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여행

2016. 10. 28. 14:34★ 아름다운 이야기/- 가족사진


대마도 여행 및 산행

 

일시 : 2016년 10월27일(목)~28일(금)

세부일정 :

(27일)

05:50 종합운동장 6번출구앞

10:45 부산 신국제여객터미널 3층 비틀 카운터앞 집결

12:45  출국수속 및 부산 출발(비틀호 1시간10분)

13:55  대마도 히타카츠 국제여객터미널 도착 및 입국수속

14:30 대마도 히타카츠 국제여객터미널 출발

        미우다하마(일본100선해수욕장)

        한국전망대(역관사순난비,부산조망.대마도삼고려)

        와타즈미 신사

19:30 석식(멧돼지 BBQ )

20:30 숙소 이동후 휴식(대아호텔:0920-52-3737)

 

(28일)

06:00 기상 및 조식

06:30 대아호텔 출발

07:00 이즈하라 시내관광

         덕혜옹주결혼봉축비

         조선통신사접우노지비

         마리아신사

         에보시타케 전망대(대마도판 하롱베이)

         와타즈미 신사

         대선월(대마도 최초운하)

         일본관광 면세점 자유시간

12:30 히타카츠 출국수속 후 대마도 출발(비틀호 1:10분)

13:40 부산국제여객터미널 도착,입국 수속 후 서울 출발

14:10 서울출발(왕복셔틀:이재돈 010-3590-7058)

20:30 서울 종합운동장 도착 후 해산

 

 

여행경비 : 199,000 +20,000(가이드경비)

포함내역: 왕복선박비, 부두세,4식,현지지상비,유류할증료, 해외여행자보험

준비물 : 여권,세면도구(수건,칫솔,치약,샴푸),비상약,개인용품,엔화등

* 대마도는 작은 섬마을로 카드 불가한곳과 숙소는 민숙형태로 공동욕탕 이용하는 곳이 많습니다

* 기상악화로 선박결항 및 여행자의 과실로 인해 추가 체제비는 여행자 부담,타 선박 및 다른 운송 수단을 이용하시는 겨경우,비용의 차액 및 추가부분은 고객부담

* 기상악화로 선박결항시 실비공제후 환불처리



대마도[]

한국 일본 규슈 사이 있는 . 행정상으로 나가사키 속하며, 인공 운하 의해 남과 으로 나누어져 있다. 면적 709제곱킬로미터이다. ‘대마 일본어Tsushima[]’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이다. 쓰시마 섬(일본어: 對馬 (つしま), 문화어: 쯔시마 섬)한반도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일본이다.

규슈본토 사가 현 가라쓰 시 하도 곶 에서 북서쪽으로 82km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에 위치한 이키 섬까지의 거리는 47.5km이고, 한반도와의 거리는 약 49.5km이다.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이다. 섬 넓이는 약 700km²이며, 섬의 인구는 2010년 기준으로 34,610 이다. 농경지는 전면적의 3.4%이며, 대부분이 산지이다.

관광업이 번성하였고, 대한민국 이외에,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등에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삼국시대 초에는 쓰시마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6세기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국주(對馬島主)가 일본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389년(고려 창왕 2년)에는 박위가 쓰시마를 토벌하였다.

본래 쓰시마는 아비루 가문이 지배하였으나, 12세기 고레무네노 시게히사(惟宗重尙)가 아비루 가문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한 이후, 고레무네노 시게히사의 후손인 소 가문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며, 쇼군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는 등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외교창구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다.

조선 국왕은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통상의 편의도 봐주고 또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의 행패가 여전하자 세종 때인 1419년 음력 6월 조선세종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군사 1만 7285명을 동원하여 대마도 원정을 하는 등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쓰시마 국주의 간청으로 왜인의 통상을 위하여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또한 조선의 국왕이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도 조선에 근접한 왜구의 근거지로서, 이것을 무마하려는 한국의 해방정책(海防政策)에 따라 특수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후에도 조선은 쓰시마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근거지가 되면서부터 차츰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이 설치되었고, 쓰시마 도주인 소(宗) 가문이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1871년에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인하여 쓰시마 후추 번이 폐지되고, 이즈하라 현(嚴原縣)이 설치되었다. 1876년에 나가사키 현(長崎縣)에 편입되었으며, 소 가문은 일본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일본 제국의 강요로 소 가문과 정략 결혼을 하기도 했다.

쓰시마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672년 21대 당주이자 쓰시마 후추 번 3대 번주인 소 요시자네(종의진, 宗義眞)때 작은 배가 아소만과 대마도 동부를 왕래할 수 있도록 오후나고시(대선월, 大船越)이라는 운하를 만들어 두 개의 섬으로 나뉘었고 1900년 일본 제국 해군러일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소만(浅茅湾)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제키세토(万関瀬戸)라 불리는 더 큰 폭의 운하를 만들게 되었다. 만제키세토는 쓰시마 섬을 위 아래로 나누는 경계로, 쓰시마 북부를 가미시마(上島), 남부를 시모시마(下島)라 부른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쓰시마)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949년 1월 7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1][2] 또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2013년 3월 22일에는 의정부시의회가 대마도 반환을 촉구하는 한편 대한민국정부차원의 반환 촉구를 요청하고 있다.[3]

최근에는 일본의 한 언론에서 "한국이 쓰시마 섬을 넘본다"라는 기사를 써서 영토분쟁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4] 그리고 산케이 신문에서는 "쓰시마가 위험하다"라는 쓰시마 위기론을 기사로 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