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걷다 길은 길과 만나고
길을 걷는 것은 때로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걷다 보면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여유가 생기게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걷는 것에 의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트이고 추억들이 해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걷는 것은 죽음, 향수, 슬픔과 그리 멀지 않다. 한 그루 나무, 집 한 채, 어떤 강이나 개울, 때로는 오솔길 모퉁이에서 마주친 어느 늙어버린 얼굴로 인하여 걸음은 잠들어 있던 시간을 깨워 일으킨다.
-다비드 드 브르통 ‘걷기예찬’ 중에서
‘지리산길’을 굳이 자동차를 가지고 가겠다면, 호남고속도로나 대전-통영고속도로를 달려 88올림픽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가다 지리산IC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함양JC에서 남원 방향으로 향하는 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반대로 남원 쪽에서 오는 이라면 지리산IC에 이르기 전에 지리산휴게소를 지나게 되고 그 휴게소에 세워진 ‘문제의 구조물’ 하나를 떠올릴 법하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첫째 권 첫째 장에서 그토록 타박해 마지않은 ‘그 놈의 전승탑’이다. 애써 기억을 되짚거나 책을 다시 꺼내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대신해 잠시 인용해드린다.
게다가 지리산휴게소 저 아래쪽에는-내가 차마 내려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무슨 전승 내지는 반공, 참전, 순국과에 속하는 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박정희 시절에 무수히 제작된 기념 조각의 전형으로 삐죽 솟은 20여m의 기념탑 아래쪽에 철모 쓴 군인들이 돌격하는 동상인 것이다. 특히 이 기념탑은 약 80도를 이루는 예각의 첨탑으로 삐죽 솟아 있고 위 모서리도 사선으로 마감함으로써 날카로움을 극대화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앞산 지리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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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용하고 한적한 산골에 저처럼 생선회 치는 긴 칼 모양의 조형물을 세워놓는 아이디어, 이것은 단군 갑자 이래 20세기 후반의 인간들 아니고서는 5000년 역사 속에 없었던 일이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시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 순례길의 안내를 이런 신랄한 인용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는 ‘엄청난 시절’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지리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비단 ‘그 놈의 전승탑’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 첫 장거리 도보길로 ‘지리산길’을 열게 된 것도 2004년 지리산자락의 섬진강꽃길을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하려는 짓에 반대하면서 비롯했다. 한 해 전 지리산국립공원 내의 청학동과 거림골을 잇는 묵계치에 터널을 뚫어 관광용 도로를 낸 것에 적이 놀란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이상의 파괴는 막아내야겠다는 의지와 함께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지리산생명연대와 실상사가 중심이 되고 지역 주민과 생태전문가들이 동참, 그 대안으로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지리산 순환탐방로를 제안했고 5년 만에 마침내 그 첫 구간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세상은 더욱 ‘하수상’해져 이제는 국토가 통째로 ‘회칼질’당할지도 모를 지경에 직면하게 되고야 말았다.
‘지리산길’ 가는 길
지리산IC를 빠져나오면 바로 인월이다. 길의 내력에 제법 밝은 이라면 인월에서 ‘똥돼지의 추억’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에 인월장터에는 ‘똥돼지’를 파는 집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은 ‘흥부마을’로 알려진 아영면과 산내면 일대에서 키운 것들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영면 아곡리나 송리에 가면 비좁은 고샅길을 따라가며 구수한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집집마다 외양간과 돼지우리가 있는 별채 건물을 두고 있었는데, 그 건물에 딸린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소위 ‘2층 변소’가 나온다. 그곳 변기에 앉아 일을 보면 아래층의 돼지가 달려와 널름 받아먹는다. 제주의 통시와는 달리 이곳의 돼지우리는 지나치게 비좁아 제법 덩치가 큰 돼지는 피할 겨를도 없이 머리로 ‘음식물’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것 참 고약하다며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쥐어틀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의 ‘수입소 파동’을 생각하면 오히려 곰곰 되짚어 볼 일이다. 광우병이야말로 ‘먹이의 순환’에 어긋나면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지리산길’의 본산이랄 수 있는 실상사에 이르기 전 실상사의 부속암자인 백장암에 오른다. 본절인 실상사가 평지에 자리 잡은 것과는 달리 백장암은 수청산(772m) 중턱에 있어 제법 그윽한 산사의 정취를 선사한다. 현재는 법당과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는 작은 암자지만 경내 아래의 옛 절터로 미루어 예전엔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실상사의 모든 승려가 이곳에 들어와 화를 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치 장독대마냥 낮은 담장을 두른 부도전 안에는 삼층석탑과 석등, 몇 기의 부도가 모셔져 있어 보기에도 아늑하고 정갈하다. 몸돌에 주악천인상, 사천왕상과 동자상 등이 새겨져 있는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삼층석탑 앞에 서 있는 정교한 솜씨의 석등은 보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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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오르다 보니 홀연 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그곳에 도무지 절 같지 않은 절이 서 있었다. 육중한 대웅전과 선명한 단청을 연상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경내는 고요했고, 꽃들만이 웃고 있었다. 1200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석탑에는 시간이 멈춰서 고여 있는 듯했다. 불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이 들어서야 비로소 절집이 되는, 그런 편한 모습으로 고찰은 서 있었고 그 안에 스님이 있었다.
- 김택근 ‘사람의 길’ 중에서
실상사에서 모든 중생은 편안하다. 절의 자리가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를 꽃잎으로 삼은 꽃밥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그 꽃은 언제 피어 있는지도 모르게 은연중에 피어 있다. 절로 가는 길은 개울을 건너 논밭을 거쳐 불현듯 절에 이르게 하는,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길이다. 들머리에는 돌장승 세 기가 서 있지만 마을을 지키는 것인지 절을 지키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원래 네 기가 쌍으로 있었다고 하는데 한 기는 언젠가 큰물이 져서 떠내려갔다고 한다. 명색이 ‘무슨무슨 장군’들이고 제법 큰 키에 무서운 인상들을 짓고 있지만 뜻한 바만큼 위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실상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들어섰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보고 나올 수 있는 절은 결코 아니다. 절 안 곳곳에는 생각지도 않게 많은 보물이 산재해 있어 경내가 비좁을 정도다. 먼저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삼층석탑 2기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드물게 온전히 남아 있는 상륜부는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 복원 때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보물 제37호다. 다음으로 석등이 있다. 큰 키의 석등 앞에는 석등에 불을 붙일 때 사용했을 법한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다른 석등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보물 제35호다. 약사전 안에는 거대한 철불이 모셔져 있다. 풍만한 상체를 지닌 철불은 결가부좌의 자세로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데 대좌가 아닌 흙바닥에 앉아 있다. 원래 노천불이었다는 설도 있고,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땅의 기운을 막기 위해 일부러 맨 땅에 세웠다는 설도 있고, 이를 안 일제가 훼손했다는 설도 있다.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 보물 제41호다. 이밖에 증각대사 부도와 부도비, 수철화상 부도와 부도비 등은 실상사의 정신이 피어올린 보물들이다.
실상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면 이제 신들메를 고쳐매고 바랑을 단단히 짊어져야 한다. 본격적으로 ‘지리산길’ 순례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열린 길은 지리산 800리, 300여㎞ 도보길 중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매동마을과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세동마을을 잇는 20여㎞로 지리산 트레일(trail) 첫 구간이자 시범구간이다. 길은 매동마을에서 의탄교에 이르는 ‘다랭이길(1구간)’과 의탄교에서 세동마을에 이르는 ‘산사람길(2구간)’로 이루어져 있다.
1구간 ‘다랭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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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동마을-리기다소나무 조림지-귀농학교 뒤(중기, 원백일마을)-사방댐-중황, 상황마을-등구재-다랑논길-창원마을-창원-금계숲길-금계마을-의탄교
지리산길을 이어주는 매화꽃을 닮은 매동(梅洞)마을과 오르막의 소나무 숲을 오르다 뒤돌아보면 시원한 지리산 주능선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리기다소나무 숲길로 접어든 지리산길. 숲을 빨리 푸르게 하기 위해 몇십 년 전 조림사업으로 심은 리기다소나무는 경제가치가 떨어져 쓸모없는 나무라고 홀대받기도 하지만 여느 식물과 다름없는 소중한 생명이다.
숲에서 만나는 오래된 돌담은 옛 사람들이 논을 만들기 위해 쌓았던 축대다. 사람이 떠나고 묵어버린 논은 이제 야생동물들의 삶터가 되었다. 돌담 사이로 자란 진달래. 진달래꽃 즈려밟고 숲을 나오면 반야봉과 천앙봉을 함께 조망할 수 있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사방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연 재해를 막기 위한 시설이 어떤 형태로 자연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 고민해볼 수 있다.
중황마을에서 상황마을로 들어서면 치마처럼 펼쳐진 다랑논이 풍요롭다. 큰 돌을 쌓아 만든 다랑논의 석축, 그 아름다움에서는 자연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지혜와 고단했던 산촌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다랑논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고갯마루가 나타난다. 거북이 등을 닮았다는 옛 전설부터 등구사라는 절에서 따왔다는 유래까지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다양한 등구(登龜)재. 등구재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던 고갯길로 경상도의 마천 사람들이 인월에 장을 보러 가던 길, 소장수가 소를 몰고 넘던 길, 고개를 사이에 두고 시집장가 가는 길이었다.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고갯길문화가 되살아나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한 고개 두 고개 잇는 날이 기다려진다.
등구재를 지나 창원마을에 도착하면 오래된 당산나무 쉼터가 걷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쉼터에서 다랑논과 어우러진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고 쉬어가는 여유로움도 누리자.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로 가는 숲길은 아스팔트 도로가 생기기 전에 사용하던 옛길이다. 숲길 입구의 너덜지대는 강물이 흘러가는 듯 까만 돌들이 강을 이뤄 돌강을 형성하고 있다. 소나무 향 가득한 숲을 지나 나타난 금계마을. 마을 입구에는 옛날 아이들이 뛰어놀던 의탄분교가 폐교된 채 외로이 서 있다.
등구재의 북동쪽엔 등구재와 사뭇 다른 고갯길 하나가 있다. 오도(悟道)재다. 이 고개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청매 인오조사가 고개를 오르내리며 득도하였다 하여 오도재란 이름을 얻었다. 오도재는 지리산 관문의 마지막 쉼터로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 온 남해, 하동 등지의 해산물이 이 고개를 지나 전라북도와 경상북도, 충청도지방으로 운송되던 주요한 육상교역로였다. 2003년 완전한 ‘S’자 커브의 사행길을 번듯하게 포장하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함양군은 지리산 주능선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이 고개 정상에 ‘지리산 제1관문’을 세우고 지리산조망공원을 조성해놓았다.
지리산 제1관문 앞에는 청매선사의 시 ‘십이각시(十二覺時)’가 서있다.
覺非覺非覺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覺無覺覺覺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覺覺非覺覺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豈獨名眞覺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오
2구간 ‘산사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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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탄교-의중마을-서암-벽송사-벽송사 능선길-송대마을-고양터, 세동마을 임도-세동마을
좁다란 의탄교를 지나면 600살 먹은 느티나무가 길목에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안쪽에 위치한 추성마을로 들어가는 새 길이 뚫리며 옛길은 잊혀졌지만, 의중마을에서 벽송사로 가던 옛길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불공을 드리고,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나무를 하던 길, 마을 사람들은 그 길에 석축을 쌓아 다니기 편하게 길을 다져 길을 만들었다.
길은 벽송사로 향한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절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어우러져 터널을 만든 포장길을 조금 오르면 벽송사 입구를 지키는 나무장승을 만난다. 나무장승 옆의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벽송사 능선길로 들어선다.
빨치산도 넘나들던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진 이 길은 바닥에 떨어진 수북한 낙엽이 맨발로 걸어도 기분 좋은 능선길이다. 능선길에서 송대마을로 접어들고 나면 계속 내리막길이다.
송대마을 이후, 시멘트 포장길과 흙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임도에서는 저 멀리 보이는 그림같이 펼쳐진 산능선들이 걷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엄천강과 용유담, 오래된 소나무를 눈으로 즐기며 걷다 보면 어느새 세동마을에 닿는다.
정겹게 집들이 붙어 있는 세동마을. 골목과 담 사이에 낮게 앉아 있는 집의 모습에서는 수수하고 순박한 산촌마을을 느낄 수 있다. 세동마을 아래 강가에, 아픈 역사와 아픈 다리를 잠시 내려놓자. 지리산길 또한 잠시 쉬었다가 휴천면을 지나 산청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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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람길’은 ‘빨치산루트’라는 명성에 걸맞게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악천후 때는 생각지 않은 위난을 만날 수도 있으므로 안내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지리산길 안내센터(063-635-0850)에 들르면 지도와 안내책자를 받을 수 있고 길동무를 청할 수도 있다. 벽송사는 쓸쓸하다 싶을 정도로 호젓하고 고즈넉한 절이었는데, 최근 불사가 이루어지면서 그 표정이 많이 바뀌었다. 벽송사의 명물 나무장승은 지금 전각 안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꼴이 더욱 측은한 것은 그 장승들이 벽송사 일대를 무대로 하여 씌인 ‘변강쇠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까닭이다. 변강쇠는 “어려서 못 배운 글 지금 공부할 수 없고, 손재주 없으니 장인질 할 수 없고, 밑천 한 푼 없으니 장사질을 할 수 있나, 밤낮으로 하는 짓이 그 짓뿐”인 작자였다. 그는 나무 하러 갔다가 그조차 하기 싫어 길가에 세워져 있던 장승을 뽑아다 땔감으로 쓴다. 이에 팔도 장승들이 통문을 돌려 변강쇠를 혼내준다. 말없는 민중의 분노는 예나 제나 그렇게 분출되고야 마는 법이다.
지리산길은 이제 시작되었다. 그 길은 지리산 둘레 800리 길을 에둘러 흐르며 때론 숲을 따라 숲속 친구들을 만나고, 고개를 넘어 마을과 마을을 만나고, 들을 가로질러 삶과 노동을 만나고, 강을 건너 머리칼 흩뿌리는 바람을 만나고, 끝내는 또 다른 길과 만날 것이다. 그 길을 고요히 걸어가며 산도, 물도 그냥 있는 그대로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