을 정리하고 수도권 55산 제2구간 은고개에서 이배재까지의 산행을 시작한다.


  은고개 들머리지점에서 함께하는 수경친구 인증샷


안동 김씨 가족묘의 모습

마루금은 우측편 계단으로 진행하여 숲길로 이어진다.

 

우승지 안동김공 묘지와 묘비의 모습

우승지는 조선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왕명 출납을 맡은 관직으로,

정삼품의 부인 호명은  淑夫人(숙부인)이다.


편안한 등로길의 모습

안동김씨 묘지에서 한차례 밀어 올리면 무명봉을 우회하여 내려서고 편안한 등로길로 진행하면 로프가 설치된 경사지를 만나게 된다. 경사지를 올라서면 첫번째 봉우리인 303봉에 도착하고 올라온 만큼 급경사지를 내려서 진행한다.


잔디가 없는 묘지 옆으로 진행

 

로프가 설치된 경사지 오름길 진행 


삼거리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로프가 설치된곳으로 오르면 삼거리가 나오고 우측방향은 303봉 우회로 이고 좌측방향은 303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다.

 

303봉 정상부의 모습

정상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그 옆으로 대림학원 입간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303봉 삼각점의 모습

너무 오래되어 삼각점 인식이 어려운 상태였다.

 

303봉을 알려주는 준,희님의 시그널

항상 마루금을 지날때면 만나는 시그널 부산국제신문사 산악부에 계시면서 전국의 산야를 두루 두루 탐방하시고 먼저 떠나신 부인을 그리워 하면서 지나온 길에 시그널을 붙히고 계시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고 무릎이 아파 후배들이 대신 한다고 한다.

현오님(홀대모회원)의 도움으로 2012년도 낙동정맥길에서 만나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어는데...

아직도 잘 계시는지?? 지면으로 안부를 대신할 다름이다

아래 사진은 그 당시 함께 찍은 사진이며 블러그에 올린 글귀이다

 


그리운 님과의 조우

좌로부터 준,희선생님, 본인, 현오님,삼돌이님과 함께 인증샷

준,희선생님께서 현오님이 지방으로 내려오신다는 말씀을 듣고는 이곳까지 방문을 하셨다고 하신다

얼마나 반가운 분인가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리어지는 그분...

요즘은 무릎이 불편하여 산행은 못하지만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다

산행을 하면서 준,희님의 표지기를 많이 보고 배우는점이 많았고 어느분인지 궁금했는데 오늘 낙동정맥길에서 그분을 뵙게되어 영광이라 말할수 있었다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는 낙동정맥 쫑파티에서 뵙길 기약하면 아쉬운 이별을 한다.


303봉에서 인증샷

 

 303봉에서 인증샷


 303봉 급경사 내림길의 모습


엄미리계곡 갈림길의 모습

303봉 급경사지에서 내려서면 엄미리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나오고 직진으로 진행하면 잠시후 84번 송전철탑을 지나게 된다.

엄미리계곡 갈림길 현위치 이정표

 

엄미리계곡 갈림길 이정표

 

#84 송전철탑 통과

 

갈림길 좌측편으로 통과

예전 검단지맥을 할때에는 저앞 무명봉을 올라 진행하였는데 지금은 우회로가 만들어져 편리하게 진행한다.

 

 

로프가 설치된 급경사지 진행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완만하게 진행하면 로프가 설치된곳에 도착하고 통나무계단 옆으로 로프가 설치된 경사지를 내려 진행한다.

 

나무의자 두개가 설치된 쉼터 통과

 

진주강씨 묘지 갈림길 직진으로 통과

 

갈림길 안부 벌봉방향으로 진행

 

현위치 346고지 119 이정표

 

나무의자 두개가 설치된 쉼터 통과

현위치 346고지 119 이정표 바로 위에 위치해 있는 쉼터이다.

 

두번째 만나는 엄미리계곡 갈림길의 모습

 

 엄미리계곡 갈림길 이정표


삼거리 갈림길 좌측방향으로 진행

  

통나무계단과 로프가 설치된 경사지 오름길 진행

 

양옆으로 나무의자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 통과

통나무계단을 한차례 밀어 올리면 휴식하기 좋은 쉼터가 나오고 직진으로 경사지를 내려 올라서면 남한산성 외성벽 앞에 도착하게 된다.

 

등로길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

 

남한산성(南漢山城)

남한 산성은 조선시대에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를 하는 산성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천연 요새지로 백제, 신라에서 도성을 쌓았다고 하며, 조선시대에서는 북방의 방비책으로 광해군13년(1621)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고, 이괄의 난 이후 인조2년(1624)에 수어사 이서에게 명하여 대대적인 국가사업으로 증축하여 2년뒤 1626년에 완공하였다.

그뒤 순조때까지 각종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중 가장 완비된 시설을 갖추었다.

성안에는 군사시설은 물론 유사시에 임금이 거처할 행궁과 관아시설, 방어시설인 4장대와 출입시설인 문루 그리고 승병 주둔을 위한 사찰들도 있었다.

현재는 문루를 비롯한 시설물들을 수차에 걸쳐 복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때 인조는 이곳에 피난하여 항전한 곳이다.

성의 둘레는 7,545m이고, 높이는 낮은 곳이 3m정도이고 높은 곳은 7m내외이다. 성벽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다른 성과는 달리 길이가 매우 짧은 치가 설치되어 있다. 산성안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고 성벽에는 30여개에 달하는 수구를 설치하였다.

동문인 좌익문, 서문인 우익문, 남문인 지화문, 북문인 전승문 등의 4대문과 비밀문인 암문 16개가 있었다.

또한 5개의 장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병사들의 숙소인 군포가 125개 있었다.

왕의 숙소인 행궁이 설치되었으며, 광주시의 읍치를 산성안으로 옮겨 각종 관아건물과 창고를 설치하였다.


한봉 갈림길 우측방향으로 진행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성벽 바로 아래에 예전에는 없어던 남한산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봉 갈림길 이정표

 

한봉 갈림길에서 인증샷


한봉 갈림길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좌측방향은 은고개방면이고 우측방향은 한봉-노적산을 지나 광지원리 남한산성 입구로 내려서는 등로길이다.

 

허물어 내린 남한산성의 모습

남한산성 본성은 정비가 잘되어 있는데 남한산성 외성은 아직까지 정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이 모양으로 남아 있다. 하루 빨리 옛 모습을 찾길 바래본다.


남한산성 외성곽에서 지나온 검단산-용마산 배경으로 인증샷 

 

남한산 정상부의 모습

남한산 정상부에는 천사모산악회에서 설치한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고 조망 또한 일품이다.

 

남한산[南漢山, 해발 522.1m] 정상석

남한산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과 하남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98m이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한 산으로 천연 요새지에 성을 쌓아 삼국시대 이래로 산성의 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였던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하여 위례성에 도읍한 후, 서기전 6(온조왕 13)에 남한산으로 천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홍경모(洪敬謀)남한지(南漢志)에서 이것을 부정하고, 그 당시 온조가 도읍한 곳은 검단산(黔丹山) 아래였다고 주장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일장산성이 672(문무왕 12)에 새로 축성한 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남한산성이다. 산의 사방이 평지이고,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찍이 주장산(晝長山) 또는 일장산(日長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남한산성도 주장산성(晝長山城)으로 불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광주목(廣州牧) 편에는 남한산성이 일장산성(日長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모든 지도에 남한산 대신 청량산으로 표기되고 있다. 남한산은 광주산맥에 속하며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침식되어 형성된 고위 평탄면(高位平坦面)이다. 고위 평탄면은 신생대 제3기 후반부터 진행된 요곡융기(謠曲隆起) 이전에 한반도가 저평화(低平化)되었을 당시의 평탄면을 대표하는 지형이다. 남한산성은 고위 평탄면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다.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은 19713월부터 도립공원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남한산성 내의 문화재로는 산성 정상에 있는 2층 누각으로 서장대(西將臺)라고 부르던 수어장대(守禦將臺), 병자호란 후 항복을 반대하다 잡혀간 충절의 3학사를 모신 현절사(顯節祠)를 비롯하여 행궁·숭열전(崇烈殿청량당(淸凉堂침과정(枕戈亭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장경사·망월사지·개원사지 등이 있다. 


남한산 삼각점(△422 재설  76.9 건설부)

 

남한산[南漢山, 해발 522.1m] 정상석에서 인증샷


남한산 바로 아래에 있는 암문의 모습

 

남한산 바로 아래에 있는 이정표


외동장대터의 모습


외동장대터의 표지석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이곳은 외장대가 있던 곳으로 동장대와 벌봉 일대를 조망할수 있다. 「외동장대는 조선 숙종 12(1686)에 수어청 군사를 동원하여 봉암성을 축성할 때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측되며 군사들이 진을 치고 훈련하던 곳으로 보인다.라고 표지석에 명기되어 있다.

 외동장대터를 지난면 벌봉 갈림길이 나오고 벌봉에 올라 인증샷을 남기고  벌봉 표지석으로 돌아와 좌측편방면 봉암성방향으로 진행한다.


벌봉의 모습

봉암신성신축비는 행태가 자연석 위에 정사각형의 해서체로 음각 되어 있으며 판독 가능한 49자 이외에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 몇 글자가 더 있다.

이 비문내용은 숙종 12(1686) 41일부터 봉암성(비문에는 봉암 신 성이라 하였음)을 쌓아 같은해 59일에 성역을 끝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비변사등록 등 관련기록에 따르면 봉암성은 수어청 소속의 군인을 징발하여 1,000석 정도의 재원을 확보하여 신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축이후 봉암성에는 숙종 19(1693)에 돈대를 설치하였고, 숙종 31(1705)에는 포루를 설치하여 청나라의 화포공격에 대비하였다


벌봉 표지석

지형도상에는 벌봉이 없다. 峰岩(461.9m)이 있으나 위치가 북쪽이고, 우리말로 풀어도 봉우리바위가 된다. 현지에서 말하는 벌봉은 한자로 蜂峰이라 쓴다. 읽으면 봉봉이 되는데, 뜻으로 보면 벌봉이 되고, 위치는 남한산 북쪽의 성곽에 접해있는 약 500봉을 말한다. 지도에는 아무 표기가 없고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다. 유래판에는 봉우리가 벌처럼 생겼다고 벌봉이라는데, 지도의 峰岩 표기와 위치가 잘못된 듯하다.


벌봉바위(해발 512.2m)

남한산성 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있다. 이 바위를 벌봉 또는 벌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벌이 이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벌암, 벌바우, 벌봉이라 불렀다고 하며, 암문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그 모양 또한 마치 벌과 비슷하다고 한다. 벌봉은 옛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지금도 이 바위는 정기가 서려 있어 그 영험이 대단하다는 소문 때문에 치성을 드리러 오는 무속 신앙인들이 많다.

바위 주변에는 제단도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영험하다는 벌봉에는 청태종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청나라 태종(태종의 고모라는 이야기도 있다)은 용골대를 조선에 비밀리에 보내어 남한산성의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다. 명을 받은 용골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해 보니, 남한산성은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산성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세밀하게 조사하여 지도를 그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대강 대강 지도를 그리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용골대가 그린 그림을 받아 본 청 태종은 용골대에게 강의 위치, 조선 도성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용골대가 대답하기를, "강은 산성 서쪽에 있고, 도성은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네 말과 같이 강과 도성이 서편에 있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반대로 서를 길게 하고 남북을 짧게 그려왔는가. 빨리 다시 그려 오라. 만약 명대로 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겁을 먹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성곽, 바위, 골짜기, 언덕 등을 빠짐없이 살피고 지도에 그렸다. 그리고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지도를 바쳤다. 청 태종은 용골대가 그려온 지도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벌봉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천상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이다. 이 벽력성은 남극성이 범하게 되면 망하고 만다. 그런데 나의 주성이 곧 남극성이니, 만일 조선 국왕이 벌봉을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 청나라가 쉽게 남한산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벌봉이 성 밖에 있다. 장래에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 청나라 군사가 산성 밖에 있는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먼저 깨트리고, 벽력성의 정기를 말하면 산성을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조선 침략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하였고, 그의 예상대로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뜨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봉에 깃들었던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달 후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다. 후일에 나라에서 이 벌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는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벌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한다.  


 벌봉바위(해발 512.2m)에서 인증샷


벌봉바위(해발 512.2m) 아래에 있는 남한산성 제13암문의 모습

 남한산성 제13암문을 통해 나가면 경기도 하남에 위치하고 있는 객산으로 연결되는곳이다.


남한산성 제13암문 이정표

 

고골 안내판

고골 안내판에 있는 글 을 인용하면 춘궁동, 항동, 상사창동, 하사창도, 교산동을 아우르는 지역명칭으로 광주관아가 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고읍(古邑)으로 불리다가 "고고을"을 거쳐 "고골"로 변천 된것으로 추정된다 라고 적혀있다.


현위치 2-3 벌봉 119 이정표

 

벌봉앞 이정표

 

한봉 노적산 갈림길의 모습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한봉방면이고 우측방향은 남한산성 북문, 서문을 거쳐 청량산 수어장대로 이어지는 등로길이다.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은고개 단축로이다.


현위치 은고개갈림길 119 이정표

 

 한봉 노적산 갈림길 이정표


 한봉 노적산 갈림길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남한산성 봉암성방향으로 인증샷

 

남한산성 봉암성에서 인증샷


봉암성(신성, 동성)의 모습


봉암성(蜂巖城) 표지석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이중에서 봉암성은 봉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동북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 빼앗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안하기 위하여 숙종 12년에 부윤 윤지선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고 숙종 31년 수어사 민진후가 포루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하여 새로 샇은 성이므로 신성이라고도 하며 동쪽의 성이므로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성의 길이는 2,120m이다  


제3암문 (봉암성 암문) 여장의 모습

여장[女墻]은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이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 여원 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려졌다. 또한 설치하는 목적에 따라 치폐, 첩담, 비예, 희장 이라고도 하였다. 여장의 종류에는 평여장과, 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으로 구분된다. 평여장은 타와 타 사이에 타구를 설치하고 크기가 일정한 장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남한산성의 여장은 1940타 이며 모두 평여장이다. 1타의 길이는 남한산성의 경우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1타의 길이는 대략 3 4.5m 정도이며 여장의 높이는 낮은 곳은 70cm, 높은 곳은 135cm 정도이다. 타와 타 사이의 타구의 폭은 30cm이고 타구의 높이는 56cm로 대략 여장높이의 1/2정도이다. 여장의 폭은 76cm이고, 타와 타 사이의 간격은 15cm 정도이나 중앙부를 형태로 뾰족하게 처리하여 좁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하여 방어의 효율성을 높였다.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급경사지역의 일부지역에서는 경사면의 중간에 단을 두어 계단과 같이 축조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단을 두지 않고 바닥의 경사면과 평행하게 여장을 설치하였다. 이 경우 여장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되어 방어의 효율성은 있지만, 여장을 쌓을 때 양력이 아래로 쏠리게 되어 여장 축성 시 어려움이 있고,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다.

일반적인 여장의 경우 체성벽의 상단에 미석을 설치하고 여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석은 체성벽에서 3치 정도 밖으로 돌출하도록 하였는데, 체성벽 맨 윗 단의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는 역할과 의장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남한산성의 경우 이러한 미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축성 시 미석을 설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당초 벽돌로 축조하였으나 영조 20(1744)에 벽돌을 제거하고 기와로 덮었으며, 정조 3년에는 다시 원성을 수축하면서 기와로 덮었던 것을 치우고 전돌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부분적으로 타와 타 사이의 타구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횡방향으로 올려놓았다. 현존하는 여장을 보면 성벽의 정상부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20-30cm 정도의 활석으로 약 30cm 정도 허튼 층 막쌓기로 쌓고 그 윗부분에는 방전을 사용하여 쌓고, 내부에는 생석회 잡석다짐을 하였으며 정상부에는 옥개전을 덮었다. 여장의 1타에는 3개의 총안이 설치되었다. 세 총안의 가운데에는 근총안을 설치하고, 양쪽에는 원총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총안의 간격은 대략 96cm 정도이며, 총안의 크기는 폭22cm, 높이 24cm이다. 성벽외곽의 경사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근총안은 경사도가 38, 원총안은 22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외곽의 경사도가 높은 능선지점에는 여장의 총안외에도 체성벽의 상단부에 별도의 총안을 설치하기도 하여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한산성 제3암문 (봉암성 암문)  앞 이정표


제3암성 (봉암성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쉽게 식별될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편이나 이 암문은 문위 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m, 높이가 2.65m에 달해 문루만 없을뿐 성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제3암문 (지도상 동장대)

암문이라 하기엔 아주 큰, 정문만하다. 남한산성 제3암문으로 들어와 성곽 위로 올라 좌측방향으로 성곽 따라 진행하면 군포지가 나오고 남한산성 북문에 도착한다.


남한산성 제3암문에서 인증샷 

     

 남한산성 제3암문 위에서 인증샷


남한산성 제3암문 표지석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곳에 설치해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암문은 원성과 봉암성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암문에 비해 매우 큰편이다. 이암문은 문 위부분이 무지개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m, 높이가 2.65m에 달해 분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제3암문 (봉암성 암문)  앞 이정표


등로길 이정표

 

급경사 내림길의 모습

남한산성 제3암문 위 좌측편 성곽따라 진행하면 남한산성 북문으로 이어지고 성곽위로 진행하지 않고 편안한 등로길로 진행하면 이정표가 설치된 삼거리에서 우측편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도 남한산성 북문으로 이어진다.

 

나무계단 내림길 이정표

이지점에서 전승문 북문방향 우측편에 보이는 남한산성 성곽으로 진행하여 내려선다.

 

성곽 내림길 돌계단의 모습


남한산성 성곽의 여장 

여장(女墻)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여장은 수평 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 형식이지만 경사지에서는 계단식이나

경사지게 조성한 것도 보인다. 

남한산성(南漢山城)5개 장대 중 이곳은 동장대(東將臺)가 있었던 곳으로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1624) 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었고,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제4암문(북암문) 배경으로 함께한 수경이랑 인증샷

 

제2군포터의 모습

 

제2군포터 표지석

 

남한산성 제4암문(북암문)

 

 남한산성 제4암문(북암문) 표지석


 남한산성 제4암문(북암문) 외부의 모습


 남한산성 제4암문(북암문)위 등로길의 모습


남한산성 제4암문(북암문) 위 성곽에서 바라본 청량산 수어장대의 모습

 

 남한산성 제4암문(북암문) 위 성곽에서 인증샷


등로길 이정표

 

제1 군포지

제1 군포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평탄한 대지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보이는 초석과 벽체, 그리고 다수의 와편과 조총탄환이 나왔다. 이를 통해 군포는 목조가구로 된 건물에 기와를 얹고 벽체는 토석벽을 둘린 건물로 보인다. 또한 군포는 초소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 있고, 내부에 온돌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정비시에 발굴된 발굴시의 건물유구를 잘 보전하기 위하여 유구 위를 흙으로 덮고 그 위에 기존 유구와 같은 형태의 모조 초석을 설치하였다.



제1군포터(성을 지키는 초소건물) 표지석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며, 중정 남한지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으나 현재는 한군데도 남아 있지 않다. 군포지에서는 다수의 와편과 조총탄환이 나왔고, 목조건물에 기와를 얹고 토석벽을 두른 건물로 보인다.


남한산성 북문 성곽위의 모습


남한산성 북문 전승문(北門, 全勝門)

북문(北門)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인조 2(1624)신축되어 정조 3(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全勝門)’이라고 지었다. ‘법화골 전투는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는데 이는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참패였다. 




 남한산성 북문에서 인증샷


남한산성 북문 안내판


남한산성 종합 안내도

 

북장대터의 모습

 

북장대터 이정표


북장대터의 표지석


넓은 인도길 접속하여 우측방향으로 진행

 

안내판

 

남한산성 내부 인도길의 모습

 

갈림길 우측방향으로 진행

남한산성 성곽길로 진행하다 보니 조그만한 능선길도 버리지 않고 올랐다 내려서는데 잠시후 다시 넓은 인도길에 접속한다. 이 지점에서는 그냥 우측편 능선길 버리고 인도길로 진행해도 무방하다.

 

 갈림길 우측방향으로 진행


갈림길앞 이정표

 

통나무 계단 오름길 진행


 

남한산성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의 모습


남한산성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 표지석


남한산성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 앞 이정표


남한산성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 현위치 2-7 119 이정표



매탄터 표지석

매탄터는 남한산성 서문에서 북동쪽 능선방향에 있는 이곳은 매탄터(처)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중간부분에는 지름 5m 깊이 1m 정도의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아마도 이곳에 매장되어 있던 목탄을 태우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소금과 마찬가지로 숯도 산성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물품중 하나였는데 "남한지"에는 숯을 묻은 것이 94곳에 24.192석이라 하였고 천주사 별관에서부터 북장대까지 묻은 위치와 양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매탄터에서 바라본 위래신도시의 모습

 

 저멀리 잠실롯데타위 조망


 남한산성 서문 위의 모습


남한산성 서문(우익문右翼門, 西門 서문)

검단지맥 마루금은 서문 성곽위에서 5암문(연주봉옹성 암문)을 지나 북문으로 이어지는데 우익문(右翼門, 西門 서문)을 통과하여 진행하면 마천이나 하남으로 이어지는 둘레길로 접속하게 된다.

병암남성신수비는 병암남성신수비는 정조3(1779) 618일부터 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응의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금석문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산성을 증, 개축하는데 돈1만 냥과 쌀 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 석회 등을 구어 운반하는 관리와 보수할 곳을 1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 선조들의 건축실명제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이다. 정조는 즉위 후 영릉을 참배하는 길에 자주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산성의 관리실태와 주민들의 생활상 등 민의를 살핀 개혁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동문밖에 있는 기해주필이 그 사실을 잘 반증해 주고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이 짓고, 광주부윤 이명중이 쓴 것이다.



남한산성 서문에서 인증샷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右翼門, 西門 서문) 입간판

남한산성 서문((西門, 우익문 右翼門)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와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서문 위 성곽에 올라서면 송파구 일대가 시원스레 펼쳐지는 광경을 보면서 5암문(연주봉옹성 암문)에 지나게 되고 북쪽으로는 연주봉옹성이 돌출된 모습이 보이고 그 이후로 급경사지 남한산성성곽 따라 내려서면 앞으로 진행할 용마산과 검단산 주능선이 보이고 잠시후 일명 전승문이며 산성의 주축을 형성하는 ‘북에 이른다.


 

남한산성 서문앞 이정표

 

남한산성 창량산(수어장대)으로 가는 인도길의 모습

남한산성 서문에서 직진으로 포장도로 따라 진행하면 넓은 소나무 숲길을 만나게 되고 시야가 확터인 조망지에 도착하게 된다. 조망지에서 서울 일대를 조망하고는 계속 완만하게 진행하면 좌측편으로  '남한산성안내도'가 설치되어 있고 좌측방향으로 오르면 문이 잠겨진 청량당 건물앞에 도착한다. 우측편으로 수령이 약 300년된 보호수 한그루가 자리잡고 있고, 돌계단을 오르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인 화려하고 웅장한 '수어장대' 누각이 한 눈에 들어온다.


수어장대 좌측편으로 우리나라 측량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대한제국말기 탁지부에서 설치한 '탁지부 측량 소삼각점'이 있고, 그 옆으로 매바위가 있는데 매바위에 새겨진 수어서대(守禦西臺)라는 문구가 이제는 세월이 흘려 알아볼수가 없을 정도였다.

수어장대 외부 햇살이 따뜻한 담벼락에 앉아 간식을 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내려서면 남한산성 제6암문 앞을 지나게 되고 잠시후 갈림길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편 남한산성 성벽을 따라 나무계단을 내려섰다 오르면 영춘정 팔각정앞에 도착한다.


남한산성 안내판

남한산성은 한 때 육군교도소가 있었던 곳으로 군인들에게 남한산성 간다는 말은 놀러 가는게 아니라 곧 죽으러 가는 곳이나 마찬가지 였다. 형이 확정된 중범좌자들을 수용했기 때문이었고, 10월26일의 주역들인 정승화, 김재규 등도 이곳에 수감이 되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1962년부터 1985년까지 남한산성에 있다가  용인 장호원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의 교도소 자리가 어디였는지는 알수가 없다.


수어장대와 청량당 안내판

무망루 옆에 돌기둥이 있는데 [리대통령각하 행차 기념식수]라 새겨져 있다. 단기428696일이면 1953년이고, 7.27. 휴전했는데 그 전쟁 복구로 정신이 없을땐데 여기는 만다꼬 올라왔씨꼬? 수어장대와 아무 상관없는 돌기둥 고마 뽑아 내버리지않고, 성남 사람들이 점잖아서 그렇나. 저 아래 철판을 깐 헬기장도 그렇다. 금북정맥(진천군)에도 철판 깐 헬기장이 있었는데 지역 환경단체에서 철거를 요청해 지금은 완전히 걷어내졌다.


청량당[淸凉堂]

청량당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妻妾)을 모신 사당이다. 19725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본당은 목조 단층와즙 한식 건물로 구조는 정면 3, 측면 2칸이며 면적은 108평이다. 본당의 전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 우편에는 벽암대사(碧岩大師)와 이회의 처첩 초상화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원래의 것은 6·25전쟁 때 분실되었고 지금 있는 것은 그뒤 새로 만든 것이다.

이회는 조선시대인 1624(인조 2)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성의 동남쪽을 맡았던 공역의 책임자였다. 그러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안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도와 삼남지방에 가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이회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 부근의 바위에 앉아 사람들을 노려보다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 보니 그가 맡았던 부분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무죄가 밝혀졌고, 서장대(西將臺) 옆에 사당을 지어 이회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 해마다 한 차례씩 지방 무속인들이 제사를 지내며 당시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른다.


청량당 입간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소재지: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2 

인조1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부분을 책임지고 공사를 하다가 공사 경비를 횡령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이회와 이 소식을 듣고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그의 부인 송씨와 소실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이회는 누명을 쓰고 죽을 때 자신이 죄가 없으면 사형을 당할 때 매가 한마리 날아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회가 죽으려는 순간 과연 매 한마리가 날아와서 사형 당하는 장면을 쳐다 보았다고 한다. 이회가 죽은 후 공사비 횡령사건이 다시 조사되었는데 조사 결과 그가 한 공사는 모두 충실하게 축조되었으며 공사비를 횡령한 사실이 없음이 밝혀지자,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뜻으로 초상을 안치해 두었는데, 6.25전쟁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 이후에 만든 것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홀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수어장대 무망루(守禦將臺 無忘樓, 청량산 해발480m)

수어장대 무망루(無忘樓)는 조선 영조27(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있게 하였습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입니다.        

오랜 시일이 흘러 다시 찾은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인 수어장대에 이르면 옛 모습은 변함없고, 우측의 무망루(無忘樓)’에 이르러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이다.

수어장대는 인조2(1624) 남한산성 축조 당시 지은 4개의 장대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입구에 있는 청량당 도당굿이회(李晦)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래고자 청량당(淸凉堂) 에서 거행되는 굿으로 남한산성의 축성, 역사, 무교를 바탕으로 한 신당, 민중들의 염운 등의 성격을 아우르고 있다.」  


수어장대 무망루(守禦將臺 無忘樓, 청량산 해발480m)에서 인증샷


수어장대 무망루(守禦將臺 無忘樓, 청량산 해발480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소재지: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1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에 있다. 성안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졌으며 왼쪽에는 사당인 청량당이 있다.

뒤쪽에는 2개의 우물이 있어 장대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물을 공급하였다. 이 건물은 인조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27년(1751) 유구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누각으로 다시 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특히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45일간 항전하던 곳이다. 수어장대는 아래층이 정면 5칸, 측면 3칸, 위층이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양식의 이층누각이다. 지붕은 위, 아래 모두 겹처마를 둘렀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 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계이다.


수어장대 무망루(無忘樓)

조선 영조27(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있게 하였습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입니다.    


수어장대[守禦將臺]의 모습

수어장대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아래층은 정면 5, 측면 3, 위층은 정면 3, 측면 2칸의 2층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 면적은 1105.08, 243.29이다. 아래층 평면은 내진(內陣) 3×2칸과 외진(外陣) 5×4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였으며, 맨 바깥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높게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 주춧돌을 받쳤다. 외진부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진부에는 긴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기둥이다. 공포는 익공계인데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으며, 첨차 끝은 모두 수서[垂舌]이다. 2층 평방 위에만 화반(花盤: 주심도리 밑 장혀를 초새김한 받침)과 운공(雲工: 화반 상부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사용하고 있다. 가구(架構)5량가(五樑架)로서 고주(高柱) 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쳤다. 마루보 위에는 판대공(板臺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도리를 걸었다. 합각벽(閤閣壁)은 전벽돌쌓기로 되어 있고, 용마루·합각마루 및 1층 추녀마루에 용두(龍頭)를 얹었으며, 사래蛇羅 : 추녀 끝에 잇대어 댄 네모난 서까래끝에는 토수(吐首: 용머리와 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바름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창호(窓戶)는 위층에만 있으며 매칸마다 2짝 판문(板門)을 달았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아래층 내진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이다. 외부 정면에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쓴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1624(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1624(인조 2) 수어사 이서(李曙)가 성을 쌓을 때 서남쪽은 이회(李晦)에게, 동북쪽은 벽암(碧巖)대사에게 맡겼다. 벽암은 기한 내에 성을 쌓았으나, 이회는 성을 튼튼히 쌓느라 기한을 어겼다. 이회는 무고로 수어장대 앞에서 참형되었다. 이회가 죽기 전에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목이 떨어진 자리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올라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발톱 자국이 남았다. 뒤에 벽암이 쌓은 곳은 무너졌으나 이회가 쌓은 곳은 튼튼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이회를 위해 사당을 지어 억울함을 위로하였다. 이회의 부인이 남편을 대속하기 위해 영남 지방에서 돈과 곡식을 구해 오다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쌀을 버리고 통곡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송파나루 앞에 있던 쌀섬여울[米石灘]이 이회 부인이 빠져 죽은 곳이다. 삼전도 아래 이회의 유씨와 송씨 두 부인을 모신 당집이 있어 무녀가 굿하고 부녀자가 치성하였다. 뒤에 당집이 사라지면서 두 부인은 청량당으로 모셨다.                           


청량당 우측편에 있는 수령 300년된 소나무의 모습


매바위에 새겨진 수어서대(守禦西臺)

수어장대 우측편 모서리에 매바위가 있는데 바위에 수어서대(守禦西臺) 새겨진 암각문이다. 사각형으로 제액을 파고, 그 안에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 새겨놓았다. 원래 수어사는 도성의 수어청에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유사시 에는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에 와서 지휘하였다. 정조 19(1795)부터는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였다

 

매바위 전설

바위에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 새겨져 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 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회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이회 장군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매바위에 새겨진 수어서대(守禦西臺) 인증샷

 

수어장대와 수어청 안내판

 

원반 택상의 모습

수어장대에서 넓은 임도길을 건너면 넓은 쉼터공간이 나오고 그 앞으로 이름 못을 원반 모양한 원탁이 자리잡고 있다. 그 뒤편으로 내려서면 청량산 삼각점이 위치하고 있으며 성곽을 따라 진행한다.


청량산 482.6m (수원420)

지도에 표기된 청량산(497.1m) 정상은 수어장대이고, 삼각점은 서쪽으로 내려와 성곽 울타리 옆에 있다. 삼각점이 오래되어 확인이 불가하여 지리원에 확인해 보니 삼각점 번호(수원420 )를 알수 있었다.


삼각점 아래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

 

남한산성 제6암문(서암문)의 모습


남한산성 제6암문(서암문) 표지석

남한산성에 있는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되 않는곳에 설치하고 있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라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15(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라고 안내글에 적혀있다. 


영춘정 오름길 모습


 영춘정에서 인증샷

 

 영춘정 앞 이정표


현위치 1-1 영춘정 119 이정표

영춘정 주변에는 남한산성 본성 성곽 보수공사중이라 주변이 어지럽다. 그리고 성곽 따라 내려서면 공사 때문에 남문 주변을 통제하여 남한산성 남문으로 내려서지 못해 개구멍을 통해 빠져나가 남문을 통과하여 성남 검단산 방향으로 향한다.


남한산성 성곽 보수공사중인 모습

 

성곽에서 바라본 남한산성 남문의 모습

 

성곽에서 인증샷

 

남한산성 남문 위부분의 모습

 

남한산성 지화문[南漢山城 至和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의 남문(南門)이다. 남한산성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있다. 선조 때 남문·동문 등을 수축(修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문을 통과하였다. 정조 3(1779) 성곽을 개축하면서부터 지화문이라 불렀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높이 4.75m·3.35m·길이 8.6m이며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들었다. 홍예문 좌우 성벽은 자연석을 수평줄에 맞춰 막돌 쌓기로 축조한 것이다. 1976년 복원된 문루는 정면 3·측면 3칸 규모이다.


남한산성 남문 (至和門)

영춘정에서 성곽 따라 내려서면 남문앞에 도착하고 남문을 빠져나가면 남문 외곽 성벽을 따라 성남 누비길이 이어지는데 마루금도 따라 진행한다.

 

위례동을 검색하면 세 군데로 나온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동,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위례동, 경기도 하남시 위례동이다

현재 건설중인 위례신도시는 이 3개시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 서울(송파), 하남, 성남이 각 일부씩 포함이 되는 지역이다.

 

위례라는 명칭은 한성시대 백제의 도성이었던 위례성을 의미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부여계(夫餘系)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건국한 근거지가 위례성이라고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하남의 땅은 북쪽은 한수(漢水)가 흐르고, 동쪽은 고악(高岳)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은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건국한지 13년만에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므로 처음에 정착한 위례성의 위치는 하북, 즉 한강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 위치는 서울 북한산 동쪽 산기슭이나,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세검동·평창동계곡 일대 또는 상계동·중랑천 방면을 비정(比定)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남한산성 남문(342번지방도)

예전에는 남한산성 남문이 경기도 광주시와 성남시를 연결하는 342번 지방도이며 남문을 통해 차량통행이 가능하였는데 지금은 산성터널이 개통되어 도로가 폐쇄되어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며, 성남시 쪽에는 '남문 앞 역사터'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남한산성 남문앞에서 인증샷 

남한산성 남문 입구에도 이정표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성문을 통과하고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이정표와 '남문 앞 역사터 안내'란 안내문이 있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성남 누비길 검단산 방향 나무계단길을 따라 오르면 조사 발굴중인 남한산성 남웅성앞에 도착하고 편안한 등로길 따라 진행하면 쉼터 정자을 우측편에 두고 내려선다.


남한산성 지화문[南漢山城至和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의 남문(南門)이다. 남한산성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있다. 선조 때 남문·동문 등을 수축(修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문을 통과하였다. 정조 3(1779) 성곽을 개축하면서부터 지화문이라 불렀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높이 4.75m·3.35m·길이 8.6m이며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들었다. 홍예문 좌우 성벽은 자연석을 수평줄에 맞춰 막돌 쌓기로 축조한 것이다. 1976년 복원된 문루는 정면 3·측면 3칸 규모이다. 


남한산성 남문 지화문[南漢山城  南門 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잇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는 출입이 많은 곳이다. 남한산성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때 개축하고 지화문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였다.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때 바로 이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라고 적혀 있다 


지화문(至和門) 안내판

정조3년 성곽을 개축하여 지화문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350년 추징 성남시 보호수)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성남 누비길 검단산길 구간의 모습

남한산성 남문을 빠져 나오면 좌측편으로 이정표와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고 그옆으로 성남 누비길 초입에 도착한다. 오늘 진행하는 마루금도 이 등로길 따라 진행한다.

 

성남 누비길 검단산길 안내판

검단산은 태백산맥의 청령에서 분기하여 서울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며 높이는 534.7m. 경기도 성남시 동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凹(요)자모양의 산지를 형성한다. 이 산을 중신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완만한 사면이 발달해있다. 또한 예로부터 신성한 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성남 누비길 노선 안내도 


 남한산성앞 남문터 안내문


남한산성 지화문[남문](至和門, 해발370m)

남한산성 남문(南門)은 성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정조3년 성곽을 개축하여 지화문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 [남문앞 역사터]는 성남시가 2007. 11. 19 준공하였으며, 성문 앞의 380여 년 된 느티나무와 함께 호국정신이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남한산성 제1남옹성 발굴조사 안내판

 

남한산성 제1남옹성의 모습

 

남한산성 제1남옹성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문을 더 둘려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만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금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건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 중 3개의 옹성이  산성 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안하고 신남성으로 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제1남옹성은 이 3개중 서쪽의 첫번째 옹성이다.

둘레가 426m이고, 옹성 끝에는 8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뒤로 장수의 지휘를 위한 축대가 설치되어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남한산성 제1남옹성 포대의 모습

 

팔각정자 및 쉼터의 모습

남한산성 제1남옹성 좌측편에 두고 편안한 등로길로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팔각정자 쉼터가 나오고 주변에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등산객이나 주민들의 휴식공간이다. 쉼터를 통과하여 내려서면 시멘트 포장도로 삼거리에 도착하고  시멘트 포장도로는 검단산 정상에 위치한 군부대와 KT 통신시설물 진입도로이다.


팔각정자 앞 이정표

 

 남한산성 제1남옹성 포대의 모습


시멘트포장도로 삼거리

군부대와 KT 통신시설물로 연결되는 시멘트 도로에 내려 잠시  도로 따라 진행하다가 우측방향 능선으로 진행후 다시 도로를 만나 검단산입구 갈림길까지 포장도로 따라 진행한다. 


포장도로 삼거리 앞 이정표


 포장도로 삼거리 앞 이정표


 포장도로 갈림길 통과

포장도로 따라 계속 검단산 입구 사거리까지 진행해도 무방하지만 가능한 마루금을 가까이 걷고 싶은 마음에 능선으로 진행한다.


남한산성 유원지(민속공예관) 갈림길의 모습

 

남한산성 유원지(민속공예관) 갈림길 이정표

검단산방향으로 직진으로 진행한다.


 남한산성 유원지(민속공예관) 갈림길


 남한산성 유원지 갈림길 이정표


포장도로 접속

재설함이 있는 지점에서 포장도로 접속하고 포장도로 따라 진행한다. 마루금은  우측편으로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어 부득이 도로 따라 진행한다.


이배재고개 삼거리의 모습

이곳에서 좌측편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면 검단산정상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이배재고개로 가는 단축로가 된다. 검단산방향은 직진으로 진행한다.

 

이배재고개 삼거리 이정표


검단산 입구 사거리의 모습

우측편으로 군부대 정문이고, 직진은 KT통신 시설물이 있어며 검단산 정상은 좌측방향 비포장 도로 따라 약300m 진행하면 있다.

 

현위치 검단산 119 이정표

 

검단산 사거리 이정표


상천약수터 삼거리의 모습

 

검단산 입구 사거리 통과후 뒤돌아 본 모습

남한산성 남문방향은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성남 검단산[黔丹山, 해발534.7m] 정상부에 있는 헬기장의 모습 

성남 검단산은 넓은 헬기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석은 우측편 모서리 부분에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헬기 이착륙 때문인것 같다. 실제 검단산 정상은 공군부대와 KT 통신시설물이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을 성남 검단산 정상을 대신한다. 검단산정상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검단산 정상에서 좌측편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면 검단산 정상 직전 이배재고개 방향으로 우회하는 등산로와 만나게 되는 갈림길삼거리에 도착하고 우측방향으로 전환하여 진행한다


검단산(黔丹山, 해발535m)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과 광주시 중부면 검북리 경계에 있는 산이며, 정상부에는 헬기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면 정상석이 헬기장 한쪽 구석에 설치되어 있다. 마루금은 좌측편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면 사거리가 나오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한다.


검단산[黔丹山, 해발534.7m]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며 높이 534.7m, 청량산(淸凉山)[479.9m]과 함께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는 산이다. 탄천이 중앙부를 북류하고 그 좌우에 지류가 발원하는 산지가 형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형을 띠고 있다. 성남시의 지세에서 동쪽의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에 위치하는 청계산(淸溪山)[618m] 줄기와 함께 전체적인 성남시의 동서 방향의 경계를 이룬다. 검단산의 동쪽 너머는 경안천 유역으로, 행정구역상 광주시에 해당한다. 검단산을 중심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서쪽의 청계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지에 비해 전반적으로 평균고도가 낮고 완만한 사면이 발달해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으로 성남시가지 조성계획 당시 시가지가 입지하는 데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로 태평동, 신흥동, 단대동, 금광동, 상대원동, 중동, 성남동, 수진동을 중심으로 하는 원 성남과 야탑동에서 구미동에 이르는 분당시가지는 모두 탄천과 동쪽 산지에 조성되었다. 현재의 검단산 정상부에는 한국통신의 대규모 중계시설이 입지하고 있으며, 공군의 통신부대도 한국통신 중계소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산의 최정상부는 면적은 넓지 않지만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어 헬리콥터 이, 착륙장이 건설되어 있으며, 남한산성으로부터 등산로와 작업용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검단산 남쪽 비탈, 해발 고도 400m 일대에는 야생 동식물 보호 구역이 있다. 


검단산[黔丹山, 해발534.7m] 정상석에서 인증샷

 

망덕산방향 갈림길 사거리의 모습

 

 망덕산방향 갈림길 사거리 이정표


506봉 갈림길 통과

검단산에서 내려서면 나무의자 두개가 설치된 지점에 도착하고 그옆으로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일반 등산객들은 506봉에 오르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데 506봉이 검단지맥 마루금에 접속되어 있어 오늘도 506봉에 올라보도록 한다. 나무의자 뒤편 우측편 오솔길 따라 오르면 정상부에 돌탑이 설치되어 있어 506봉 보다는 돌탑봉으로 많이 통한다.

 

 506봉 갈림길 이정표


506봉 (돌탑봉) 통과

506봉 주변에는 중앙부에 돌탑이 설치되어 있고 그 옆으로 식탁과 나무의자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506봉을 통과 하여 내려서면 원 등로길을 만나게 되고 이정표가 있는곳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한다.

506봉에서 인증샷

 

현위치 상대원능선 사거리의 모습


 현위치 상대원능선 119 이정표


현위치 상대원능선119, 112 이정표

 

현위치 상대원능선 이정표

 

 현위치 상대원능선 이정표

 만수천 약수터의 모습

상대원능선 이정표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좌측편으로 약수터가 나오는데 한겨울 이지만 약수물이 잘나온다. 약수물 한잔 마시고는 망덕산정상으로 향한다.


사기막골 갈림길의 모습

약수터에서 내려서면 사기막 갈림길에 도착하고 우측방향은 사기막골로 하산하는 길이고, 직진방향이 망덕산 왕기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로길이다.

 

현위치 사기막골 갈림길 119 이정표


사기막골 갈림길 이정표 


 완만하게 오르는 등로길의 모습


망덕산 직전에 있는 갈림길의 모습

좌측방향은 우회하는 등로길이고 나무계단이 설치된 등로길로 올라 망덕산 정상으로 향한다.

 

 망덕산 직전에 있는 갈림길 이정표


 현위치 사기막능선 119 이정표


성남 누비길(신남성 돈대)

남한산성의 방어기지 검단산 정상부에 축조한 2곳의 돈대를 가리키며 서쪽에 있는 것은 서돈대, 동쪽에 있는 것은 동돈대로 불리운다. 돈대는 성을 쌓을 여건은 안되지만 전략적인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의 침입이나 정찰, 탐색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이다. 이곳은 남한산성 동쪽에 있는 한봉과 함께 산성의 방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었다.

 

현위치 망덕산 정상 119 이정표


 망덕산 정상에 있는 성남 누비길 노선 안내도

 

 

 망덕산(왕기봉, 해발500.3m) 표지석

망덕산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와 광주시 중부면에 걸쳐있는 봉우리이며, 정상에는 정상석과 쉼터의자

그리고 식탁이 설치되어 있고 그 옆으로 이정표와 현위치 이정목이 자리잡고 있다. 

 

망덕산(왕기봉, 해발500.3m) 표지석에서 인증샷


 망덕산 왕기봉(해발 500.3m)

 예전에는 망덕산에 정상석이 없고 이점목만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상석을 진흥산악회(2002년 4월 26일)에서 설치하였고 높이를 500.3m로 표기해 두었다. 정상 주변에는 여러개의 식탁과 나무의자가 설치되어 있어 휴식 장소로 적합한 장소이다. 이배재는 직진으로 밧줄이 설치된 급경사 내리막길내려서면 완만한 등로길을 만나게 되고 다시 나무계단을 밀어 올리면 보통골 갈림길봉에 도착한다.


급경사 내림길의 모습

 

안말 갈림길의 모습

 

 안말 갈림길 이정표


보통골 갈림봉에 있는 돌탑의 모습


현위치 보통골 갈림길 119 이정표

안말 갈림길에서 로프가 설치된 직진 등로길로 올라서면 보통길 갈림길봉에 도착하고 내려섰다 오르면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형제봉에 도착한다.


이배재정상(형제봉, 해발465m)

465봉(형제봉)에는 119 현위치 이정표에는 '현위치:이배재 정상'이라고 표기 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이곳을 형제봉이라 표기 하였다. 이제 465봉부터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이배재까지는 오르막이 없은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잠시 주변 조망과 인증샷을 남기고는 밧줄이 설치된 내리막길을 따라 이배재로 향한다.

밧줄이 끝나면서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2차선 포장도로 위에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어 구름다리를 지나 내려서면 이배재고개에 도착한다. 이배재표지석에서 인증샷을 찍고는 2차선 도로를 횡단하여 성남시 모란역으로 가는 3-3번 버스를 기다린다.


현위치 이배재정상 119 이정표

 

 이배재정상(형제봉, 해발465m)에서 인증샷


 이배재정상(형제봉, 해발465m) 이정표


 이배재정상(형제봉, 해발465m)을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로프가 설치된 급경사지 내림길의 모습

 

로프지역 내림길 통과

다시 로프가 설치된 곳을 만나고 잠시후 나무계단 내림길이 진행된다.

 

등로 이정표

 

로프가 설치된 내림길의 모습

 

이배재 직전에 있는 나무계단 내림길 진행

 

이배재 구름다리의 모습

 

이배재에 설치되어 있는 성남 누비길 검단산 안내도

 

이배재고개(338번지방도)

이배재고개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과 광주시 송정동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며 도로 건너편으로 '이배재고개'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338번 지방도  좌측 고개마루에 '광주시 송정동'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도로 건너편으로 다음에 진행할 제 3구간의 산행들머리 입구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배재고개를 지나는 노선버스는 3대가 있는데 주변에는 버스정류장이 없다. 버스정류장은 없지만 타고 내리는 것은 지장이 없다.


이배재[二拜재, 해발260m]

이배재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과 광주시 목현동을 연결하는 고개이며, 성남시 중원구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청량산과 검단산 산줄기를 넘는 고개로서 해발고도 300m상에 위치한다.‘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는 뜻의 이배재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조선시대의 유학자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하여 절을 두 번하고 길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북쪽으로는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을 거쳐야 광주시로 넘어갈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갈마치고개, 새마을고개, 태재 등의 고갯길이 두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현재 이배재를 통과하여 지방도 338호선[공단로]이 지나고 있다. 이 도로는 중원구 상대원동에 위치하는 성남산업단지와 직접 연결되어 출퇴근 차량에 의한 통행량이 많으며 교통량의 증가가 계속되어 도로 확장과 터널 건설이 추진 중이다.


이배재[二拜재, 해발260m]에서 인증샷 

이배재[二拜峴]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과 광주시 목현동을 연결하는 고개이며, 성남시 중원구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청량산과 검단산 산줄기를 넘는 고개로서 해발고도 300m상에 위치한다.‘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는 뜻의 이배재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조선시대의 유학자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하여 절을 두 번하고 길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북쪽으로는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을 거쳐야 광주시로 넘어갈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갈마치고개, 새마을고개, 태재 등의 고갯길이 두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현재 이배재를 통과하여 지방도 338호선[공단로]이 지나고 있다. 이 도로는 중원구 상대원동에 위치하는 성남산업단지와 직접 연결되어 출퇴근 차량에 의한 통행량이 많으며 교통량의 증가가 계속되어 도로 확장과 터널 건설이 추진 중이다



 시내버스 3-3번 노선도

이배재에서 모란역으로 연결되는 노선이다.


이배재고개에서 3-3번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모란역에 도착한다

뒤풀이 장소를 어디로 할까 생각하다가 며칠전에 몇개의 장소를 검색해 두어 모란역 주변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족발집으로 이동하여 뒤풀이를 즐긴다.


오늘 산행은 산행거리가 약15km 이지만 등로길이 완만하여 예상보다 빨리 완주하게 되었다

아마도 다음 구간도 이번구간 보다는 산행거리는 약2km 정도 많지만 비슷한 수준의 산행지 있다

그러나 그 다음 산행지는 그 유명한 광교산과 백운산 그리고 바라산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코스인데 한코스로

진해할까 아니면 두코스로 나누어서 진행할까 고민중이다. 나 홀로 산행이라면 동천역에서 옛골 인능산까지 완주하고 다음으로 수서역에서 사당역으로 이어가고 싶지만...


아무튼 아무런 사고없이 수도권 55산 제2구간을 무사히 마치게 해준 수경친구에게 지면으로 감사의 말씀 전하고 다음 구간에서도 반갑게 뵙길 기대합니다.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