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6. 16:26ㆍ★ MOUNTAIN/- 산행지소개
북설악 성인대(신선대) 산행 및 금강산 화암사 숲길 트레킹
◈ 산 행 지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일대
◈ 산행일시: 2022년 5월14일(토)
◈ 산행코스 : 제1주차장-화암사 일주문-제2주차장-수바위(수암)-헬기장-시루떡바위-전망바위-
갈림길(신선대 안내판)-성인대(신선대)-갈림길(복귀)-상봉삼거리-수암전-화암사
◈ 산행시간 : 2시간
◈ 산행거리 : 4km
◈ 산행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날씨 : 바람이 많은 여름 날씨
몸과 마음이 울쩍하여 푸른바다와 푸른산을 바라볼수 있는곳이 어딜까? 생각하다가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는
북설악 성인대(신선대) 산행을 기획하고 출발해 본다.
화암사 직전에 있는 제1주차장에서 주차료 3천원을 지불하고 화암사 일주문을 지나면 제2주차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더이상 화암사로 차량으로 진행할수 없어 주차 후 도로 따라 진행 후 좌측편 이정표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화암사에서 선인대코스는 두군데 있는데 하나는 제2주차장에서 약300m 도로 따라 오르면 우측편으로 기념품 숍이 있고 좌측편 이정표가 있는곳으로 오르면 수바위와 시루떡바위를 지나게 코스와 또 다른 코스는 화암사 세심교(洗心橋) 바로 앞 좌측편 계곡옆길로 진행하는 코스도 있다.
아기자기하게 오름길을 한차례 밀어올리면 웅장하게 생긴 수바위 앞에 도착하고 헬기장을 지나 다시 한번 더 오르면 시루떡바위 앞에 도착하게 된다. 물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오르면 조망이 확 트인 전망바위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사진 놀이를 시작하게 된다.
전망바위 앞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고 성인대(신선대)방향은 통제구간이라 플랭카드가 붙혀 있지만 잠시 울산바위를 조망하고자 위법자가 되어 본다. 성인대(신선대)는 울산바위가 가장 멋지게 보이는 곳이다. 예전에는 통제구간 이었지만 화암사 신선대 화엄사 원점회귀 코스가 열려 아름답고 멋진 선인대를 마음놓고 갈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울산바위가 멋지게 보이는 이곳에서 비박을 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장소라 하산 하기가 싫은데 바람이 너무도 세차게 불어 신선대에 머물지 못하고 다시 빽하여 전망바위 앞 갈림길로 복귀한다.
성인대(신선대)는 북설악산에 위치하고 인근에 미시령과 세간령, 마산봉이 있으며 비교적 등산 메니아들 한테 덜 알려졌있다. 설악산의 뛰어난 경관을 지닌 성인대 화암사에서 백두대간 신선봉을 잇는 코스로서 특히 울산바위의 기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꼽을 만큼 조망이 좋은곳이다. 오늘 따라 하늘도 구름 한점이 없이 맑아 저멀리 동해 푸른바다가 조망되어 마음이 포근해 지는 순간이다.
울산바위를 조망하고는 갈림길로 복귀하여 화암사 숲길방향으로 하산하다 보면 이 등로길이 백두대간상에 있는 상봉으로 이어지는 등로길이다. 백두대간 산객들은 미시령에서 상봉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통제구간이라 간혹 이코스를 이용하는 산객들도 있다.
상봉삼거리에서 상봉방향을 한참을 바라보고는 화암사로 하산하면서 화암사골 계곡에서 맑은물에 손도 씻어보고 휴식을 취하고는 화암사 경내를 탐방하면서 산행을 마무리해 본다.
화암사로 진행하는 도로의 모습
화암사 경내로 가기 위해서는 제1주차장에서 주차료 3천원을 내고 제1주차장을 통과하여 도로 따라 오르면 금강산 화암사 일주문을 지나게 되고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는 제2주차장앞에 도착한다.
이 지점에서 차량을 주차하고 도보로 진행하는데 도로옆으로 석가모니 탄신일이 지났는데도 설치되어 있었다.
연등이 설치되어 있는 도로 따라 진행
등로 입구 위 바위에 금강산 화암사라고 적혀 있는 곳으로 진행
등로 입구의 모습
우측편으로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위치하고 있고 수바위-시루떡바위-성인대로 연결하는 등로길이다.
등로입구에 설치되어 안내판의 모습
수바위 앞 이정표
수바위의 모습
수바위(쌀바위)
금강산 화암사 남쪽 300m 지점에 수바위라는 왕관모양의 우람한 바위가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바위밑에 위치한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이 시주를 청하기 어려웠는데
어느날 스님 두분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니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그곳을 찾아 끼니때 마다 지팡이로 세 번을 흔들라 ”고 얘기하자
잠이깬 스님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수바위에 올라 노인이 시킨대로 했더니
신기하게도 두사람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고
그 후로는 식량걱정없이 편안히 불도에 열중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합니다
그후 몇 년이 지난 어느날 화암사를 찾게된 노승이 화암사 스님들은
시주를 받지않아도 “수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걱정없이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세 번 흔들어서 두 사람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 번 흔들면 네사람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에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침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넣고 여섯 번을 흔들었더니
쌀이 나왔던 구멍에 피가 나왔고 객승의 욕심에 산신의 노여움때문인지
그 후로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바위 모서리의 모습
시루떡바위의 모습
북한산 영봉 아래에도 시루떡 바위가 있는곳 이곳에 있는 바위는 작은 시루떡 바위라고 생각하며 성인대(신선대)로 향하여 진행한다.
성인대(신선대)조망바위의 모습
성인대(신선대)에 올라서면 조망이 일품이다. 북쪽으로 마산봉과 상봉 그리고 미시령이 조망되고 남쪽으로는 고성군 토성면 일대와 속초의 푸른바다가 조망된다.
성인대(신선대)에서 마산봉방향으로 인증샷
신선대(神仙臺,성인대,645m)
아주 먼 옛날 천상의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일명 신선대(神仙臺) 성인바위는 앞으로 올 어진이가 탈 말바위를 거쳐 토성면 인흥리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성황산 맥의 끝을 맺었다.
아주 먼 옛날 조씨 성을 가진 나그네가 모닥불을 피워 쉬고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모닥불에 뜨거워져 있던 조약돌을 호랑이 입에다 집어넣었고 호랑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뒹굴다 돌만 뱉어버리고 죽으니 뱉어버린 돌의 흔적 일부가 아직 남아 있으며 훗날 죽은 호랑이는 인흥리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성황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바위를 자세히 보면 거북이를 닮았는데 거북이 머리 부분이 미시령(해발 825m) 도로 쪽을 향해 지금도 기어가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바위 주변에는 성인이 서있는 모습의 입석과 머리바위가 있어 세인들에게 자연의 신비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성인대(신선대)의 모습
신선대(성인대)는 설악산의 끝자락이자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첫 봉우리라는 신선봉 아래 자리잡고 있다. 해발 645m로 설악의 웬만한 봉우리에 견줄 수 없지만 북설악 일대의 전경과 동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최고 전망대다. 화암사에서 출발해 신선대를 거쳐 수바위로 이어지는 4.1㎞ 남짓의 원점회귀 산행코스인 ‘금강산 화암사 숲길’이 잘 다듬어져 있다. 2시간이면 충분하다. 신선대에 서면 울산바위가 웅장하게 펼쳐진다. 바위 등줄기를 따라 창처럼 일어선 거대한 봉우리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고성 땅 너머 속초와 푸른 동해가 눈에 들어온다. 미시령 옛길이 구절양장처럼 펼쳐져 보인다.
성인대(신선대) 아래에 있는 돌고래바위의 모습
성인대(신선대) 이정표
성인대(신선대) 안내판의 모습
신선암에서 바라본 울산바위의 모습
신선암에서 울산바위 바라보며 인증샷
신선암에서 울산바위 바라보며 인증샷
신선암에서 울산바위 바라보며 인증샷
신선암에서 울산바위 바라보며 인증샷
신선암에서 바라보며 울산바위의 모습
신선암에서 바라보며 울산바위의 모습
신선암에서 바라보며 울산바위의 모습
신선암에서 바라보며 백두대간길(상봉, 마산봉)의 모습
신선암에서 바라보며 동해바다의 모습
백두대간 상봉 갈림길의 모습
성인대(신선대) 삼거리에서 이정표 뒤편 금강산 화암사 숲길로 진행하면 백두대간상에 있는 상봉으로 진행할수 있는 등로길이 나오는데 출입금지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미시령에서 상봉으로 이어지는 등로길은 통제구간이라 예전 백두대간을 잇는 산꾼들은 이곳으로 내려오고 올라갔던
지점이다.
상봉 갈림길 이정표의 모습
선인대(신선대) 등산 2코스 입구의 모습
선심교 앞에 있는 두번째 성인대 등산할수 있는 입구다.
오도송 기념비의 모습
선심교에서 바라본 예전 돌다리의 모습
고성 화암사(高城 禾岩寺)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있는,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화암사(華巖寺)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1990년 9월 7일 강원도의 문화재자료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화암사(華巖寺)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조선 인조 1년(1623)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3년(1625)에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고종 1년(1864)에는 지금 있는 자리인 수바위 밑에 옮겨 짓고 이름도 수암사(穗岩寺)라 하였다가 1912년에 다시 화암사(禾岩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때 다시 한 번 불에 타 훗날 법당만 다시 지었다.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 준비를 위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일주문,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도군(浮屠群)과 일부 계단석이 남아 있다
화암사 주변 관광지 안내판
고성 8경 안내판
풍악 제일루와 감루수의 모습
범종각 아래에는 거북이 입에서 감로수가 흘러나오고 있고, 거북이 받침돌에는 '욕도생사고欲度生死苦 당복감로미當服甘露味 생사의 괴로움을 건너고자 한다면 마땅히 감로수 맛을 보아야 한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화암사 대웅전 오르는 계단의 모습
화암사 범종루위 모습
금강산 화암사 대웅전과 9층 석탑의 모습
화암사는 769년(혜공왕 5) 진표율사가 처음 검물을 짓고 화암사라 하였다. 1623년(인조 1) 에 소실되어 1625년(인조3) ㄷ다시 지은 후에도 몇 차례의 소실과 중건이 거듭되었다; 1912년 화암사라 이름을 고쳤고 1915년 소실된 후 다시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그 후 법당만 다시 지었다. 화암사 경내의 현재 건물들은 1991년 8월 이곳 신평들에서 개최되었던 제 17회 세계잼버리대회의 개최준비를 위한 주변정비계획에 따라 기존 건물인 법당을 철거하고 다시 지은것이다. 현재 경내에는 삼성각, 미타암,법당,명부전,설법당,요사체,종각,금강누각,일주문,등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 사찰입구에는 조선시데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부도 15기가 남아 있다.
미륵대불 오름길에 뒤돌아본 수바위와 그 뒤로 보이는 설악산 울산바위.
수바위 오른쪽 능선은 금강산 자락인 금강산 제1봉 신선봉에서 뻗어온 성인대 능선이다.
미륵대불에서 내려오는 언덜길에서 바라본 설법전(맨 앞), 대웅전(설법전 뒤), 그리고 팔각구층탑.
고성高城 금강산金剛山 화암사禾岩寺는 금강산 1만 2천봉 8만 9암자 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첫 봉우리 신선봉 자락인 강원 고성군 토성면 화암사길(신평리)의 천진천天津川 좌안에 자리 잡은 조계종 사찰이다.
화암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혜공왕 때 금강산으로 들어온 법상종 개조인 진표율사眞表律師[율사란 불자가 지켜야 할 규범인 계율戒律에 정통한 승려]가 769년 금강산 남쪽 기슭에 창건한 화엄사華嚴寺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화엄사란 이름은 화엄경을 통해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조선 인조 때인 1623년 불에 타 버렸고, 2년 후 1625년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으며, 고종 때인 1864년 지금 자리인 수바위 밑에 절을 옮겨 짓고 이름도 수암사穗岩寺라 하였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지금 이름인 화암사로 바꾸었다.
화암사란 이름은 남동쪽의 화암禾岩[현 수바위] 때문에 생겼다는 기록이 1633년(인조 11년)에 지은 ≪간성지杆城誌≫에 기록되어 있다.
현 사찰 건물은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 때 새로 지었으며, 사찰 입구의 부도군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화암사 전각 중 설법전이 1990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화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 세심교洗心橋 앞에서 바라본 화암사.
세심교 아래로 흐르는 천진천은 동으로 흘러 고성 청간정淸澗亭 남쪽을 통해 동해로 유입된다.
다리 건너 보이는 전각 자우당慈雨堂엔 종무소가 있고, 불교문화체험관(템플스테이) 등으로 사용되는 요사寮舍(요사채)이다
금강산 화엄사(華嚴寺)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769년(혜공왕 5)진표(眞表)가 창건하여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鉢淵寺)를, 서쪽에 장안사(長安寺)를, 남쪽에 이 절을 각각 창건했는데,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또 진표는 이 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941년(태조 24)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으며, 1401년(태종 1)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년(인조 1) 불에 타자 1625년 중건하였다.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하였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불태워 버렸다.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무릉도(武陵島)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하였으며, 해성(海城)은 안양암을 중수하였다.
1760년(영조 36) 대웅전과 향각(香閣), 승당이 불 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승당을 세웠고, 1762년에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 도한(華城 道閑)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최(崔)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 오도록 하여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華應殿)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풍 6폭, 연(輦)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四方禁標)를 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 절은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寺域)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했으며, 춘담(春潭)이 중심이 되어 중건에 착수하였다.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穗峰)은 탱화를 조성했다.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하자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냈으며, 1868년에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秀巖)과 북쪽의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1872년수봉이 새 터에 법당과 영각(影閣),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년(고종 19) 자허(耔虛)와 선월(船月)이 철원 장구사(長久寺)에서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축성(竺星)이 중수했으며, 1909년영운(影雲)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12년에는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1915년 9월 다시 불타서 1917년 중건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때 크게 파손되어 건물 1동만 남게 되었다.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한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良說)이 중창하여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인법당(因法堂), 금강루(金剛樓), 일주문, 미타암(彌陀庵), 요사채 등이 있다. 특별한 문화재는 없다.
수암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수암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를 보고 ‘3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면, 300번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피가 나왔고, 이후 쌀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미륵대불의 모습
화암사 대웅전에서 우측편으로 미륵대불 있는 곳으로 가파른 언덕길이 나오고, 길 입구에는 '용화정토龍華淨土'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용화정토란 미륵불이 사는 이상세계를 말하는 것이므로 용화와 미륵은 같은 뜻이다.
설법전 오른쪽 끝에 걸린 '일로향실一爐香室' 편액이 달려 있다. 일로향실이란 차를 달이는 데 쓰는 화로인 '다로茶爐의 향이 향기롭다'는 뜻이며, 추사가 쓴 '일로향실'이란 편액이 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한 요사채에 걸려있다.
화암사 장돗대의 모습
세심교(洗心橋) 위에서 바라본 왕관 모양의 큰 바위인 수穗바위.
수바위는 쌀바위, 화암禾岩 등으로도 불리며, 이름의 유래에 대해 다음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시주를 구하기 어려운 산속 절에서 수행하던 두 스님의 꿈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 바위에 작은 구멍이 있으니 찾아가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을 깬 두 스님은 아침 일찍 이 바위로 달려가 지난밤 꿈에 나타났던 백발노인의 말대로 했더니 신기하게도 2인분의 쌀이 나와 바위 이름을 쌀바위라 부르기 시작했고, 한자로 (벼)이삭 수穗를 써서 수바위 또는 벼 화禾를 써서 화암이라 표기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두 스님은 끼니 때마다 이 바위에서 쌀을 받아와 공양미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을 잠시 들린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것을 보고는 지팡이를 여러 번 흔들어 더 많은 쌀을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쌀 대신 피가 나왔으며, 그 후부턴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객승의 욕심이 산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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