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30. 09:18ㆍ★ 기맥,지맥/한북수락지맥[완료]
한북수락지맥 3구간 담터고개에서 아차산 광나루 한강까지
◈ 산 행 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중랑구 망우동,광진구 중곡동, 광장구/남양주시 퇴계원면 갈매동/
구리시 인창동, 교문동 망우산(해발282m), 아차산(해발295.7m)한북수락지맥 3구간
◈ 산행일시 : 2019년 1월 5일(토요일, 당일산행)
◈ 산행코스 : 담터고개-새우고개-135.4봉-구리-포천간고속도로(동물이동통로)-구리둘레길1구간 접속-
구룡산-국군구리병원-망우리고개-망우산3보루-망우산2보루-망우산 1보루-용마산-아차산
4보루-아차산정상(3보루)-아차산5보루-아차산1보루-해맞이광장-고구려정-광나루역
◈ 산행시간 : 11시30분~15시30분(4시간, 산행 및 휴식 시간분 포함)
◈ 산행거리 : 약 17.2km(지맥 17.2km, 접속구간 0km), GPS거리(16.11km)
◈ 산행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날씨 : 영하2도~영상4도 맑은 날씨
◈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 도상거리(km),실제거리(km),소요시간(시간분), GPS 거리(km)
담터고개-(2.9)-새우개고개-(3.0)-망우리고개-(4.4)-아차산-(2.7)-광나루
◈ 교통편 : 대중교통
- 갈때 : 하남-강동역(5호선)-군자역(7호선)-태릉역(6호선)-화랑대역(6호선)-202번 시내버스-담터고개
- 올때 : 광나루역(9301번)-하남
◈ 에필로그
2019년 첫 산행지를 지금까지 미루어둔 한북지맥에서 분기되는 수락지맥 마지막 구간을 탐방하기로 한다.
어제의 숙취가 이른아침까지 남아 있어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베낭을 챙겨 현관을 나선다.
날씨는 제법 쌀쌀하고 어제의 술 때문에 속은 불편하다.
집앞 식당에 들려 해장국 한그릇을 비우고는 한북수락지맥 들머리지점인 담터고개로 이동한다.
오늘 진행할 담터고개에서 아차산구간은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지만 담터고개에서 새우고개까지는 난개발로 인하여 공장지대와 군부대 그리고 배밭등이 마루금을 막고 있어 마루금 이어가는것이 쉽지만은 않다.
선답자의 후기글을 보면은 담터고개에서 새우고개까지는 도로 따라 진행 후 새우고개 이후부터는 마루금이 잘되어 있어 마루금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마루금에 충실하고픈 생각에 오릭스맵을 이용하여 수락지맥 마지막 구간을 탐방하기로 한다.
한북수락지맥이란
백두대간 줄기에서 분기한 한북정맥을 이어오다 보면 한북정맥의 죽엽산( 600.6 m )과 덕고개 사이에 있는 축석령( 祝石嶺 )에서 분기 되어 용암산( 龍岩山,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476.9 m ), 도정산( 道正山, 1/25000 지형도에는 깃대봉, 288.3 m), 수락산( 水落山, 서울특별시 노원구, 경기도 의정부시 640.6 m ), 불암산(佛岩山, 서울특별시 노원구, 남양주시 별내면, 509.7 m ), 구능산(九陵山, 경기도 구리시, 177.9 m ), 망우리( 忘憂里 )고개, 아차산 용마봉( 峨嵯山 龍馬峰, 348.8 m )에서 마지막 산봉우리를 일구고 나서, 중랑천( 中浪川 ) 푸른 물길로 능선의 긴 여정을 마치는 지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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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터고개(해발 40m)의 모습
담터고개는 서울시 노원구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전에 한양으로 진입하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이 아파트 숲으로 개발이 되어 옛 모습을 찾을수가 없다.
지난번은 삼육대학 후문을 이용하여 담터고개에서 끝내고 선답자의 후기글을 답습하였다. 선답자의 후기글을 보면 항상 사진에 나오는 담터고개 추어탕집 앞에서 베낭과 옷을 정리하고는 식당 옆 골목 천성교회방향으로 출발한다.
담터고개
담터마을에 위치한 고개로 담터마을의 유래를 보면 담터마을은 작은 야산이 담을 쌓은 듯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장기(墻基)마을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담터마을의 한문표기에서 나타난 것이다. 옛날에는 담터마을로 불리우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양주군 노원면 장기리로 불리어 졌고 해방이후 다시 “담터”라 하였다
담터
삼화농장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매동 6, 7, 8, 9통 지역을 말하며 북쪽과 서쪽으로 둘러싼 작은 야산들이 마치 마을을 담으로 둘러싼 듯하여 붙은 이름이다
퇴계원(退溪院)
예종이 부왕 세조를 모신 광릉(光陵)을 참배하기 위해서, 행차하는데 장애 요인으로 떠오른 것이 교통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천 바닥에 길을 닦음과 동시에, 기존의 하천을 바깥쪽으로 물리친데서 퇴계원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한편, 퇴계(退溪)는 성리학자 이황의 아호이며, 현재 퇴계원면은 전국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면이다
천성교회 입구의 모습
한북수락지맥 담터고개에서 아차산방향은 담터고개 추어탕 집 옆 골목으로 진행하면 천성교회가 나오고 천성교회 안으로 진입하여 사진에 보이는 건물(구건물)을 끼고 돌아 계단으로 내려서면서 산행이 진행된다. 난 개발로 인하여 마루금이 단절된 한구간의 모습이며 도로 따라 갈매역-태릉골프장-새우고개까지 가는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천성교회 구건물 뒤편의 모습
교회 구건물을 끼고 돌면 작은 계단의 골목이 나오고 골목을 내려서면 폐허가 된 집이 나온다
골목을 빠져나오면 도로가 나오고 T자 골목에서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다시 정면으로 공장이 나오고 Y자 골목에서 좌측방향으로 전환하여 진행하면 선답자의 길잡이인 대흥수출포장 이정표가 벽면에 붙혀있다.
Y자 골목에서 약3,40m 진행하면 좌측편으로 대흥수출포장 공장이 나오고 도로 따라 진행하면 경춘선 철길이 나오는데 철길은 어디로 가고 비포장 도로로 변해 있었다.
천성교회에서 내려서면 나오는 폐허가 집의 모습
대흥수출포장 공장 통과
구 경춘선 철길 통과
선답자의 후기글을 보면은 철길이 나오는데 철길 어디로 가고 비포장 도로로 변하여 있었다.
경춘선 철길 도로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넓은 공터가 나오고 공터 옆으로 이정표가 설치디어 있다.
넓은 공터의 모습
이 지점에서 갈매교회방향은 우측편 콘테이너가 설치되어 있는 지점에서 조금 10m 가량 내려가서 밭을 건너 골목으로 진행하면 우측편으로 갈매교회가 나온다.
또 천성교회 후문에서 내려서면 폐허가 집 T자 골목에서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이지점(공터)로 바로 진행하게된다.
넓은 공터 이정표 : ←경춘선숲길 200m, ↑담터마을, → 갈매신도시 500m
이정표에도 담터마을방향이 직진으로 되어 있다. 담터고개에서 진행하면 천성교회안을 통과하여 T골목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할것을 권장한다.
갈매교회 앞 통과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던 지점에서 대각선방향으로 밭이 나오는데 겨울철이라 농작물이 없어 그냥 통과하지만 농작물이 있을 경우에는 우회하여야 할것 같았다 밭을 통과하며 골목길이 나오고 잠시후 우측편으로 갈매교회 입간판이 나온다. 갈매교회앞에서 계속하여 직진으로 진행하면 대한통운 택배 집하장 앞을 지나게 된다.
대한통운 택배 집하장 통과
시골밥상 식당 통과
본추어탕 식당 통과
경춘선 고가철로의 모습
본추어탕 식당을 지나면 정면으로 경춘선이 나오고 새우고개 방향은 우측편 도로로 진행한다.
구리농협 갈매지점 통과
태릉골프연습장 입구 통과
새우개고개 도착
새우고개는 경기도 구리시에서 서울특별시 중랑구로 넘어가는 47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여기까지 난해한 등로길을 걸어 왔지만 선답자의 후기글 덕택으로 알바 업이 무난하게 진행하였다.
새우고개에서 171.5봉까지가 문제인데...
새우개고개 (해발60m)
새우고개는 경기도 구리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47번국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통량도 담터고개 못지않다. 횡단보도를 건너 SK주유소 뒷산이 지맥길인데 배밭이 가로막고 있어 배 수확철에는 통과하기가 어려울것 같았다.
SK주유소 우측편 도로로 올라서면 좌측편으로 배밭이 나오고 배밭안 콘테이너 옆에 설치되어 있는 문이 열려있어 밭배 농장로로 따라 산 정상으로 진행한다.
새우개고개(新峴, 해발70m) - 서울 중랑구 신내동
새우개고개는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에 있던 마을로서, 이곳에서 구리시로 넘어가는 고개가 구불구불하여 새우 같다 하여 새우고개라 하고 혹은 줄여서 새고개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표기하면서 와전되어 신현이 되었다. 新峴・새우개마을・새고개마을로도 불렸다.
중랑구 신내동의 자연마을인 새고개 마을에서 구리시 갈매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지형이 새우등과 같이 굽어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새우고개,새고개라고도 하였다. 새고개는 뜻이 변하여 한자명으로 신현이라고도 하였다. 또 마을 뒷산의 형국이 마치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새고개, 곧 조령이라고도 하였다. 이 고개 부근의 마을도 새고개 마을이라 하고 한자명으로 신현리라고 하였다. 이 고갯길은 국도 47번과 연결되는데 좁고 구불거리지만 지름길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우회길(파란색-지맥마루금, 빨강색-우회길)
새우고개에 있는 SK주유소 통과
횡단보도를 지나 SK주유소을 좌측편에 두고 비포장 도로를 오르면 길 막히고 좌측편으로 배나무 과수원이 나온다.
새우고개에 있는 SK주유소 통과 지나며 뒤돌아본 모습
배나무 과수원의 모습
배밭 철조망 문이 열려 있어 과수원 안으로 들어가 산 정상부로 바로 올라친다.
배나무 과수원의 진행
배 수확철에는 진입이 어려울것 같고 우회로를 이용하여 하겠다. 과수원 통과하면 나무로 만든 정자가 나오고 등로길이 잘 정돈 되어 있다. 마루금은 좌측방향으로 올라서야 하지만 우측편으로 올라오는 등로길을 우회로로 정하면 좋을것 같다.
아마도 새우고개에서 횡단보도 지나 사거리를 직진하면 좌측편으로 올라서는 들머리가 있을것 같다.
정자의 모습
배밭 과수원 농로길을 따라 정상부로 올라서면 울타리가 나오고 울타리를 넘어서면 휴식을 할수있는 나무정자와 잘 정돈된 등로길이 나온다.
지금부터는 등로길 따라만 가면 아차산으로 이어진다.
정자 통과 후 뒤돌아본 모습
잘 정리된 등로길의 모습
말뚝 삼각점 통과
정자에서 완만하게 올라서면 우측편으로 말뚝삼각점이 나오고 좌측방향으로 잘 정돈된 등로길로 진행하면 갈림길 앞에 도착한다. 갈림길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구리포천간 도로위 생태통로에 도착하게된다.
말뚝 삼각점 통과 후 뒤돌아본 모습
135.4봉의 모습
135.4봉에 있는 삼각점
정체불명의 삼각점이 등로 좌측편에 설치되어 있고 마루금은 지도상 보현사로 가는 등로길 버리고 좌측편으로 내려서 진행한다.
구리갈매지구 보현사 갈림길 이정표의 모습
한북 수락지맥 마루금은 이지점에서 직진길 버리고 좌측방향으로 진행한다.
구리포천간 도로위 전망대의 모습
전망대에서 우측편으로 진행하면 구릉산정상을 우회하는 등로길이고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구릉산을 경유하는 등로길이다. 좌측편으로 내려 생태통로를 지나면 구리둘래길 1구간에 접속한다.
구리포천간 도로위 전망대 이정표의 모습
구리-포천고속도로 위 생태공원의 모습
구리-포천고속도로 위 생태공원 이정표
마루금은 구리둘래길 1구간을 따라 진행한다.
구리-포천고속도로 위 생태공원 통과 후 뒤돌아본 모습
이정표 : ←구리둘래길 1코스(망우산입구), →구릉산 우회등산로, ↓갈매마을길/구래둘래길 2코스
구리-포천고속도로와 등로길의 모습
구릉산 올라면서 뒤돌아본 모습
쉼터 통과
쉼터에는 나무의자와 샘터가 있는데 겨울철이라 그런지 물은 나오지 않고 등산객이 쉬었다간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체육시설물들도 갖추고 있었다.
갈림길 통과
갈림길에서 마루금은 구래둘레길 1코스(망우산입구)방향으로 진행하며 좌측편으로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이 동구릉이다. 동구릉에 대해서는 잠시후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이정표 : ←갈매마을길(태극기공원), →구리둘레길 1코스(망우산 입구), ↓갈매마을길/구리둘레길 2코스(갈매천 입구)
구릉산 갈림길의 모습
마루금은 좌측방향으로 철조망 따라 내려서면 되지만 우측편으로 약간 벗어나 있는 구릉산을 찍고 마루금 이어간다.
구릉산 갈림길의 이정표
←구리둘레길 2코스(국군구리병원), →쉼터, ↓구리둘레길 2코스(갈매천 입구)
구릉산(九陵山, 해발171m))
구릉산은 아홉개의 릉(왕릉)을 말하는데,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建元陵)부터 현릉, 목릉, 숭릉, 휘릉, 혜릉, 원릉, 경릉, 수릉까지 아홉 개 왕릉이고 이를 동쪽에 있는 아홉릉이라고 동구릉(東九陵)으로 부르며, 조선시대에는 '검암산(儉巖山, 儉岩山)'이라 불렸고, 마을 사람들은 '금암산 (錦岩山)' 또는 '구릉산(九陵山)'이라고도 한다.
구능산(九陵山)
구능산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과 서울시 중량구 망우동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산 아래 동쪽에 동구릉(東九陵/사적193호)이 있다고 해서 구능산(九陵山)이라고 부른다. 수락지맥의 남진(南進) 방향으로 새우개고개에서 망우리고개까지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정상부에는 삼각점과 쉴수 있는 통나무 의자가 몇개 설치되어 있다.
구릉산 삼각점 (△341,1994재설)
구릉산 삼각점 (△341,1994재설) 안내판
구릉산 갈림길 통과후 뒤돌아본 모습
동구릉 철조망
구릉산정상에서 내려서면 왼쪽편으로 철망이 설치되어 있는데 안쪽은 동구릉이다. 철조망 따라 계속하여 진행하면 북부간선도로 육교 위에 도착하고 군부대(57사단)와 국군구리병원을 잇는 육교를 지나 새로 만들어 놓은 나무계단을 올라서 마루금은 진행하게 된다.
잠시 동구릉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 동구능
1대 태조(太祖) 능호 : 건원릉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조성시기 : 1408년(태종8) 9월 9일
* 능의구성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 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 능의역사
1408년(태종 8) 태종은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6월 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
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 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구릉산 우회등로길 접속
구리-포천고속도로 위 생태공원에서 우회하여 진행하면 이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정표 : ↑구리둘레길 2코스(국군구리병원), ↓구리둘레길 2코스(갈매천 입구), → 구릉산 우회등산로(갈매천 입구)
등로길에 설치되어 있는 군용 말뚝의 모습
군 초소의 모습
등로길 좌측편으로 57사단이 위치해 있으며 철조망 따라 계속하여 진행한다.
철조망 옆 등로길 진행
북부간선도로 조망지의 모습
북부간선도로의 모습
마루금은 좌측편으로 내려섰다 정면에 보이는 산으로 올라서야 한다. 예전 선답자들은 우측편에 있는 철계단으로 올라섰다라고 하는데 지금은 구리국군병원이 들어와 잘 정리된 철조망 옆길을 이용하면 편리하게 진행 할수가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리국군병원의 모습
북부간선도로 위 육교의 모습
구리둘래길 안내도의 모습
군부대 입구 날머리지점
구리 국군 병원의 모습
구리 국군 병원 앞 이정표
국군구리병원 표석
국군구리병원 옆 등로길로 진행
국군구리병원 통과 후 뒤돌아본 모습
국군구리병원이 들어서면서 새로 만들어진 나무계단으로 진행
국군구리병원 철조망 옆길로 진행
폐허가 된 초소의 모습
예전 선답자의 후기글을 보면 꼬 나오는 사진이다. 새로운 등로길이 없을데 철계단을 이용하여 올라서면 만나는 곳 이제는 둘레길이 만들어져 마루금도 편리하게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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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숲길 우측편으로 두고 진행
교문사거리 갈림길 직진으로 통과
교문사거리 갈림길 이정표
두번째 나오는 교문사거리 갈림길 직진으로 통과
교문사거리 갈림길 이정표
애국지사 김중석 선생 묘지 위 갈림길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망우리 고개에 도착한다.
애국지사 김중석 선생 묘지 위 이정표
애국지사 김중석 선생 묘 안내판의 모습
애국지사 묘지 옆 등로길로 진행
망우산 조망
망우리고개로 내려서는 나무계단의 모습
구리둘레길 1코스 이정표
쉼터 통과
쉼터 앞에 설치되어 있는 구리둘레길 안내도
망우리고개
서쪽 아래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忘憂洞), 동쪽은 구리시 교문동. 조선지형도에는 '망후현'으로 기재되어 있고 관리사무실을 지나면 망우산 방향으로 두 갈래길로 나누어 지는데 좌측으로 방향으로 약500m 진행 후 우측편 묘지길로 오르면 산불감시초소를 만나고 본격적으로 망우산 보루길을 걷게 된다.
망우리 육교앞 이정표
중랑둘레길 안내도
망우리고개(忘憂里峙, 해발88m)
서울특별시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고개로서 6번 지방도가 지나는 길목이다,
태조 이성계가 검암산 밑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유택으로 정한 후 망우산 고개 위에서 쉬면서 신하들에게 “아아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於斯 吾憂忘矣).”라고 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일설은 태조가 南在를 대동하고 명당을 찾던 중 동구릉 부근에서 三穴을 얻었는데 이곳은 이미 남재가 묘 터를 잡아놓은 곳이었다.
태조가 남재에게 다른 곳과 바꿀 것을 제의하였으나 남재는 왕릉예정지에 제가 묻히는 것은 불경이며 후손에게도 중죄가 돌아가게 될 것이므로 불가하다고 대답하자 태조는 불망기를 써 줄 터이니 증빙을 삼으라 하고 불망기를 써 준 뒤 근심을 덜게 되었다는 뜻으로 망우리라고 했다 한다.
태조의 능터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로는 무학대사가 양주 회암사로 가기 전에 검암산 아래에 절터를 정하려고 했으나 그날 밤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이곳은 아홉 왕릉을 모실 자리라는 계시를 받고 그 자리에 태조를 모시기로 하고 절터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 망우리고개는 옛 고개 보다 남쪽에 새로 낸 고갯길이며, 옛 고개의 위치는 중앙선의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터널 윗길이다.
망우리 관리사무소의 모습
이정표의 모습
망우리 유래(忘憂里由來)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뒤, 자신이 묻힐 건원릉 터를 정하고는 "이제는 걱정이 없다."고 말한 곳이 바로 망우리 고개라는 지명 유래 이야기이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 대사와 정도전의 도움으로 서울[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후 이성계는 죽어서 묻힐 건원릉의 묘 자리를 정하고 돌아오다가 한 고개에서 쉬게 되었다. 이때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 모든 근심을 덜었다."라고 말해서, 이성계가 머문 고개를 '망우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한편 건원릉 묘 자리를 잡은 사람이 정도전이란 설과 무학 대사라고 하는 설이 있다.
망우리고개는 조선 시대 초기부터 지금과 같은 망우리고개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고자 한양 주변을 둘러보다가 검암산 아래에 있는 지금의 동구릉 일대를 무덤 자리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성계는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망우리고개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신하들에게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근심을 잊는 고개'라는 이름에서 망우리고개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릉 터는 태조 이성계가 죽고 나서 선정한 것이기에 이 지명 유래는 전설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어디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후세에 지어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망올리(亡兀里)라는 지명이 이 추정을 뒷받침한다.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조선 지형도』의 뚝도 부근 지도에는 망우현(忘憂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망우리에 잠드신 순국선열비앞 삼거리의 모습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한용운과 오세창, 백치 아다다의 계용묵, 찔레꽃을 쓴 김말봉,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 방정환, 민족사학자 문일평, 종두법을 널리 보급한 지석영, 독립유공자 서동일, 오재영, 김정규, 유상규, 서광조, 장덕수와 독립유공자이면서 이승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된 진보당의 조봉암의 묘가 여기 있다. 또한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문인 박인환과 최학송, 작곡가 채동선의 묘도 여기에 있다. 도산 안창호의 묘도 처음에는 이곳에 있었으나 강남으로 이장되였다.
순국선열비앞 이정표
서울둘레길 안내도
산불감시초소 통과
순국선열비앞 삼거리에서 좌측방향으로 약500m 진행후 우측편 묘지사이길로 올라서면 산불감시초소가 나오고 편안한 등로길 따라 마루금 이어간다.
망우산에서 바라본 구리시내의 모습
망우리 3보루 안내도
망우리 3보루 입구 표지석
망우리 3보루 유적지 안내판
망우산(해발278.5m )
망우리에 공동묘지가 생긴 것은 1933년. 일제강점기 1912년 일제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규칙’을 제정하여 미아리와 수철리(지금의 금호동) 그리고 신사리(지금의 은평구 신사동)에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그 후 이 세 곳으로 부족하자 1933년에 망우산에 추가로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망우리 2보루 안내판
망우리 2보루 입구 표지석
망우산2보루(해발 281.3m)
국가기준점(삼각점, △성동311) 안내판이 있고,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조망이 좋다. 일대에서는 가장 높아 여기를 망우산이라 하는 모양이다.
국가기준점(삼각점, △성동311)
망우산2보루 유적지 안내도
망우산2보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저멀리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이 조망되고 바로 아래로 중량천이 조망되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망우산 순환도로 접속
아차산일대 보루군
망우산 1보루 갈림길
망우산 1보루 안내판
백교마을 갈림길 이정표
산불감시초소
망우산 1보루(해발 279.4m)
정상부에는 삼각점이(△성동493)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삼각점은 보이지 않고 삼각점 안내판이 정상을 지키고 있었다.
망우산 1보루 안내도
망우산 1보루 정상부의 모습
망우산 1보루 삼각점(△성동493)
수락지맥 시그널의 모습
이곳에서 독도님의 수락지맥 시그널을 맞이한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전국 산맥을 탐방하시면서 후답자을 위해 봉사해 주시는 고마운 마음...
지금도 가끔 연락은 하고 있지만 항상 건강하시길 바래본다.
용마산 산악기상관측소 안내판
용마산 산악기상관측소의 모습
구리둘레길 이정표
쉼터와 570계단의 모습
용마, 망우, 아차산 종합안내도
570계단의 모습
구리시와 서울시 강동구 일대 조망
용마산 5보루 안내도
용마산 5보루(헬기장)
용마산 5보루(사적455호) 안내판
용마산 5보루에서 바라본 서울 중량구 일대의 모습
망우리 유래 안내판
용마산 4보루(헬기장, 용마봉 갈림길)
용마산 4보루에서 좌측방면은 아차산방향이고 용마봉은 우측방향으로 약500m 진행하면 정상이 나온다.
용마산 정상을 찍고는 아차산으로 향한다.
용마산 4보루 안내도
용마산 4보루 이정표
용마산 정상 직진에 있는 체육시설물의 모습
이정표
용마산(龍馬山, 해발348m)
서울특별시 중랑구 용마산로62길 53 (면목동)
용마산은 아차산의 최고봉으로 면목동 동현에 위치하고 있으며 망우리공원, 중곡동 간의 산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망우리에서 아차산성을 거쳐 어린이 대공원 후문 근처까지 이어진다.
용마산(龍馬山, 해발348m) 정상석에서 인증샷
용마산 정상석 뒤편에 용마봉 (348.6m △성동11) 대삼각본점(1등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으며, 종전지도에는 ‘용마산’이라 표기 되었는데 2016년 onMap 지도에 ‘용마봉’으로 표기되어 정상석도 용마봉이라 적혀있다.
아차산 4보루 조망
용마산 정상부를 찍고 용마산 4보루 헬기장을 지나 내려서면 나무계단이 나오고 잠시후 긴고랑 갈림길을 지나 나무계단을 오르면 아차산 4조루에 안착한다.
긴고랑길
긴고랑길은 용마봉에서 내려오는 골짜기가 길어서 긴골・진골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용마봉과 아차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다.
아차산성(阿且山城)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사적 제234호. 둘레 약 1,000m. 아차산성이라고도 쓴다. 한강변에 위치한 광장동은 남북 교통의 중요한 나루인데, 그 뒤편 아차산 위에 있는 아차산성은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산허리 일대에 위치했으며, 지금은 워커힐 구역에 있다.
산성은 표고 200m의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이상의 부분을 둘러서 성벽을 쌓았다. 테뫼식에 속하는 말굽형의 산성이지만 규모가 크며 성 안에는 작은 계곡이 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 가량인데, 동쪽·서쪽·남쪽에 문터가 남아 있다. 성벽의 구조는 삭토법에 의하여 대체적인 형태를 축조하고 그 위쪽에 돌아가면서 낮은 석축 성벽을 쌓았다. 현재는 성벽이 무너져서 토석혼축과 같은 외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그 남북으로 장성이 연결되어 있다. 즉 장성유적은 본래 뚝섬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되어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있고, 여기서 다시금 망우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축조되어 있다. 그런데 아차산 줄기를 따라 양쪽 평야지대로 뻗은 곳인 중곡동과 면목동 쪽의 중랑천으로 뻗어 있는 아차산 지봉에는 방위목적을 가진 수많은 보 등이 설치되어 있고 이것이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장성벽과 연결되어 구리시 아천리 쪽으로 뻗은 곳까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 장성은 서쪽의 뚝섬평야로부터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왕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그 일원의 방위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성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조된 백제의 '아단성'으로 볼 수 있다. 실제 그 기능은 백제 왕성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을 방어하는 시설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즉 한강 북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형적 조건을 이용하여 한강 상류와 하류 쪽에서 올라오는 선박의 움직임을 빨리 포착하여 왕성으로 연락해주는 진성이었다. 475년 고구려군에게 백제 왕성이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붙잡혀 죽은 곳이 이 산성 밑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실지회복을 위하여 출정해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곳을 이 산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차산성은 삼국 항쟁기에 있어서 각별한 방어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아차산4보루
아차산은 한강을 서로 차지하려고 삼국이 서로 싸울 때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부여(夫餘)에서 떨어져 나와 처음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한성백제(漢城百濟)는 남하(南下)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막기 위해 아차산에 산성을 쌓았으며 이 산성을 아단성(阿旦城) 또는 아차산성(峨嵯山城)이라 한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아차산까지 쳐 내려와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의 목을 베고 아차산을 차지하고는 이곳에 여러 개의 보루(堡壘)를 설치하였다. 아차산에 설치한 고구려 보루는 한강 유역을 경계하는 성채(城砦)로서 이곳에서 온돌과 우물이 발굴된 것을 보면 고구려 병사들이 숙식을 하며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 4보루 조망지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강 유역을 다시 신라가 차지하자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장군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고 아차산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戰死)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도 한다.
아차산 서쪽 기슭은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 때부터 사냥터로 사용되던 곳으로 이곳에 ‘살곶이목장’이라는 국립목마장(國立牧馬場)이 설치되었으며 그 이후 역대 왕들도 뚝섬에 성덕정(聖德亭)과 화양정(華陽亭)을 지어놓고 기마군사(騎馬軍事)들의 열무행사(閱武行事)를 열기도 하였다
아차산성(阿且山城)
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도 불린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대비하기 위해서 광주(廣州)에 도읍을 두었을 때 쌓았다고 한다. 현재 동쪽·서쪽·남쪽에 각각 문터와 수구(水口)터만 있을 뿐 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 안에 작은 계곡을 아우르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성벽은 약 1㎞ 정도인데, 해발 200m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쪽 한강변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 쌓았다. 기본적으로 경사진 땅을 깎는 삭토법(削土法)을 이용하여 대강의 형태를 쌓은 뒤 그 윗부분에 낮은 석루(石壘)를 둘러 쌓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현재 석루 부분은 무너져 흙과 돌을 함께 섞어서 쌓은 듯한 모습만 확인된다. 높이는 성벽 밖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이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도 있다. 성벽 안쪽은 1∼2m 내외의 높이인데, 수구 주변은 평탄해져서 안쪽벽은 남아 있지 않다. 성 밖에서 강변나루터에 이르는 구간은 좌우 양쪽의 지형을 이용해 흙을 깎아 성벽을 대신하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지금은 주택이 분포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이 산성은 백제 도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도하처(渡河處)를 수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 맞은편에 있는 서울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사적 제11호)과 함께 가장 중시된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백제시대의 아단성으로도 비정되고 있다. 한편 475년(개로왕 21)에 백제 수도 한산(漢山)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이 성 아래에서 백제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였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溫達/ ?∼590)이 죽령 이북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역시 이 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차산 정상 3보루(해발 295.7m)
예전에는 아차산 4보루가 아차산 정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적인 아차산 정상은 3보루 이며, 지형도상 '아차산' 표기지점 보루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阿且山, 지도에는 峨嵯山으로 한자표기가 다르다.
아차산(峨嵯山, 해발295.7m)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은 서울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 295m의 야트막한 산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리와 인근 시민들이 가벼운 산행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40분 정도의 등산로를 오르면 한강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과 용마봉 등의 광범위한 지역 모두 아차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백제의 도읍이 한강 유역에 있을 때 우뚝 솟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일찍부터 이 아차산에 흙을 깎고 다시 돌과 흙으로 쌓아 올려 산성을 축조함으로써 고구려의 남하를 막으려는 백제인의 노력이 있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 남쪽에 있는 풍납동 토성과 함께 중요한 군사적 요지로서 백제의 운명을 좌우하던 곳이기도 하다.
아단성(阿旦城), 아차성(蛾嵯城), 장하성, 광장성 등으로 불리우기도 하여 백제, 신라, 고구려가 한강을 중심으로 공방전을 장기간에 걸쳐 벌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의 광진구,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286m). 조선 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나며,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아차(峨嵯)'로 기록되어 있다. 아단성(阿旦城)이 아차성(阿且城)으로 다시 아차성(峨嵯城)으로 표기가 변화되어 오늘날의 지명으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기지』 양주조에는 "화양사(지금의 영화사)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에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와 『여지도서』 보유편에 "아차산봉수는 망우리면에 있다. 관아의 남쪽으로 50리이다. 북쪽으로 한이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남쪽으로 15리에 있는 목멱산 봉수에 신호를 보낸다."하고 전한다. 용마봉(349m)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에 보여지는데, 수릉(綏陵)에 대해 "헌종 병오년에 용마봉으로 옮겼다가······"로 언급하였다. 한편, 일부 사료에는 아차산성이 장한산성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현재 용마봉 정상에는 해발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이 설치되어 있다.
아차산(峨嵯山, 해발295.7m) 정상목에서 인증샷
아차산(阿嵯山·峨嵯山·阿且山) 기슭에 사는 사람들은 아차산을 아끼산·액끼산·에께산·액계산·액개산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옛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 또는 ‘아단(阿旦)’으로 언급되며, 조선시대에 쓰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휘가 ‘단(旦)’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 ‘단’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바꾸면서 ‘단’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자만 고쳤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등을 모두 ‘아차산’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峨嵯山, 해발295.7m) 정상에서 한강변을 바라본 조망
아차산 5보루 안내판
아차산 5보루
아차산 5보루에서 바라본 잠실타워
아차산 남쪽에는 한강을 건너는 서울의 나루 중 가장 상류에 위치한 광나루가 개설되어 흥인지문(興仁之門)과 광희문(光熙門)을 통하여 도성을 나와 살곶이다리가 있는 전관원(箭串院)과 광나루의 광진원(廣津院)을 거쳐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광나루로 내려서기 전에 워커힐이라는 지명이 호텔과 함께 전해 오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때 전사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으로 ‘워커장군의 언덕’이라는 뜻. 제3공화국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외화벌이라는 미명 아래 외국인을 상대하는 카지노호텔을 이곳에 지어 도박장사를 한 곳으로 지금도 예나 마찬가지로 성업 중에 있다
아차산 1보루 안내도
아차산 1보루에서 바라본 조망
아차산 1보루에서 바라본 조망
아차산 전망대의 모습
아차산 해돋이 광장에서 바라본 모습
아차산 고구려정의 모습
아차산 고구려정에서 바라본 모습
아차산공원 입구 표지석의 모습
아차산 주말농장의 모습
광나루역 주변의 모습
한북수락지맥 을 광나루역에서 종료한다. 광나루역(廣-驛/長神大驛)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로에 있는 지하철역(5호선)이다.
광나루역 천호대교방향의 모습
수락지맥은 지금의 어린이대공원 능선으로 하여 중랑천이 한강에 합수하는 한강수변공원까지 약 6km 정도 더 진행하는것이 정상인데 도심의 개발로 인하여 마루금이 없어지고 빌딩숲과 미로같은 도로 사이를 지나야하는 불편함 때문에 의미 없는 마루금 한강이 앞에 보이는 천호대교에서 종료한다.
한북수락지맥 산행 계획을 잡고는 고민이 많았다.
계획대로 진행을 해야하는지 제1구간 출입금지 구간인 용암산은 어떻게 진행하는지 문제와 오늘 진행한 담터고개에서 망우리고개까지 난해한 등로길을 어떻게 진행할지가 마음에 걸렸다.
선답자의 후기글을 답습하고 메모도 하면서 걸어온 한북수락지맥 마루금...
또 한 지맥의 발가욱을 남기며 후답자를 위해 자세하게 산행기를 적어본다.
'★ 기맥,지맥 > 한북수락지맥[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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