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5. 12:03ㆍ★ 9 정맥/- 8. 한남금북[완료]
한남금북정맥 1구간(갈목재~속리산 천왕봉)
산 행 지 : 충북 보은군 내속리산면, 경북 상주시 하북면 속리산 천왕봉(해발1057.7m)한남금북정맥 1구간
산행일시 : 2013년 10월 19일(토요 당일산행)
산행코스 : 갈목재-651봉-불목재-574봉-아랫 대목재-638봉-687봉-윗대목재-666봉-807봉-923봉-
천왕봉[한남금북정맥 마루금]-헬기장-장각동-칠층석탑-장각폭포-화북야영장-주차장
산행시간 : 10:00~17:30 (7시간30분, 식사 및 휴식, 알바 포함)
산행거리 : 약 20Km(정맥 10.2Km, 접속구간 7.6Km, 알바 2.2km), GPS 23.2Km
산행날씨 : 맑음
산행인원 : 42명
산행코스 및 구간거리 : 갈목재-2.4/2.7km(1시간)-불목이재-3.5/4km(1시간30분)-667.3봉-2.4/3.1km(1시간
10분)-923봉-0.7/0.8km(30분)-속리산(천황봉)-4.3/4.7km(1시간10분)-정각동-
2.2/2.5km(40분)-화북야영장 주차장===============15.5/17.8km(7시간)
구간 |
거리(km) |
출발시간 |
소요시간 |
비고 |
갈목재 |
- |
10:00 |
- |
해발390m, 505번 지방도, 이정표, 좌측편능선으로 진행 |
불목이재 |
2.7 |
11:40 |
1시간40분 |
580봉에서 40여분간 알바, 철조망 설치되어 있음 |
667.3봉 |
4 |
13:05 |
1시간25분 |
삼각점, 조망없음, 직,우측방향으로 진행, 휴식20분 점심식사 |
923봉 |
2.7 |
14:28 |
1시간23분 |
조릿대군락지, 정상직전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 665봉에서20분 휴식 |
천황봉 |
0.8 |
15:00 |
32분 |
정상석, 삼각점, 이정표, 조망좋음, 20분 휴식 |
장각동 |
4.7 |
16:55 |
1시간55분 |
천황봉헬기장에서 입석대왕복(30분소요) 장각동으로 하산 |
화북야영장 |
2.5 |
17:30 |
35분 |
경북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340-8 |
마루금 |
10.2 |
|
4시간20분 |
580봉에서 40분 알바[미포함] |
접속거리 |
7.6 |
|
2시간11분 |
입석대 왕복 포함, 화북야영장까지 거리 |
알바거리 |
2.2 |
|
40분 |
580봉에서 651봉 아래까지 거리 |
총 거리 |
20 |
|
7시간30분 |
알바구간 미포함시 정걱동까지는 6시간 소요 |
GPS거리 |
23.2 |
|
|
|
제 1구간 속리산 천황봉~갈목재
한남금북정맥 1구간[천왕봉-갈목재] 트렉도
한남금북정맥 1구간[천왕봉-갈목재] 고도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속리산의 천황봉(千皇峰)에서 서북으로 뻗어 충북의 북부 내륙을 동서로 가르며 경기 안성군 칠장산(七長山)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종착지의 칠장산에서는 다시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文殊山)까지의 한남정맥(漢南正脈)으로 이어지고, 남서쪽으로는 태안반도(泰安半島)에 있는 안흥(安興)까지의 금북정맥(錦北正脈)으로 이어진다.
이 산줄기의 산들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천황봉에서 갈라져 말태재 ·구치(九峙) ·시루산 ·구봉산(九峰山) ·국사봉(國師峰) ·선두산(先頭山) ·선도산(先到山) ·상봉재 ·상당산성(上黨山城) ·좌구산(坐龜山) ·칠보산 ·보광산(普光山) ·행태고개 ·보현산(普賢山) ·소속리산 ·마이산 ·차현(車峴) ·황색골산 ·걸미고개 ·칠장산 등으로 이어진다.
도협명
1/25000 : 상판, 관기, 속리천, 은행, 내수, 미원, 청안, 음성, 쌍성, 생극, 죽산(11매)
한남금북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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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금북정맥 분기점인 속리산 천왕봉구간은 정맥을 시작한지 두달이 되지만 첫구간[속리산 천왕봉~갈목재] 산행을 못하고 있는 상태다. 비탐방구간[출입금지구간]이라 국공파의 눈을 피해 맥을 잇는 관계로 관광객이 많고 단풍이 물들어 오르는 지금 산행을 계획한다.
4년전(2009.10.23-24) 백두대간 마루금을 진행하면서 한남금북정맥 분기점을 지나쳤다. 차가운 날씨에 천왕봉에 올라 우측편 능선을 바라보며 국토의 70%가 산으로 되어 있다는것을 실감하며 우측편으로 이어지는 능선 줄기는 어디로 가는걸까?
많은 궁금함이 있었는데...
그시절만 하더라도 정맥이나 기맥, 지맥, 분맥, 단맥이라는 의미도 모르고 산이 좋아 산으로만 다니던 시절이었다. 온라인 산악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조금씩 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배우고 익혀 지금은 그시절 보다는 많은것을 알고 배울려고 노력하는중이다.
백두대간이 큰줄기라 생각하면 정맥 마루금은 대간의 잔가지라고 생각한다. 정맥에서 또 다시 잔가기가 생겨 기맥이나 지맥으로 연결되는것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하였던가 '산은 물을 넘지 못하며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맥길은 강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고 현대 문명이 발전함에 있어 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가는 수모도 당하고 있는 실태다.
아침부터 요란하게 기상벨 소리가 울린다. 기상을 하여 베란다 창밖을 열어보니 가을의 기온이 느껴지고 옆지기가 준비한 음식물을 냉장고에서 챙겨 베낭에 넣고는 상일동 육교 집결지로 향한다. 상일동 집결지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하신 회장님이 반겨주시고 잠시후 버스가 도착한다. 버스에 올라 대원들과 반갑게 인사을 나누고는 자리에 착석가 동시에 버스는 목적지로 출발한다.
중부고속도로을 거쳐 음성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 및 휴식을 취하고 갈목재로 출발한다. 출발하는 버스에서 회장님의 오늘 진행하는 속리산 천왕봉 산행 설명이 이어지고 잠시후 꿈나라 여행을 떠난다. 버스는 중부고속도로 충주IC을 빠져나와 37번 도로을 이용하여 갈목삼거리에서 505번 지방도로로 변경하여 좁은도로을 돌고돌아 갈목재에 도착한다.
오늘진행하는 한남금북정맥 마루금은 갈목재-속리산 청왕봉까지는 출입금지구간이라 국고파 눈을 피해 진행하는 관계로 기념 사진촬영도 못하고 신속하게 우측능선으로 진행한다.
송백산악회에서 제공한 지도
갈목재(葛目峙, 해발390m )
갈목재 위치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갈목리 산9-3
갈목재는 서북쪽의 보은군 속리산면 갈목리와 남동쪽의 삼가리를 접하고 있는 505번도로 "비룡동관로"의 고갯마루이며,37번 국도 속리산의 관문을 통과하여 갈목삼거리에서 505번 지방도로을 이용하여 S자 형태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올라서면 갈목재에 도착하고 해발 390m라고 표시된 이정표가 좌측편에 설치되어 있었다.
갈목재는 지난번 구간에 이어 두번째 맞이하는곳이며 갈목재는 삼가 저수지에서 갈목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에 갈목 마을이 있으며 마을 주위에 칡넝쿨이 많아 갈목이라 하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또 하나의 설은 길이 갈라지는 목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갈목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보은 8항의 하나라고도 한다. 갈목재에서 속리산 방향인 삼가 저수지를 내려가는 길목이 흡사 강원도 구룡령을 내려가는 길과 흡사할 정도로 꼬불꼬불 하기만 하다.
갈목재는 보은군 속리산면 갈목리와 삼가리를 접하고 있는 505번 지방도 고개마루에 있으며, 한남금북정맥 마루금은 속리산 천황봉에서 회엄이재까지는 출입금지구간이라 국공파의 눈을 피해 산행을 해야 하는관계로 갈목재에 내려 신속하게 산으로 오른다.
갈목재에서 좌측편 능선을 신속하게 올라 안부에서 베낭정리을 하고는 편안한 등로길로 이어간다. 오늘 진행할 마루금은 갈목재가 해발 390m이며 , 속리산 천왕봉이 해발1057.7m라 약600m의 고도를 서서히 높혀야 함으로 힘든 여정이 시작된다.
안부에서 편안한 등로길을 완만하게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묘지가 나오는데 멧돼지의 공격을 받아 묘지가 엉망이된곳을 지나명 경사지가 나오고 한차례 밀어올리면 515봉에 도착한다.
515봉을 우회하여 진행하면 경사지가 나오고 우측편으로 삼가저수지가 조망되면서 시원한 바람이 우리을 맞이한다. 능선안부에 도착하여 편안한 등로길을 걷다보면 550봉에 도착한다. 550봉에서 내려서면 급경사 내리막이 나오고 낙엽으로 인하여 미끄러움이 심하며 조심해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은진송씨 묘지가 나오고 묘지을 통과하면 급경사지을 올라서면 585봉에 도착한다.
585봉에서 완만하게 진행하면 580봉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밤나무가 많은곳이 나오고 올라서면 폐허가된 헬기장을 지온다. 헬기장에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철조망이 설치된지점에 도착하며 지금 내려서면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는 불목이재에 도착한다.
580봉 삼거리에서 잘못하면 알바하기 쉬운구간이다. 우리 대원들은 이곳에서 직진방향이 우측편 등로길 보다 뚜럿하여 속리산환종주길인 651봉까지 진행후 다시 복귀하여 불목이재로 내려섰다
* 보은 4증 8항
증은 시루라는 뜻이며 항은 목덜미라는 뜻으로 급소를 말한다고 하는데 도선국사의 도참설에 나오는 것으로 재해재난으로 부터 안전한 지대를 뜻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피난처가 되는 곳이다.
보은에는 4증 8항이 있는데 4증 중 동증은 마로면 적암리 시루봉, 남증은 마로면 변둔리 시루봉, 서증은 수한면 질신리와 광촌리 사이의 시루봉, 북증은 내북면 이원리 시루산을 말한다.
8항은 가항(구병리 멍에목이), 갈항(갈목리), 오항(성주리, 삼년산성 주변), 불항(불목), 구항(장갑 비들목), 사자항(속리산 중사자암 부근), 치항(마로면 임곡리 솔개미봉), 상자항( 확인 안됨)이라고 한다.
갈목재 들머리지점[뒤돌아본 모습]
갈목재구간은 단속구간이라 버스에서 내려 신속하게 좌측편 능선으로 올라 안부에서 베낭정리을 하고는 마루금 이어간다. 정상적으로 한남금북정맥 마루금은 천왕봉에서 갈목재로 내려서야 하지만 단속구간라 부득히 역방향으로 진행한다.
안부통과
갈목재에서 능선을 신속하게 올라 안부에서 베낭정리을 하고는 편안한 등로길로 이어간다. 오늘 진행할 마루금은 갈목재가 해발 390m이며 , 속리산 천왕봉이 해발1057.7m라 약600m의 고도를 서서히 높혀야 함으로 힘든 여정이 시작된다.
김해김씨묘 통과
갈목재 완만하게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묘지가 나오는데 멧돼지의 공격을 받아 묘지가 엉망이었다.
경사지 통과
묘지을 통과하면 경사지가 나오고 한차례 밀어 올리면 515봉에 도착한다.
안부통과
갈목재에서 경사지 안부까지 약10여분이 소요된다. 묘지에서 경사지을 올라서면 안부에 도착하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한다.
무명봉 우회하면서 뒤돌아본 모습
편안한 등로길을 진행하면 약 515봉 직전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오르지 않고 좌측방향으로 우회하여 진행한다.
515봉의 모습
550봉 오르는 경사지의 모습
515봉을 우회하여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방향은 515봉으로 진행하는 등로길이고, 좌측방향은 불목이로 이어지는 등로길이다.
550봉 급경사지의 모습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등로길이 급경사지라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흘려 내리고 우측편으로 삼가저수지가 조망되었다.
550봉 안부 통과
한차례 밀어올리면 안부에 도착하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한다.
550봉 통과
급경사 내리막길의 모습
550봉에서 내려서면 급경사 내리막이 나오고 낙엽으로 인하여 미끄러움이 심하다. 조심하여 내려서야 한다.
은진송씨 묘지 통과
550봉에서 내려섰다가 오르면 좌측편으로 묘지가 나오고 묘지을 통과하면 또 다시 경사지가 시작된다.
585봉 급경사 오름길의 모습
은진송씨 묘지을 통과하면 급경사 오름길이 나온다.
585봉 통과
585봉을 올라 완만하게 진행한다. 580봉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방향전환하여 내려서야 하는데 그냥 앞서가는 대원 따라 진행하다가 대형 알바을 하고 말았다.
580봉 갈림길의 모습
길주의] 은진송씨 묘지을 올라 585봉에서 완만하게 진행하다보면 첫번째 갈림길이 나오는곳이 580봉이며 이곳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내려서면 되는데 직진을 하여 651봉을 지나 경사지을 내려섰다가 속리산가 멀리지는 느낌이 들어 원 위치로 돌아오는 소요시간이 약40여분이 되었다.
580봉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내림길이 나오고, 잠시후 밤나무군락지가 나와 이곳에서 밤을 몇개 주어 먹고는 불목이로 이동한다.
폐허가된 헬기장 통과
밤나무가 많은곳에서 올라서면 헬기장이 나오는데 폐허가 되어 잡풀들이 무성하였다 .마루금은 우측방향으로 진행한다.
철조망의 모습
폐허가된 헬기장에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고, 철조망 옆으로 진행한다. 선답자의 후기을 보면 철조망이 없었는데 개인의 땅으로 이곳에 산약초 및 농작물재배로 인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기 위해 얼마전에 철조망을 설치한것 같았다.
불목이재(佛目里峙 ) 통과
불목이재는 웃갈목이에서 삼거리 불목이로 넘어가는 고개로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의지형이 부처님의 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불목리라 했으나 예전에 마을이 있었으나 화전민(火田民) 정리 때 다른 곳으로 이주 하였다고 한다.
불목이재에서 철조망 사이길로 진행하다보면 461봉에 도착하며 지나온 마루금과 알바한 구간을 뒤돌아본후 550봉 경사지을 오른다. 550봉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무인감시카메라탑이 있는 577봉에 도착하면 이곳에서 후미조와 함께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는 좌측편 완만한 등로길을 이어간다.
무인감시카메라가 있는 577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완만하게 진행하면 561봉에 도착하고 561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조금 내려서면 또 다시 갈림길이 나오고 갈림길에서 직진방향 버리고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아래대목골 안부사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아래마을 안부사거리을 올라서면 636봉이 나오는데 오르지 않고 좌측방향으로 우회하여 635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635봉 삼거리에서 좌측방향 버리고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635봉이 나오고 조금 밀어 올리면 삼각점이 있는 667.3봉에 도착한다.
불-목이(佛目里)
삼거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터. 山形이 부처의 눈처럼 생겼다고 함. 마을이 있었으나 화전정리때 이주하였다.불목이재는 웃갈목이에서 삼가리 불목이로 넘어가는 고개
불목이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문
개인의 재산이라지만 산에 이렇게 철조망까지 설치하고, 출입하여 농작물을 채취 및 포획시 민,형사상 처벌을 받게 된다고 알리고 있는데 참! 세상살이가 허망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넘 무섭고 겁나는 세상이다.
불목이재을 통과하여 계속되는 철조망 사이로 진행한다.
461봉에서 뒤돌아본 마루금의 모습
580봉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야 하지만 대형 알바구간인 651봉 통과후 내려섰다가 잘못 진행하는것을 알고는 다시 580봉까지 돌아와서 불목이재로 진행하여 이곳까지 이어왔다.
550봉 오름길의 모습
550봉 통과
경사지을 올라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무인감시카메라탑이 있는곳에 도착한다.
577봉 무인감시 카메라
이곳에서 간단하게 음식물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는 좌측방향으로 진행한다.
561봉통과
무인감시탑이 있던 577봉을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561봉이 나오고 우측방향으로 전환하여 조금 내려서면 다시 갈림길이 나오고 직진길 버리고 우측방향으로 내려선다.
갈림길 통과
561봉 아래에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한다.
아래대목골 안부 사거리 통과
등로길이 뚜럿하지는 않지만 희미하게 있고, 우측방향은 대목리 아랫대목골로 이어지는 등로길이며 좌측방향은 상판리 새터말마을로 이어지는 등로길이다.
한남금북정맥 마루금 첫구간은 대부분 우측편에 있는 대목리에서 시작하여 백두대간길인 대목리삼거리을 거쳐 천왕봉에서 갈목재로 이어지는 코스을 많이들 선호하는데 지금은 단풍철이라 갈목재에서 천왕봉을 거쳐 비로봉, 입석대, 신선대, 문장대을 거쳐 시어동으로 내려서는 코스을 정하여 진행한다.
갈림길 통과
636봉 오르지 않고 우회하여 진행하면 635봉에 도착한다.
635봉 통과
636봉을 우회하여 진행하면 635봉 삼거리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무명봉통과
635봉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섰다가 오르면 무명봉이 나오고 중앙부에 야영을 했는지 평탄한 공터가 있었고 직진으로 진행한다.
635봉 통과
667.3봉 통과
667.3봉 주변에는 기둥으로된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고, 조망은 없었다. 삼각점을 찍고는 천왕봉으로 진행한다. 687봉 오름길에 우측편으로 속리산 천왕봉이 조망되고 앞으로 이어갈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온다.
687봉을 지나 내려섰다가 오르면 620봉에 도착하고 다시 내려서면 윗대목골 안부사거리가 나온다. 안부사거리에서 좌측방향은 속리산 법주사방면이고, 우측방향은 대목리 윗대목골방면이다. 천왕봉 방향은 직진이며 이곳을 올라서면 속리산 조망이 좋은 665봉에 도착한다.
윗대목골 안부사거리에서 직진으로 올라서면 665봉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본 속리산의 모습들은 일품이라 말할수 있으며. 이곳에서 먼저와 있던 대원들과 함께 과일을 먹고는 후미을 기다려 보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우측편으로 이용하여 천왕봉으로 진행한다.
665봉에서 내려섰다가 오르면 807봉 학소대을 오르는 등로길이 나오는데 너덜바위가 있고 급경사지라 험준한구간 이었다. 807봉을 통과하여 올라서면 923봉 직진에 조릿대군락지가 나오고 923봉을 오르지 않고 우측방향으로 우회하여 진행한다.
923봉을 우회하여 올라서면 멋진 조망지가 나오고 조망지에서 산세을 감상하고는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니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바위로 올라서니 조릿대가 무성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조금더 밀어올리니 한남금북정맥 분기점에 도착한다.
이곳은 2009년10월23일 백두대간을 하면서 스쳐지나간곳이며, 그때는 운무로 인하여 조망이 불순하여 조망도 못보았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 속리산 전체을 조망할수 있을것 같았다.
속리산은 행정규역이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외속리면. 경북 문경시, 화북, 화남면에 접하는 산맥으로 한국 팔경 중의 하나이다. 태백산에서 남서방향 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백두 대간이 지나고 천왕봉에서 한남금북 정맥이 분기하고 있다. 속리산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변성퇴적암이 섞여 있어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높고 깊은 봉우리와 계곡은 가히 절경을 이루고 있어 광명산(光明山),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이 천왕봉으로 개명되었다. 산림청의 ‘우리 산이름 바로찾기 캠페인에 따라 경북상주시지명위원회를 열어 속리산 천황봉(해발 1057m)의 이름을 천왕봉으로 바꾸기로 의결했다. 천황봉은 왕(王)이던 지명이 일본 천황을 가리키는 황(皇)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지금까지 논란이 있었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 1구간을 마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후미을 기다리며 천왕봉에서 멋진 풍경을 조망하면서 기다린다.
667.3봉에 설치되어 있는 삼각점의 모습
속리산 천왕봉 조망
속리산은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산의 이름은 원래 9개 봉우리로 이어져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 하였고. 광명산(光明山) 형제산(兄弟山). 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등 여러 별칭을가지고 있었으며 우리나라 8경중 하나로 경관이 뛰어날뿐 아니라 천연 기념물이 풍부하다.
속세와 이별한다는 뜻을지닌 지금의 속리산이라는 지명을 갖게된것은 784년(신라선덕여왕5년)에 진표(眞表)대사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끓었다. 이를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 오죽 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대사를 따라 입산수도 하였는데 여기에서 ‘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한다.
천황봉을 주봉으로 비로봉. 입석대. 신선이 놀았다는 신선대. 문수봉. 문장대. 관음봉. 묘봉. 상학봉. 등 화강암으로 이루어진봉우리들로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활짝핀 연꽃 봉우리를 연상케한다.
또한 속리산 암자들 중에서 가장높은곳에 위치한 상고암(上庫庵)은 비로봉밑에 93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데 신라때 720년 창건 되었으며 암자 이름중에 ‘고(庫)’ 자를 쓴것은 법주사 법당을 지을때 천황봉 소나무를 벌목하여 저장해두었던곳이어서 상고암이라 하였고 특히 이곳의 홍송(紅松)은 그 향기가 대단하여 목침으로도 애용 되었으며 이곳은 만리풍이 부는곳으로 여름에는 모기가없고 겨울에 눈은 대관령에 내리는날 이곳에도 온단다. 만리풍이란 한반도 전역 멀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하여 스님들이 붙인 이름이다.
윗대목골 안부사거리 통과
좌측방향은 속리산 법주사방면이고, 우측방향은 대목리 윗대목골방면이다. 천왕봉 방향은 직진이며 이곳을 올라서면 속리산조망이 좋은 665봉에 도착한다.
665봉 통과
665봉에서 바라본 속리산 산세의 모습들은 일품이었다. 이곳에서 먼저와 있던 대원들과 함께 과일을 먹고는 후미을 기다려 천왕봉으로 진행한다.
665봉에서 바라본 속리산일대의 산세들의 모습
665봉에서 바라본 대목리 윗대목골일대의 모습
807봉 직전에 있는 너덜지대의 모습
665봉에서 내려섰다가 807봉 학소대을 오르는 등로길은 험준하고 바위들이 있었다.
807봉 학소대 통과
주변에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있었고, 나무사이로 조망이 일품이었다.
조릿대군락지 통과
923봉 직진에 있는 조릿대군락지을 통과하여 진행하면 923봉을 오르지 않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하게된다.
조망지에서 저멀리 백두대간 마루금 조망
조망지에 있는 멋진 소나무의 모습
갈림길 통과
조망지을 통과하여 올라서면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바위로 올라야 한다. 이지점에서 직진으로 진행하면 낭떠어지라 우측방향으로 우회하여 진행한다.
갈림길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갈림길에서 우측편으로 내려 다시 좌측방향으로 올라 우측바위로 올라서야 한다. 이곳에 구름다리가 있다면 직진으로 통과할수 있는구간이다.
조릿대군락지 통과
923봉에서부터 천왕봉까지는 조릿대군락지로 이루어져 있었고, 조금만 진행하면 출입금지구간을 통과하게되고 백두대간 마루금에 도착한다.
한남금북정맥 분기점
조릿대가 무성한곳을 통과하니 준,희님의 표지기가 나오고 조금더 진행하면 백두대간 마루금 등로길이 나온다.
백두대간 마루금 삼거리 통과
4년(백두대간 2009.10.23)만에 이지점을 지나치는것 같아. 그때는 운무로 인하여 조망이 불순하여 조망도 못보았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 속리산과 저멀리까지 조망할수 있을것 같았다.
속리산 삼파수(三派水)란 천왕봉으로 떨어진 빗물이 세 갈래로 갈라져 흐른다는 것이다. 남과 북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서쪽으로 뻗는 한남금북정맥을 기준으로 북쪽은 한강,남쪽은 금강,동쪽은 낙동강의 분수령이 되는 꼭지점이다. 한반도 4대강 중에 3개 강의 지류를 만드는 한반도의 심장부와 같은 곳이 속리산 천왕봉이다.
한남금북정맥 마루금 출입금지구간 안내판
출입금지구간 : 천왕봉-갈목재-회엄이재
출입금지거리 : 10.2km
출입금지 위반시 : 50만원[지금은 10만원인데, 오래전에 설치되어 변경하지 않음]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갈목재에서 천왕봉삼거리까지 도착했다 비록 580봉에서 대형 알바을 했지만 한남금북정맥 첫구간을 마칠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천왕봉정상에서 바라본 충북알프스 마루금 조망
충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관이 빼어난 속리산과 구병산을 잇는 43.9km를 충북 알프스로 정하고, '99. 5. 17 특허청에 "충북 알프스"로 업무표장 등록을 하였다. 이곳에는 신라 진흥왕때 의신조사가 창건한 법주사와 많은 국보, 보물 등은 물론 빼어난 산수경관과 원시림 그대로 잘 보존된 구병산과 연결된다.
충북 알프스
충북 보은군 마로면 적암마을 구병산(九屛山)876m에서 시작되는 충북 알프스 충북 보은군의 구병산 ~ 속리산 ~ 관음봉 ~ 상학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충북알프스" 로 이름을 짓고 백두대간이 일부 포함된 이 능선의 길이는 43.9km이며, 능선의 평균고도는 800m대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리산에서 느낄 수 있는 육중한 산맥미(山脈美)와 설악산으로 대표되는 골격미를 번갈아 가며 맛볼 수 있는 긴 능선구간이다.
출발점은 보은군 외속리면 서원리 고시촌이 된다. 서원교 건너서 "충북알프스 시발점"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여기서 정면(동쪽)으로 보이는 산이 구병산이다. 서원리 고시촌 주차장에서 약 7.1km 지점이 된다.
구병산과 동쪽암릉사이의 안부 삼거리까지 4시간정도 소요되며, 충북알프스 전 구간 종주시에는 2박3일정도가 소요된다.
▶ 구병산 - 형제봉 - 속리산 - 관음봉 - 상학봉 43.9km, 완전 종주에 최소한 2박 3일 소요 구병산에서 속리산, 상학봉으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 43.9km를 한번에 연결해 답파하기란 쉽지 않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처럼 능선 중간에 산장 같은 숙박시설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물이 귀해 야영하는 것도 쉽지 않다. 때문에 통상 고시촌 - 장고개, 장고개 - 문장대, 문장대 - 신정리 3개 구간으로 나누어 산행하는 것이 좋다. 첫 구간인 고시촌 - 장고개 간은 구병산 주능선을 타는 코스로, 비슷비슷한 고도의 연봉들이 늘어선 본격적인 능선 종주길이다. 특별히 위험한 지점이 없고 탈출로도 여러군데 있어 비교적 안전하다.
능선 중간에는 물을 구할 곳이 없어 사전에 충분히 식수를 준비해야 한다. 거리는 약 15.7km에 9시간이 소요된다.
장고개 - 문장대 구간은 충북알프스 중 가장 거리가 긴 곳으로 이 구간의 돌파가 전체 산행을 어떻게 마칠 수 있는가 하는 관건이다. 중간에 천황봉에서 끊어 내려올 수 있으나, 상대적으로 다음 구간이 길어지고 천황봉까지 다시 접근하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2시간을 더 투자해 문장대까지 가는 것이 좋다.
구간의 대부분이 육산이지만 고도차가 커 체력 소모가 심하다. 특히 문장대에 도착하더라도 속박을 위해 먼 거리를 하산해야 하기에 여러가지 면에서 힘든 구간이다. 다음 구간으로 산행을 이어가려면 차라리 물을 구할 수 있는 천황봉 주변이나 신선대, 문장대 등지에서 비박하는 편이 훨씬 낫다. 거리 약 18km. 12시간 소요.
마지막 구간인 속리산 서북릉 문장대 - 관음봉 - 묘봉 - 상학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자그마한 암릉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구간이다. 코스는 문장대 표지석 왼쪽의 계곡으로 내려가며 시작된다. 곳곳에 페인트로 방향을 표시해 두어 길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관음봉과 문장대 사이와 상학봉에서 신정리로 내려가는 구간의 바윗길이 가장 어려운 곳이지만 위험 구간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만약을 대비해 20m짜리 보조자일을 휴대하는 것이 안전하다. 중간에 힘이 달릴 경우 묘봉이나, 북가치, 속사치 등에서 하산할 수 있다.
거리 약 11.2km에 9시간이 소요된다.
○ 산행기점인 서원리로 갈 경우, 보은읍에서 속리산 방향으로 가다 충북알프스 종합안내소인 말티휴게소에서 상주쪽으로 우회전 한다.
4.6km쯤 진행해 서원리로 들어가는 지방도로로 좌회전하여 2km 더 들어가면 고시촌이다.
구병리나 장고개는 말티휴게소에서 말티고개를 넘어 속리산 방향으로 가다가 갈목리에서 삼가저수지쪽으로 접어든다. 저수지를 끼고 난 좁은 도로를 지나 만나는 갈림길에서 우회전 하면 삼가초등학교가 나오고 이곳에서 오른쪽은 구병리, 왼쪽은 장고개로 이어진다. 신정리로 가는 길은 37번 국도에서 갈라진다. 말티고개를 넘어 속리산으로 접어들지 말고 37번 국도를 계속 따라가면 활목고개가 나온다. 고개에 이르기 3km 전에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신정리다.
천왕봉정상에서 바라본 대목리일대와 우측편 한남금북정맥마루금의 모습 조망
천왕봉정상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마루금 조망
천왕봉정상에 설치되어 있는 탐방로 안내도의 모습
천왕봉정상에 있는 삼각점
속리산 천왕봉(해발1057.7m)정상석에서 인증샷
백두대간이 우리 땅에서 처음 열린 고개인 하늘재를 지나,문경새재, 조령산, 이화령, 대야산을 지나 또 한번 불쑥 솟아 오르니, 이름하여 속리요, 그 중에서도 천황봉이다.
이후 백두대간은 지리산을 향해 줄기차게 남진하는 한편, 큰 가지 하나를 서쪽으로 뻗어 내니 그것이 바로 '한남금북정맥'이다.
한남금북정맥은 그 이름이 말하듯 한강의 남쪽 울타리이며 금강의 북쪽 울타리이기도 하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시작하여 충북의 북부내륙을 가로 질러 보은, 청원, 청주, 괴산, 음성을 거쳐 경기도 안성땅 칠장산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152km의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의 산들을 보면 백두대간 천황봉에서 갈라져 나와 말티재,시루산,구봉산,국사봉,선두산,선도산,상당산성,좌구산,칠보산,보현산,소속리산,마이산,차현,황색골산,칠장산 등으로 이어짐다.
한편, 칠장산에 이른 한남금북정맥은 북서쪽으로 한강의 남쪽을 따라 한남정맥을 갈래쳐 김포 보구곶리까지 이르고, 남서쪽으로 금강의 북쪽을 따라 금북정맥을 또 하나 갈래쳐 태안반도 안흥진까지 내달린다.
그 때문에 한남금북정맥은 온전한 정맥이라기보다는 금북과 한남을 백두대간에 이어주는 역할로 여겨져 산꾼들로부터 푸대접을 받기 일쑤이다.
그렇지만 한남금북정맥은 도상거리도 만만치 않고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산세와, 그 산자락 곳곳에 어린 숱한 전설과 이야기들로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당당한 이 땅의 정맥이다
속리산 천왕봉(해발1057.7m ) 정상석
속리산은 행정규역이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외속리면. 경북 문경시, 화북, 화남면에 접하는 산맥으로 한국 팔경 중의 하나이다. 태백산에서 남서방향 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백두 대간이 지나고 천왕봉에서 한남금북 정맥이 분기하고 있다. 속리산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변성퇴적암이 섞여 있어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높고 깊은 봉우리와 계곡은 가히 절경을 이루고 있어 광명산(光明山),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이 천왕봉으로 개명되었다. 산림청의 ‘우리 산이름 바로찾기 캠페인에 따라 경북상주시지명위원회를 열어 속리산 천황봉(해발 1057m)의 이름을 천왕봉으로 바꾸기로 의결했다. 천황봉은 왕(王)이던 지명이 일본 천황을 가리키는 황(皇)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지금까지 논란이 있었다.
속리산 천왕봉(해발1057.7m)
천왕봉을 일제시대 때 천황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여 정부에서도 바로 잡고자 한다하니 천왕봉으로 불려보며, 맥을 이어가는 산꾼님들은 천왕봉으로 표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곳이 한남금북정맥이 분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속리산 천왕봉에 떨어지는 비는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는 낙동강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한남금북정맥 능선을 따라 오른쪽으로는 남한강으로 흐르고, 왼쪽으로는 금강으로 흐른다고 하여 삼파수라 한다.
속리산(山:1057.7m)
1970년 3월 국립공원 지정한국팔경 중의 하나인 속리산은 태백산맥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하여 충북 보은군, 괴산군, 경북 상주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해발 1057.7m인 속리산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변성퇴적암이 섞여 있어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높고 깊은 봉우리와 계곡은 가히 절경을 이루고 있어 광명산, 미지산, 소금강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속리산의 유래는 784년(신라 선덕여왕 5)에 진표가 이 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 수도하였는데, 여기에서 '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화강암의 기봉과 산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산림은 천년고찰 법주사와 잘 조화되어 승경을 이루고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길상봉,문수봉 등 8봉과 문장대, 입석대, 신선대 등 8대 그리고 8석문이 있다.
은폭동계곡, 용유동계곡, 쌍룡폭포, 오송폭포, 용화온천이 있으며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 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 672종의 식물과 까막딱다구리(천연기념물 제242호),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328호) 등 희귀 동물을 포함하여 344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자원의 보고이기도 한다.
속리산(俗離山)천왕봉에서 바라본 모습
저멀리 비로봉, 입석대, 신선대, 문장대가 차례로 조망되고, 속리산은 우리의 시조이신 고운 최치원의 시에서 따왔다고 알고 있었던 이 아래의 시는 백호 임제(白湖 林悌)님의 시편이라 한다.
‘道不遠人 人遠道 [도는 사람을 멀리 않건만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山非離俗 俗離山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건만 사람은 산을 떠나네’]
보은군[報恩郡]
동쪽은 경상북도 상주시, 서쪽은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 청원군, 남쪽은 옥천군, 북쪽은 청원군과 괴산군에 접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0개 면, 246개 리가 있다. 군청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이평리에 있다. 동쪽에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린 속리산(俗離山)의 천왕봉(天王峰, 1,057m)·비로봉(毘盧峰, 1,020m)·관음봉(觀音峰, 986m) 등의 험준한 봉우리가 솟아 있고, 서쪽에 노령산맥이 가로막으면서 차츰 얕아져 구병산(九屛山, 877m)·국사봉(國師峰, 552m)·시루봉(505m) 등이 솟아 서부 저지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 사이에는 음성의 부용산(芙蓉山, 644m)에서 차령산맥과 분기하여 500∼600m의 고도를 갖는 구릉성 산지들이 남북방향으로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중앙부에는 동쪽에 학림산(鶴林山, 400m)·수철령(水鐵嶺, 536m)·구룡치(九龍峙, 506m)·새목이재(589m) 등 소백산맥의 험준한 영봉이 연이어 솟아 있고, 서쪽에 노령산맥이 가로막아 보은분지를 이루고 있다
문장대(文藏臺 1054m)
문장대는 법주사에서 동쪽으로 약 6km 지점,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위치한 해발 1,054m의 석대이다.
정상의 암석은 50여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규모이며,이곳 바위 틈에 가물 때가 아니면 늘 물이 고여 있는 석천이 있다.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라 하였으나 조선시대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치명할 때 문무 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대상에서 시를 읊었다하여 문장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곳에서는 속리산 최고봉인 천왕봉과 관음봉, 칠성봉, 시루봉, 투구봉, 문수봉, 비로봉 등 높고 낮은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가을 단풍의 진경을 보려면 상주시 화북면에서 문장대로 오르는 계곡의 산행을 빼놓을 수 없다.
장각폭포, 성불사, 오송폭포, 견훤산성 등 명승 고적이 도처에 산재하고, 여기에 가을 단풍까지 어우러져 가을 산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속리산 산세들의 모습들
천왕봉 삼각점(속리 11 2003 재설)
백두대간 및 한남금북정맥 안내
천왕봉 삼각점 안내판
헬기장 통과
천왕봉에서 후미을 약20여분 기다려보지만 오지 않고 흘린 땀이 씩어 추위지는 느낌이 들어 천왕봉 아래에 있는 헬기장으로 이동한다. 헬기장에서 한분의 대원이 정각동 계곡으로 탈출하길 원해 선두대장님께 무전으로 알리고는 천왕봉에서 앞으로 먼저가 두분의 부부을 달려 입석대에서 만나 시간이 늦은 관계로 헬기장으로 복귀하여 후미와 함께 정각동으로 하산한다.
헬기장 이정표 : 문장대 3.1km, 정각동4.0km, 천왕봉0.3km
법주사 갈림길의 모습
법주사 갈림길 이정표 : 문장대2.8km, 법주사 5.1km, 천왕봉 0.6km
법주사길림길에 있는 등산 안내도
석문통과
속리04-07 이정표 : 입석대 0.7km, 천왕봉 0.9km
석문 복귀하여 헬기장으로 이동
입석대에서 두분을 대원들을 모시고 천왕봉 아래에 있는 헬리장으로 복귀하면서 석문을 다시 한번더 사진에 담아본다.
장각동 내림길에 있는 이정표 : 천왕봉 1.6km, 장각동 2.7km
천왕봉 헬기장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완만하게 경사지을 내려선다
묘지가 있는 헬기장 통과
갈림길 통과
묘지가 있는 헬기장에서 내려서면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편으로 경사지을 내려서면 계곡이 나온다.
이정표 : 장각동 1.6km, 천왕봉 2.7km, 비로봉 2.9km
첫번째 다리통과
두번째 다리 통과
장각동 계곡의 모습
이정표 : 천왕봉 3.3km, 비로봉 3.5km, 장각동 1.0km
세번째 다리 통과
장각동 계곡의 모습
네번째 다리 통과
장각동 계곡의 모습
철문 통과
이정표 : 천왕봉 4.3km, 비로봉 4.5km, 장각동
장각동마을에 있는 전원주택의 모습
장각동마을에 설치되어 있는 등산 안내도
장각동 계곡의 모습
상오리 칠층석탑의 모습
고려 중엽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오리 7층 석탑
상오리 7층 석탑의 안내판
상주의 명소 장각폭포 안내도
금란정기 비문과 비석의 모습
금란정자의 모습
아래 윗동네 12분이 똑 같이 모금하여 정자을 만들어 금란정자라 칭하였다고 비문에 적혀있었다.
장각폭포의 모습
위치 : 경북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폭포 높이가 무려 6m이며 절벽을 타고 떨어져 작은 못을 이루어 있었다. 여름철에 있곳에서 피서하면 좋을것 같았다.
화북면 상오1리 49번 국도에 도착
상오1리 이정석의 모습
상주학생야영장
주변위치 : 경북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340-8
이곳에서 약2km 정도 49번 국도로 걸어서 화북야영장으로 이동한다.
야영장 주변에는 계곡이 흐르고 여기저기에서 야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고는 계곡에서 흘린 땀을 씻고는 버스에 올라 무사히 서울 상일동으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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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목재~불목이재]
37번 국도 속리산의 관문을 통과하여 갈목삼거리에서 505번 지방도로을 이용하여 S자 형태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올라서면 갈목재에 도착하고 해발 390m라고 표시된 이정표가 좌측편에 설치되어 있었다.
갈목재는 지난번 구간에 이어 두번째 맞이하는곳이며 갈목재는 삼가 저수지에서 갈목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에 갈목 마을이 있으며 마을 주위에 칡넝쿨이 많아 갈목이라 하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또 하나의 설은 길이 갈라지는 목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갈목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보은 8항의 하나라고도 한다. 갈목재에서 속리산 방향인 삼가 저수지를 내려가는 길목이 흡사 강원도 구룡령을 내려가는 길과 흡사할 정도로 꼬불꼬불 하기만 하다.
갈목재는 보은군 속리산면 갈목리와 삼가리를 접하고 있는 505번 지방도 고개마루에 있으며, 한남금북정맥 마루금은 속리산 천황봉에서 회엄이재까지는 출입금지구간이라 국공파의 눈을 피해 산행을 해야 하는관계로 갈목재에 내려 신속하게 산으로 오른다.
갈목재에서 좌측편 능선을 신속하게 올라 안부에서 베낭정리을 하고는 편안한 등로길로 이어간다. 오늘 진행할 마루금은 갈목재가 해발 390m이며 , 속리산 천왕봉이 해발1057.7m라 약600m의 고도를 서서히 높혀야 함으로 힘든 여정이 시작된다.
안부에서 편안한 등로길을 완만하게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묘지가 나오는데 멧돼지의 공격을 받아 묘지가 엉망이된곳을 지나명 경사지가 나오고 한차례 밀어올리면 515봉에 도착한다.
515봉을 우회하여 진행하면 경사지가 나오고 우측편으로 삼가저수지가 조망되면서 시원한 바람이 우리을 맞이한다. 능선안부에 도착하여 편안한 등로길을 걷다보면 550봉에 도착한다. 550봉에서 내려서면 급경사 내리막이 나오고 낙엽으로 인하여 미끄러움이 심하며 조심해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은진송씨 묘지가 나오고 묘지을 통과하면 급경사지을 올라서면 585봉에 도착한다.
585봉에서 완만하게 진행하면 580봉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밤나무가 많은곳이 나오고 올라서면 폐허가된 헬기장을 지온다. 헬기장에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철조망이 설치된지점에 도착하며 지금 내려서면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는 불목이재에 도착한다.
580봉 삼거리에서 잘못하면 알바하기 쉬운구간이다. 우리 대원들은 이곳에서 직진방향이 우측편 등로길 보다 뚜럿하여 속리산환종주길인 651봉까지 진행후 다시 복귀하여 불목이재로 내려섰다
[불목이재~667.3봉<삼각점>]
불목이재는 웃갈목이에서 삼거리 불목이로 넘어가는 고개로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의지형이 부처님의 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불목리라 했으나 예전에 마을이 있었으나 화전민(火田民) 정리 때 다른 곳으로 이주 하였다고 한다.
불목이재에서 철조망 사이길로 진행하다보면 461봉에 도착하며 지나온 마루금과 알바한 구간을 뒤돌아본후 550봉 경사지을 오른다. 550봉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무인감시카메라탑이 있는 577봉에 도착하면 이곳에서 후미조와 함께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는 좌측편 완만한 등로길을 이어간다.
무인감시카메라가 있는 577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완만하게 진행하면 561봉에 도착하고 561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조금 내려서면 또 다시 갈림길이 나오고 갈림길에서 직진방향 버리고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아래대목골 안부사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아래마을 안부사거리을 올라서면 636봉이 나오는데 오르지 않고 좌측방향으로 우회하여 635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635봉 삼거리에서 좌측방향 버리고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635봉이 나오고 조금 밀어 올리면 삼각점이 있는 667.3봉에 도착한다.
[667.3봉<삼각점>~천왕봉]
667.3봉 주변에는 기둥으로된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었고, 조망은 없었다. 삼각점을 찍고는 천왕봉으로 진행한다. 687봉 오름길에 우측편으로 속리산 천왕봉이 조망되고 앞으로 이어갈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온다.
687봉을 지나 내려섰다가 오르면 620봉에 도착하고 다시 내려서면 윗대목골 안부사거리가 나온다. 안부사거리에서 좌측방향은 속리산 법주사방면이고, 우측방향은 대목리 윗대목골방면이다. 천왕봉 방향은 직진이며 이곳을 올라서면 속리산 조망이 좋은 665봉에 도착한다.
윗대목골 안부사거리에서 직진으로 올라서면 665봉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본 속리산의 모습들은 일품이라 말할수 있으며. 이곳에서 먼저와 있던 대원들과 함께 과일을 먹고는 후미을 기다려 보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우측편으로 이용하여 천왕봉으로 진행한다.
665봉에서 내려섰다가 오르면 807봉 학소대을 오르는 등로길이 나오는데 너덜바위가 있고 급경사지라 험준한구간 이었다. 807봉을 통과하여 올라서면 923봉 직진에 조릿대군락지가 나오고 923봉을 오르지 않고 우측방향으로 우회하여 진행한다.
923봉을 우회하여 올라서면 멋진 조망지가 나오고 조망지에서 산세을 감상하고는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니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바위로 올라서니 조릿대가 무성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조금더 밀어올리니 한남금북정맥 분기점에 도착한다.
이곳은 2009년10월23일 백두대간을 하면서 스쳐지나간곳이며, 그때는 운무로 인하여 조망이 불순하여 조망도 못보았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 속리산 전체을 조망할수 있을것 같았다.
속리산은 행정규역이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외속리면. 경북 문경시, 화북, 화남면에 접하는 산맥으로 한국 팔경 중의 하나이다. 태백산에서 남서방향 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백두 대간이 지나고 천왕봉에서 한남금북 정맥이 분기하고 있다. 속리산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변성퇴적암이 섞여 있어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높고 깊은 봉우리와 계곡은 가히 절경을 이루고 있어 광명산(光明山),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이 천왕봉으로 개명되었다. 산림청의 ‘우리 산이름 바로찾기 캠페인에 따라 경북상주시지명위원회를 열어 속리산 천황봉(해발 1057m)의 이름을 천왕봉으로 바꾸기로 의결했다. 천황봉은 왕(王)이던 지명이 일본 천황을 가리키는 황(皇)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지금까지 논란이 있었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 1구간을 마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후미을 기다리며 천왕봉에서 멋진 풍경을 조망하면서 기다린다.
오늘 정해진 등로길(천왕봉-비로봉, 신선대, 문장대-장암리)은 비록 진행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헬기장에서 장각동으로 내려서는 풍경이 일품이라 말할수 있었고 장각폭포 또한 멋진곳이 엇다. 한남금북정맥 첫구간 마루금을 무사히 마칠수 있게 도움을 주신님들께 감사의 말씀 전하며 다음 구간에 반갑게 뵙길 바라며 환절기 건강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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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표 표지와 백두대간 및 정맥 개념도>
<1대간 1정간 13정맥>
<남한의 백두대간 권역별 분류>
우리나라 산줄기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이야기】
우리 선조(先祖)들은 산(山)과 강(江)을 하나의 유기체적(有機體的)인 자연구조(自然構造)로 보고 그 사이에 얽힌 원리(原理)를 찾는데 지리학(地理學)의 근간(根幹)을 두었다.
여러 가지 구구한 이야기들도 많고 아직까지 공인(公認)된 것은 아니지만 1769년 여암 신경준이 펴낸 것으로 되어있는 족보(族譜) 형식의 산경표(山經表) 는 지리서(地理書)와 1866년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그러한 노력의 한 결실(結實)이라고 볼수가 있을 것 이다.
산경표(山經表)에선 우리산줄기를 1대간(大幹) 1정간(正幹) 13정맥(正脈)으로 분류(分類)해 놓았는데 이 산경표(山經表)를 풀어서 지도로 작성하면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산맥(山脈)과 우리 조상님들이 언급(言及)한 산줄기와 그 둘이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가 배워온 산줄기 예를 들어 태백산맥(太白山脈) 소백산맥(小白山脈) 차령산맥(車嶺山脈)등은 일본이 조선 강점(强占)을 기정사실화 해 가고 있는 무렵인 1903년 일본인 지리학자 고또분지로가 14개월 동안 우리나라의 지질구조(地質構造)를 연구하고 “韓半島의 地質構造圖”를 발표하면서 그 때까지 통용(通用)되던 1大幹 1正幹 13正脈은 사라지고 산맥(山脈)의 개념(槪念)이 도입(導入)된 것도 모자라서 지리교과서에 실리게 된 게 현실이다.
여기서 의심스러운 것은 그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그것도 개인이 단시간에 땅속의 지질(地質)을 알아내어 산줄기의 체계(體系)를 세웠다는 것은 말이 않되는 이야기고 아마도 식민지(植民地) 지하자원(地下資源)을 수탈(收奪)할 목적(目的)으로 그리 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다.
우리산줄기는 땅위에 실존(實存)하는 산과 강에 기초(基礎)하여 산줄기를 그렸으며 그러므로 산줄기는 말 그대로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며 실제 지형(地形)과 일치(一致) 한다.
그러나 일본인이 주장한 산맥(山脈)은 땅속의 지질구조(地質構造)선에 근거(根據)하여 땅 위의 산들을 분류(分類)하였으며 그로 인해 산맥(山脈)선은 도중에 강에 의해 여러 차례 끊기고 실제지형과 전혀 다른 인위적(人爲的)으로 가공(加工)된 산줄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 우리 산줄기의 기본(基本) 원리(原理)인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뫼산(山) 스스로자(自) 나눌분(分) 물수(水) 고개령(嶺)~
한문 해석 그대로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라는 뜻이 된다. 더 쉽게 표현하면 “두 능선(稜線) 사이에는 계곡이 하나 있고 두 계곡 사이에는 능선(稜線)이 하나 있다” 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나라 안에 산(山) 없이 시작되는 강(江)이 없고 강(江)을 품지 않은 산(山) 이 없으니 산(山) 과 강(江)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에 나라의 물줄기란 물줄기를 모조리 그려 놓으면 나머지 공간이 몽땅 다 산줄기가 되는 것이다.
강은 이골 저골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강이 되어 결국은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이고 산줄기도 마찬가지다.
무질서하게 보여도 절대로 서로 얽히거나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길이 있는 어느 곳이라도 결국은 하나의 강이 되어 하구(河口)로 흘러 나가며 산줄기가 있는 어느 곳에서든 능선(稜線)만 따라가면 백두산에 도착(倒着)하게 될 것이다.
즉, 산에서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듯이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인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육지(陸地)는 많은 섬(島)으로 분리(分離)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개울과 내와 천이 모여서 강이 되고 강을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들이 주맥(主脈)이 되는 것이다. 개울과 내와 천을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들은 결국 강에서 그 흐름을 멈추게 된다.
그래서 주맥(主脈)과 구분(區分)하기 위해 지맥(支脈)이라고 이름을 붙여준다.
여기서 주맥(主脈)에 해당하는 것이 산경표(山經表)에서 언급한 大幹, 正幹, 正脈의 개념(槪念) 이며 뒤에서 이야기 할 기맥(岐脈)도 주맥(主脈)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주맥(主脈)을 이렇게 구분지어 부르는 것은 그 산줄기가 갖고 있는 특수성(特殊性) 내지는 어떠한 필요성(必要性)에 의하여 그리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만하면 우리 산줄기의 개념(槪念)에 대해 이해(理解)가 되었을 것으로 알고 산경표(山經表)에 나오는 우리산줄기와 기맥(岐脈)에 대하여 그 개략적(槪略的)인 것만 간단히 전개(展開)해 보겠다.
먼저 산경표(山經表)란 무엇인가? 무슨 책인가?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신라 시대 도선국사(導善國師)의 “옥룡기”에
"우리나라가 백두(白頭)서 시작하여 지리(智異)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形勢)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 이라..."
402년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리강리도에 우리의 대간(大幹)과 정맥(正脈)이 그대로 그려져 있고, 17세기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山脈)의 조종(祖宗)이다...(중략)... 대체로 일직선의 큰 산맥(山脈)이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태백산(太白山)이 되었고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났으니...”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산경표(山經表)는 신라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백두대간(白頭大幹)을 그 기둥으로 삼고 거기에서 파생(派生)된 산줄기 강줄기 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서 1750년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硏究)의 기틀을 다진 여암 신경준이 1770년 영조의 명(命)을 받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집필(執筆)하기 이전인 1769년에 옛 부터 발달해온 군현읍지를 재구성하여 그 때까지 축적(蓄積)된 지리학적(地理學的) 지식(知識)과 정보(情報)를 학문적(學問的)인 체계(體系)를 갖추어 족보형식(族譜型式)으로 편찬(編纂)한 우리 나라의 지리정보(地理情報) 집합서이다.
국가의 행정적인 지원(支援) 아래 공식적으로 편찬(編纂)된 산경표(山經表)의 산줄기 체계(體系)는 바다 건너 욕심많은 인간들이 이 땅을 유린(蹂躪)하기 전까지는 국가(國家)의 공인(公認)된 개념(槪念)으로 인식(認識)되었음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족보형식(族譜型式)으로 편찬(編纂)된 산경표(山經表)에 앞서 잠깐 언급(言及)한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주맥(主脈)의 개념(槪念)으로 1大幹 1正幹 13正脈으로 분류(分類)하고 그 산줄기에 격(格)을 부여(附與)하였다.
그리고 1大幹 1正幹 13正脈에서 갈래쳐 나온 산줄기들을 비록 격(格)이나 이름을 부여(附與)하지는 않았어도 그 흐름을 기록하였다.
우선 백두(白頭)에다 대간(大幹)이라는 격(格)을 주어 이 산줄기를 우리나라 모든 산줄기의 기둥으로 삼았으며 실제로 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나라안의 높고 험한 산들이 대부분 포함(包含) 되어 있으며 나라를 동서(東西)로 양분(兩分)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동쪽 물길과 서쪽 물길은 절대로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로 어느 정맥(正脈) 마루금에 서서 좌우(左右)를 내려다보면 그것은 별개의 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가 있으며 그래서 인지 정맥(正脈)의 이름을 대부분 강에서 따오고 있는 것이다.
산경표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청북정맥(淸北正脈)은 청천강의 북쪽 울타리이며 압록강의 남쪽 울타리이다.
고려 때 축성(築城)한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주능선이다.
청남정맥(淸南正脈)은 청천강의 남쪽 울타리이며 대동강의 북쪽 울타리이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묘향산 낭림산이 여기에 속한다.
해서정맥(海西正脈)은 지명 이름을 따왔다.
대동강의 남쪽 울타리이며 예성강 북쪽 울타리다. 언진산 멸악산이 여기에 속한다.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은 임진강 북쪽 예성강 남쪽 울타리이다.
판문점에서 훤히 보이는 경기오악(京畿五嶽 : 화악산,운악산,감악산,관악산,송악산)중 하나인 개성 송악산이 여기에 속한다.
한북정맥(漢北正脈)은 반은 북한에 속하고 반은 남한에 속하는 산줄기다.
한강의 북쪽 울타리이며 임진강 남쪽 울타리다.
남한쪽 줄기를 살펴보면 군부대로 요새화 되어 있는 대성산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 축석령 양주의 불곡산 한강봉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노고산 일산의 고봉산을 지나 파주 교하의 장명산에서 그 끝을 맺는다.
남한쪽의 산줄기는 도상거리 약 177km 정도이다.
한남정맥(漢南正脈)은 칠장산에서 경기도를 서북방향으로 가르며 한강 하구에서 한북정맥과 임진북 예성남정맥과 서로 얼굴을 맞대다 바다 속에서 만나는 산줄기다. 오롯이 한강 남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안성의 칠장산 수원의 광교산 안양의 수리산 인천에 있는 3개의 철마산, 계양산, 가현산을 꿰찬 후 비산비야를 달려 마지막으로 힘주어 밀어올린 강화 대교 앞 문수산에서 끝나는 도상거리 약 180km 정도의 산줄기를 말한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한강의 남쪽 울타리이며 금강의 북쪽 울타리라는 뜻 이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시작하여 정이품송으로 유명한 보은 말티고개, 청주의 상당산성, 좌구산 안성의 칠장산에서 두 줄기로 만들어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에게 그 뒤를 잇게 하는 도상거리 약 148km정도의 산줄기를 말한다.
금북정맥(錦北正脈)은 칠장산에서 남쪽으로 충청남도 내륙(內陸)을 휘젓고 다니는 산줄기를 말하며 금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칠현산 차령 봉수산 백월산 수덕산 가야산 오서산 팔봉산 태안반도의 끝안 흥진에서 서해를 지키며 그 흐름을 멈추는 도상거리 약 272km 정도의 산줄기를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자면 일부분만이 금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기맥(岐脈)부분에서 설명(說明) 드리겠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말 그대로 낙동강의 동쪽 울타리다.
태백시 피재에서 시종일관 남진을 하는데 그 줄기를 살펴보면 통고산 울진의 유명한 백암온천이 있는 백암산 청송의 비경 국립공원 주왕산, 화랑들의 수련장 단석산,훌쩍 영남 알프스로 건너가 고헌산 ,영남알프스의 최고봉 가지산,신불산,취서산.천성산,관통도로 저지를 위해 45일간 단식을 하고 도룡농소송을 하시는 지율스님이 계시는 천성산 원효산에서 고속도로인 지경고개로 자지러들었다가 부산의 명산 금정산을 일구고 다대포 몰운대에서 벼랑이 되고 파도가 되는 도상거리 약 360km의 산줄기를 한다.
낙남정맥(落南正脈)은 낙동강(洛東江)의 남쪽 울타리라는 뜻이다.
즉, 지리산 영신봉에서 남쪽으로 갈래쳐 나와 옥산 대곡산 여항산 무학산 천주산 정병산 신어산 낙동강 하구 매리라는 동네에서 끝이 나는 도상거리 약 226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는 시종일관 경상남도의 남강 남쪽 바닷가를 달리는 산줄기이다.
지리산 천왕봉 북쪽에서 흐르는 경호강을 따라 오다보면 경호강이 산청군 단성면 에서 남강 이라는 이름으로 바꿔달고 김해 북쪽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잠시 낙동강이 되었다가 바다로 흘러들게 된다.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전북 장수 백운산 근방 영취산에 서 분기(分岐) 하여 장안산 팔공산 진안의 명산 마이산 주화산에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두줄기로 갈라지는 도상거리 약 63km 정도의 산 줄기를 말한다.
금남정맥 (錦南正脈)은 금강의 남쪽 울타리를 말하며 주화산에서 호남정맥 (湖南正脈)을 남으로 이별하고 머리를 북쪽으로 틀어 운장산 대둔산 계룡산 부여의 부소산 조룡대 구드레나루에서 끝나는 도상거리 약 168km 정도의 산줄기를 말한다.
그러나 금강의 온전한 남쪽 울타리는 아니다.이 문제도 추후 기맥(岐脈) 부분을 설명할 때 말씀드리겠다.
호남정맥(湖南正脈)은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주화산에서 남쪽으로 머리를 틀어 전주의 명산 만덕산 정읍의 내장산 담양의 추월산 광주의 무등산 장흥 제암산 사자산까지는 전라 좌우도를 가르는 분계(分界)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종주(縱走)시 왼쪽으로 떨어지는 물은 오롯이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물은 전라남북도 바닷가로 떨어지는 몇 개의 강과 천과 내를 이루고 있다고 볼수있다.
바로 이 호남정맥(湖南正脈)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았을 때 왼쪽은 호남좌도(湖南 左道)라 하여 동진강 만경강 영산강 일대의 비옥한 평야지대로 호남좌도(湖南左道) 농악(農樂)이 발달하였고, 오른쪽은 호남우도(湖南右道)라 하여 섬진강 유역(流域)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험준한 산악지대(山岳地帶)로 호남우도(湖南右道) 농악(農樂)이 발달(發達)하였다.
결국 산줄기가 문화적인 면까지 구분(區分) 지어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주맥(主脈)은 아쉬운대로 서술(敍述)하였는데 산경표(山經表)에 이름이 없는 산줄기에 대하여 그 흐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거기에 대한 소견을 피력(披瀝)해보면…산경표(山經表)를 위하여의 저자는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 (披瀝)했는데 기맥(岐脈:갈래질,갈림길,높은산), 지맥(支脈:갈릴,곁가지)으로 부르자고 한다.
여기에서 기맥(岐脈)이란?
독립된 강을 가르는 분수령(分水嶺)이되 강이나 산줄기 크기가 정맥(正脈)보다 그 규모가 작은 것으로써 원칙적으로 그 끝이 바다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남정맥(湖南正脈) 내장산에서 분기(分岐)하여 영산강의 북쪽과 서쪽 울타리를 치고 있는 영산북기맥(榮山北岐脈)은 목포 유달산 바닷가에서 끝이 난다.
또한 이 영산강 남쪽 울타리는 영산남기맥(榮山南岐脈)으로 역시 전남 해남군 화 원 반도 끝에서 목포시가지를 바라보며 서해바다에서 끝을 맺는다.
그런데 해남 땅끝마을이 전국적으로 명소(名所)로 회자(回刺)되고 있고 우리나라 육지(陸地)의 최남단이라는 의미가 깊어 월출산을 지난 벌매산에서 골산인 흑석산으로 빠지는 얼마 안되는 거리를 남겨놓고, 남도의 수석전시장인 해남 강진의 주작산, 두륜산, 달마산, 대둔산, 도솔봉, 땅끝마을 사자봉으로 산줄기의 흐름을 틀어 땅끝기맥이라고 선답자(先踏者)들이 명명하고 말았다.
결국 이 두개의 산줄기는 대부분이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것으로 이름을 지어 부르던지 그 끝만 다를 뿐 산줄기가 주는 의미(意味)는 결국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도도한 흐름을 타고 땅끝마을에서 끝이나는 산줄기를 땅끝기맥(岐脈)이라고 명명(命名)하고, 벌매산 이후 진정한 영산강 남쪽 울타리인 흑석산으로 뻗어 화원반도에서 끝이나는 산줄기를 영산남지맥(榮山南支脈)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정맥(正脈)의 반열(班列)에 들어도 부끄럽지 않은 세(勢)를 가진 한강기맥 (漢江岐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오대산에서 분기(分岐)하여 시종일관 북한강과 남한강을 나누며 서진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에서 한강이 되어 산줄기가 끝이 나는 산줄기가 있다. 즉 강에서 끝나는 기맥(岐脈)도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이 한강기맥(漢江岐脈)은 정맥(正脈)의 반열(班列)에 들어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산경표(山經表)에서 언급한 산줄기중 백두대간(白頭大幹) 이 그 바톤을 낙남정맥(落南正脈) 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바닷가가 아닌 지리산 천왕봉에서 맥을 마친다. 그리고 금남정맥(錦南正脈)이 바다하곤 너무 거리가 먼 충남 부여읍 부소산 금강변 에서 맥(脈)을 내린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산경표(山經表)에서 조차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바다와 무관하게 정맥(正脈)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세(勢)와 길이와 흐름이 산경표(山經表)에서 언급한 어떤 정맥(正脈)보다 뚜렷하고 중후(重厚)하다.
예를 들어 물론 서로 비교(比較)하는 것이 어떠한 큰 실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說明)을 하다보니 비교(比較)하게 되었다...
금남정맥(錦南正脈)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은 그 세(勢)와 길이와 흐름에 있어서 한강기맥(漢江岐脈)을 따르지 못한다.
또한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낙남정맥(落南正脈)은 그 세(勢)와 흐름에 있어서 한강기맥(漢江岐脈)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산줄기에서 100km 이상 되는 기맥(岐脈) 수준의 산줄기가 2개나 분기(分岐) 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맥(支脈)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산줄기일까요? 한마디로 강의 지류(支流)를 가르는 산줄기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강에서 그 맥(脈)을 다하는 산줄기를 말한다. 물론 바다로 빠지는 지맥(支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변산지맥(邊山支脈)은 그 끝이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여수지맥(麗水支脈)과 선운지맥(禪雲支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그 수많은 지맥(支脈)을 단순히 지맥(支脈)이름만 거론할 경우 산줄기의 흐름을 한번에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지맥(支脈)은 대간(大幹), 정간(正幹), 정맥(正脈), 기맥(岐脈)에서 분기(分岐) 한 산줄기로써 어느 정도 그 산세(山勢)가 계속되는 산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지맥(支脈)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는 어떻게 이름을 지어야 할까?
분맥(分脈), 단맥(短脈)이다.
분맥(分脈)이란?
역시 지맥(支脈)과 같이 강의 지류(支流)를 구분(區分)짓는 산줄기로 반듯이 지맥(支脈)에서 분기(分岐)한 산줄기를 말한다. 그 세력(勢力)도 지맥(支脈)과 거의 같은 산줄기로 만약 지맥(支脈)에서 분기(分岐)하지 않았다면 지맥(支脈)으로 부를 수 있는 산줄기를 말한다. 예를 들면 한북천마지맥(漢北天魔支脈) 줄기 중 주금산에서 갈래친 산줄기로 그 세(勢)가 사못 웅장(雄壯)한 산줄기가 하나 더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산이 축령 산이다.그래서 그 산줄기의 이름은 한북천마축령분맥(漢北天魔祝靈分脈)이라고 부른다.
한북정맥(漢北正脈)에서 갈라져 나와 천마지맥(天魔支脈)을 타고 가다 축령산(祝靈山)을 거쳐 북한강에서 그 끝을 다하는 산줄기다.
지금까지의 산줄기는 최소한도 2일 이상 산행을 요구하는 20km 이상의 산줄기를 말하는데 그러면 하루도 안 걸리는 짧은 거리지만 뚜렷한 세(勢)를 이루고 있는 산줄기 는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짧을 단자 단맥(短脈)이라고 봅니다.
단맥(短脈)은 大幹, 正幹, 正脈, 岐脈, 支脈, 分脈 즉 모든 산줄기에서 분기(分岐)한다는 걸 알수가 있다. 잘 알고 있는 명지산을 예로 들어보면 한북연인명지단맥이 되는 것이다. 즉 한북정맥(漢北正脈)에서 분기(分岐)한 연인지맥에서 다시 분기(分岐)하여 명지산으로 뻗어 나가 강이나 그 지류(支流)에서 끝이 나는 산줄기라고 읽을 수 있 는 것이다. 여기까지 분류(分類)가 되고 산줄기 이름이 정해지면 대한민국 산줄기란 줄기는 거의 모두 다 포함(包含)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표시 안되는 아주 짧은 산줄기가 있다.
남을 여자 여맥(餘脈)이다.
단순히 大幹, 正幹, 正脈, 岐脈, 支脈, 分脈, 短脈에서 분기(分岐)하여 무명봉 한 두개를 1 넘으면 끝이나는 산줄기로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겠 지만은 통상 大幹, 正幹, 正脈, 岐脈, 支脈, 分脈, 短脈상에 있는 산으로 묶어버리 되는 산줄기 들이다. (등산학교 강의자료에서)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산줄기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나열해 보았으나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산줄기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산악인들이 정의(定議)한것이니 만큼 본 내용이 정확한 표현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음을 밝혀둔다.
산경표에 대한 敷衍 說明을 덧붙이자면....
산경표는 海東道里譜, 箕封方域誌, 山里攷(이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輿地便覽(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海東山經(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된 책의 일부로서 程里表, 道里表가 전해 온다. 모두가 한문으로 된 筆寫本이며, 필자와 연대를 밝히지 않았고 序文이나 跋文도 싣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두 가지 筆寫本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첫째는 규장각 소장의 海東道里譜 중의 山經表,
둘째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의 輿地便覽 중의 산경표가 있는데
이우형은 규장각 소장의 海東道里譜 중 산경표에 대해 무게를 더 두고 있는데 그의 주장은 이렇다.
山經表의 한북정맥 追慕峴에 영종 45년(1769)이라는 연대를 附記하고 있는 점, 여암(旅庵) 신경준이 1781년에 타계한 점,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곤책(坤冊)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에는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화성(華城, 수원)이 실려 있는 점 등을 摘示하고 山經表의 출현 시기는 1800년 전후로, 찬표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였다.(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월간 『산』, 1993. 6월호에서)
반면에 박용수는 여지편람의 산경표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1769년에 여암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조 40년(1770년)에 완성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는 우리나라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사전격인 책이다. 그 중 지리 부분인 여지고를 신경준이 담당했다.
여지편람은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지리를 알기 쉽게 기술한 지리서다.
여지편람은 건책(乾冊)과 곤책(坤冊)으로 구성되어있다.
건책은 내제목(內題目)이 산경표, 곤책은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다.
여지편람은 1769년경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아 감수, 편찬한 것이다.
여지편람의 건책이 바로 現在 전하는 산경표의 원전이다.
그러므로 산경표의 간행시기는 1769년, 저자는 신경준이다. 라는 뜻을 밝히고 있다.(태백산맥은 없다에서)
山經表에 대해서 또 다른 주장은........
양보경은(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일본 정가당 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임을 밝히면서 내용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책이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조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나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산경표와 도리표(道里表·『정리표』)로서 문헌통고와는 체제가 다른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를 맡겼던 책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좀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고....([조선시대의 자연인식 체계], 『한국사 시민강좌』 제14집, 일조각, 1994)
산경표에는 19세기 초에 변화된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려우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였다.([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월간국토』 1999년 5월호)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둘의 산경표를 쉽게 구경할 수가 없는 처지다.
그러면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朝鮮光文會本의 山經表는 어떤 것인가?
서지학자들은 影印本이 아닌 독립된 하나의 本으로 인정하고 있다.
1913년대 조선광문회의 산경표는 전 시대에 붓글씨로 써서 발간된 즉 최성우가 소장하고 있던 筆寫本을 참고로 하여 그것을 인쇄용 활자로 바꿔 찍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어째든 산경표는 朝鮮 후기에 발간되었던 地理書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저자가 누구인지 편찬시기가 언제인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이 책에는 現存하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사실에 根據하여 15개 산줄기(백두대간, 1정간, 13정맥)로 나누고 1,650여개의 지명과 1,500여개의 산과 고개를 일목요연하게 표기하고, 10대 주요 강줄기를 流域別로 나누어 수록해 놓은 우리민족의 전통지리서 임에는 틀림이 없고...
또 당시 國家의 공인된 地理槪念이었으며, 朝鮮時代를 거치는 동안 지리의 근간으로 활약했고 논리 정연한 大지리백과사전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통지리서인 山經表가 후대들에게 묻혀 지며, 특히 日帝의 조선 강점이라는 국가적 환란에는 근 1백년 가까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山經表가 우리 시야에 사라지는 일제시대에는 일본이 조선침략정책의 일환으로 두 차례에 걸쳐서 광물탐사사업을 실시하였다.
그 중 학술책임자 자격으로 고토 분지로가 우리나라의 地質을 조사했으며, 그는 조사를 토대로 조선의 산악론, 지질구조도를 동경제국대학 論文集에 발표하게 되며 그 때부터 조선 땅에 山脈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후 日本은 조선 전래의 산줄기체계를 몰아내고 이어지지 않고 단절된 地質槪念인 山脈을 강제로 도입시켜 그후 우리는 1백년 가까이 지질개념을 배우는 비운을 맞았고 또 山經表는 역사속에서 묻혀 지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 서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이우형이란 사람에 의해서 18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저자미상의 우리나라 옛 地理書인 山經表를 발견한다. 그 후부터 이우형은 산경표에 골몰하기 시작하여 1985년에 大東輿地圖의 再版을 찍어내는데 成功을 한다.
1986년 이 우형에 의해서 언론매체에 白頭大幹이라는 用語가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모태로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박용수, 조석필님 등의 연구와 노력으로 地形의 槪念인 大幹, 正脈 등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우리 지리체계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조석필씨는 본인의 또 다른 著書인 "태백산맥은 없다"에서
산경표를 위한 기본 제안(향후 산경표의 표준으로 확립해야할 과제들)을 피력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산경표에서 지적되고 있는 문제점들과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논란거리는 성격상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당시의 측량기술 수준의 한계에 따른 잘못으로 마땅히 고쳐져야 할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견해 차이에 기인한 혼란으로 적절한 논의 후에 통일되어야 할 것들이다. 논란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산경표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산경표는 18세기의 책이다. 당시의 생각과 명칭, 당시의 측량수준, 당시의 인쇄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적지 않은 오류가 있고 그에 따른 혼선 또한 만만치 않다.
산경표에서는 지리인식의 원리만 배워오면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는 현대지형도의 눈으로 다시 읽어야한다. 왜냐하면 지리인식으로서의 산경표는 미래의 표준으로 쓰여 나가야 할 도구이며 미래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는 체계와 명칭을 갖춰야하는 잣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체계도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므로 가능성만 열어두기로 한다.
제시한 대안들은 실용성을 중심으로 마련한 것이다.
시급한 것은 어느 쪽이든 하루 빨리 통일안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란은 방치할수록 바로잡기 힘들어진다. 책임 있는 기관에서 나서야할 때다.
▲ 海東道里譜는
저자와 편찬연도 모두 미상이다.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도로와 산세 등을 정리한 표, 본문은 去京程里表, 山經, 本營으로부터의 거리표, 嶺南道里表로 구성되었다.
去京程里表는 서울로부터 연결되는 도로망을 정리한 것으로서 서북쪽으로 義州, 동북쪽으로 慶興 西水羅, 동쪽으로 平海, 동남쪽으로 釜山, 太白山, 남쪽으로 統營別路, 濟州, 서남쪽으로 忠淸水營, 서쪽으로 江華 등 9개의 大路로 구분하였고 각 대로는 다시 여러 단계의 지선으로 나누었다.
각 道路는 주요 지점을 수록하고 여기에 거리와 分岐의 수를 병기하였으며 분기되는 도로는 첫머리에 방향을 명기하였다.
말미에는 道里總目이라 하여 각 大路의 총 里數를 정리하였다.
[생략]...................
<山經>은 우리나라의 주요 산세를 정리한 것으로서 百頭大幹을 중심으로 長白正幹, 淸北正幹, 淸南正幹, 海西正幹, 臨津北禮成南正幹, 漢北正幹, 洛東正幹, 漢南錦北正幹, 錦南湖南正幹으로 나뉘었다.
각 항목에는 邑治에서의 거리, 山勢의 방향, 分岐, 지리고증, 水營 등의 설치 등을 함께 기록하였다.
[이하 생략]...........................
(서울대학교 규장각)
▲ 輿地便覽은
여지편람, 우리나라의 산맥계통을 밝힌 산경표와 거경정리와 도내의 군현읍치 사이의 거리조견표를 포함하는 程里表가 포함된 지리편람 2책, 필사본, 산경표는 51장이고 정리표는 48장으로 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24.1㎝, 가로 15.1㎝이다.
저자와 제작연대의 표시는 없으나 산경표는 영조 때의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와 동일하고 정리표의 내용은 신경준이 편집하고 그 뒤 증보된(증보문헌비고) 輿地考안에 있는 道里의 내용을 표로 만든 것으로 보아 신경준이 만든 원작을 증보,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경표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산맥계통을 大幹, 正幹, 正脈으로 구분하고 그 계통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白頭大幹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黃土嶺, 厚致嶺, 黃草嶺, 狼林山, 金剛山, 五臺山, 太白山, 小白山, 竹嶺, 德裕山을 거쳐서 智異山에 이르는 한반도의 등뼈산맥을 이루고 있다.
長白正幹은 경성 서쪽 100리에 위치하는 장백산에서 시작하여 동북쪽으로 뻗어 서수라에 이르는 산맥이다.
백두대간에서 서쪽 황해안을 향하여 뻗고 있는 산맥을 정맥(正脈)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청천강을 경계로 청북(淸北)과 청남정맥(淸南正脈)을 구분하고 있다. 즉, 현재의 적유령산맥과 묘향산맥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 호남정맥으로 나누고 있다. 따라서 정맥은 하계의 유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략]....................
또한 정리표에는 증보문헌비고에 없는 거리조견표가 도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산맥계통과 주요간선도로 및 지로(支路)에 관한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이 책은 지방수령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관료와 선비들에게 널리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유사본이 많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지리편람으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도가 없는 것이 아쉽다(한국학중앙연구원)
▲ 신경준 [申景濬, 1712∼1781]은
산경표(본관 고령(高靈), 자 순민(舜民), 호 여암(旅庵),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휘릉별검(徽陵別檢), 전적(典籍), 병조와 예조의 낭관(郞官),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지내고 1762년 서산(瑞山)군수로 나갔다.
이어 장연(長淵)현감, 헌납(獻納), 사간(司諫),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1770년 문헌비고(文獻備考) 편찬에서 여지고(輿地考)를 맡아 한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1771년 북청(北靑)부사, 1773년 좌승지(左承旨), 강계(江界)부사, 순천(順天)부사, 이듬해 제주(濟州)목사, 1779년 치사(致仕)하고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성률(聲律), 의복(醫卜), 법률, 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1750년에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저서에는 여암집(旅庵集), 소사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山經表), 증정일본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이 있다.
▲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는 한국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전서적인 책이다.
목판본, 100권 40책, 영조의 명으로 1769년(영조 45) 편찬에 착수, 1770년에 완성되었다.
체재는 중국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예에 따라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의 13고(考)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그 후 이를 다시 증보, 고종 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 하여 250권으로 간행하였다.
▲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는 상고(上古)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책이다.
활자본, 250권 50책, 문헌비고(文獻備考)라고도 한다.
최초의 편찬은 1770년(영조 46)에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의 13고(考)로 분류하여 100권으로 만들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사실(史實)에 어긋난 점과 누락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령(法令)과 제도가 많이 변경되었으므로 1782년(정조 6) 왕명으로 이만운(李萬運) 등에게 이를 바로잡아 보편(補編)토록 하였다.
이것이 제2차의 편찬이며, 9년여에 걸쳐 동국문헌비고의 13고(考)에 대해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된 것을 채우는 한편 새로이 물이(物異), 궁실(宮室), 왕계(王系), 씨족(氏族), 조빙(朝聘), 시호(諡號), 예문(藝文)의 7고(考)를 증보하여 146권을 편성하고 이를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간행되지 못하고 100여년 뒤인 고종 광무 연간에 이르러 제3차 보편을 하였다. 즉, 1903년(광무 7)에 특별히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고 박용대(朴容大) 등 30여 명의 문사들에게 명하여 이를 보수하게 한 것이다.
박용대 등은 5년여에 걸쳐 증보동국문헌비고에 수록된 20고 중에서 물이는 상위에, 궁실은 여지(輿地)에, 시호는 직관에 포함시키고 왕계는 제계(帝系)로 고쳐서 씨족(氏族)에 포함시켰다.
또 조빙을 교빙(交聘)으로 고쳐 상위, 여지, 제계·예, 악, 병, 형, 전부, 재용, 호구, 시적, 교빙, 선거, 학교, 직관, 예문의 16고 250권으로 편성하고 이를 증보문헌비고라 이름 붙여 1908년(융희 2)에 간행하였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백과사전으로서 제도, 문물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일본은 강점 후 1910년부터 18년까지 9년 동안 수탈의 目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조선의 세밀한 지형도를 그렸고 쌀과 곡물을 가져가기 위해 도로와 철도를 냈으며 금 등을 캐가기 위해 地質調査에 광분했다.
그 시기에 조선으로 들어온 사람이 고토 분지로 라는 지질학자다.
그는 일본이 조선침략정책의 일환으로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4개월 동안 실시한 광물탐사사업의 학술책임자 자격으로 우리나라의 지질을 조사했다.
그 조사를 토대로 "조선남부의 지세(1901년)", "조선북부의 지세(1902년)"를 발표했고 두 논문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조선의 산악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 및 "지질구조도(1:200,000)"를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발표했다. 그게 1903년이었다.
그 때부터 조선 땅에 山脈이라는 용어가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토의 논문은 조선 전래의 산줄기체계와 확연히 다른 것이며, 당시 유행하던 지질학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산맥분류의 시초가 되었고 체계와 명칭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듬해인 1904년, 정치지리학 전공의 야쓰쇼에이가 韓國地理를 펴냈다.
일본 동경에서 간행된 그 책의 산맥편에 나오는 산맥지형도는 고토의 연구를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다만 거미줄처럼 얽힌 고토의 산맥선들을 단순화시켜 오늘날의 산맥계통도와 유사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다.
1905년 조선이 통감부체제로 들어가자 교과서의 내용도 제재를 받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8년 당시의 지리교과서였던 "高等小學大韓地誌"에 신식 지질개념이 전래의 산줄기인식을 대신한다는 선언이 등장한다(조석필 著 태백산맥은 없다에서)
▲ 조선광문회는 1910년에 설치된 韓國古典 간행기관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정치적으로 다난했던 시기에 학자들의 국민계몽을 위한 활동이 컸다.
그들은 애국적인 견지에서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지식을 널리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국사연구도 민족적인 기개(氣槪)와 자존심을 앙양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광문회에서는 한국의 고전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한국고전을 간행·보급시키는 한편, 민족의 정신적 결합을 기하며 민족문화와 사상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이 창설하고 박은식(朴殷植) 등이 관계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 해동역사(海東繹史),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경세유표(經世遺表), 상서보전(尙書補傳), 등 17종의 조선총서(朝鮮叢書) 간행하였다.
▲ 朝鮮光文會가 崔誠愚 소장본을 臺本으로 1913년 2월 단행본으로 간행한 산경표 신연활자본에는 편찬자는 알 수 없다. "撰者 未考고 하면서도 서문에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輿地考를 거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山經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조종을 알려 주는 표라 할 만하다.
산경을 바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조목[目]으로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범위와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원전으로 삼은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의 나침반[指南]이 될 만하다 하겠다.
"(考東方地志論山者類多 摘拔其尤散亂無統 惟輿地考申景濬所撰 山經直 幹波來歷 高起爲某嶽橫馳爲某嶺 回抱爲某治無不詳載 寔爲導 山之祖是表也 以山經爲綱而旁附里數目 而張之全區界境曉然爲指掌 非但爲原經之錦花 實爲地理家之一指南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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