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白頭山)산행

2015. 9. 13. 20:12카테고리 없음

 

백두산(白頭山) 산행

 

여행장소 : 중국 창춘, 길림, 이도백화, 연길, 용정, 돈화, 도문(두만강공원)

여행일자 : 2015년 9월 9일~13일(4박5일)

여행일정 : 1) 인천국제공항-창춘국제공항(2시간5분)-길림(버스이용, 1시간소요)-길림 동래호텔

                 (3성급)

              2) 길림 동래호텔(3성급)-이도백화-백두산 장백폭포등정(온천지대-장백폭포-달문)-

                  백두산 북파-연길 군안호텔(준4성급)

              3) 연길 군안호텔(준4성급)-용정-대성중학교-해란강-일송정-도문(두문강변)-연길

                  희년정경호텔(3성급)

             4) 연길 희년정경호텔(3성급)-연길민속박물관-잡화상-돈화

             5) 연길-라텍스공장-농수산물공장-창춘국제공항(5시간30분)-인천국제공항(1시간35분)

 

백두산(白頭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삼지연군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걸쳐있는 화산이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중국어 간체: 长白山, 정체: 長白山, 병음: Chángbái shān, 장백산), 만주어로는 골민 샹기얀 알린(만주어: ᡤᠣᠯᠮᡳᠨ
ᡧᠠᠩᡤᡳᠶ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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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부른다. 높이는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이다. 산머리가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는데다가 흰색의 부석(浮石)들이 얹혀져 있어서 '흰머리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두산의 최고봉은 장군봉(將軍峰)이다.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대각봉, 녹명봉, 천문봉, 망천후 등 2,500m 미만인 봉우리도 여럿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 호천지(天池)가 있다.

백두산부터 지리산(智異山)까지 이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한반도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 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한민족만주족에게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었고, 환웅신시(神市)를 열고 단군이 태어난 성지라 여겨 신성시되었다. 또한, 백두산은 남만주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장백 산맥(창바이 산맥)의 주봉이기도 하다.

 

백두산 명칭의 기원

백두산이라는 말은 『고려사』성종 10년(981년)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13세기 말 문헌인 『삼국유사』, 『제왕운기』에는 태백산으로 나온다. 단군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을 무대로 언급하고 있다. 혼용되던 이름은 한국(조선)에서는 대체로 10세기 후반부터 이 산을 백두산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전까지 이 산은 한국에서 백산 또는 태백산, 불함산 등으로 불렸다.

 

중국측 장백산 명칭의 기원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민족(조선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청나라)에게도 나타난다. 만주족의 기원신화의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써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산해경의 기록에선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도태산(徒太山) 등 여러 이명으로 불리었다. 현대에는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통일되었는데, 이는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의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iyan alin)'을 의역한 것으로, 역사적으론 요, 금나라 시기부터 쓴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

단군신화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한 태백산은 대개 백두산으로 간주되어 왔다. 현존하는 태백산(太伯山)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제왕운기 · 세종실록지리지 · 동국여지승람 · 동국사략 · 동사강목'태백산(太白山)', '백두산(白頭山)', "백산(白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이 산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불렀으며 이 산 주변에 백산부(白山部)라는 고구려에 속한 말갈 세력이 존재했다.

고려 중기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평안도 지방)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태백산을 일연의 주장한 묘향산으로 보지 않고 백두산으로 본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으며, 부여, 옥저, 신라(원문: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요동 지방의 아사달에서 한반도 북부의 왕검성(지금의 평안도 일대)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지리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km, 깊이 850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 이 화산분출로 인한 화산재는 멀리 일본홋카이도에서도 발견된다. 천지는 둘레가 14km이고, 평균 깊이 213m, 최대 수심은 384m에 이르며, 10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보통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산의 정상은 매년 2cm씩 솟아오르는데, 이는 산의 중앙부 천지를 둘러싼 칼데라 환의 2500m 아래 마그마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최고봉인 장군봉은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고, 경사는 1,800m에 이르기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백두산 천지

천지(天池)는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화산호로, 쑹화 강(松花江)의 발원지이다. 그 수면은 해발 2,257m,면적은 9.165㎢,둘레 14.4km,평균 깊이 213.43m,최대 수심은 384m이며, 수량(水量)은 19억5,500만m³로서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가장 깊은 호수이다.

백두산 비룡폭포

천지의 물은 "승사하"(昇嗣河. 승차하(乘搓河)라고도 한다)를 통해 흐르다가 68m의 장대한 비룡폭포(장백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쑹화 강의 발원이 된다.

백두산은 쑹화 강 외에도 백두산 산정(山頂) 남쪽에서 압록강이, 무두봉(無頭峰, 높이 1,930m)의 북쪽 기슭에서 두만강이 발원하는 압록강두만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백두산 16봉

단위는 해발 고도(m)이다.

  • 백운봉(白云峰) 2691
  • 관일봉(觀日峰) 2670
  • 천문봉(天文峰: 응취봉,鷹嘴峰) 2670
  • 옥주봉(玉柱峰: 청석봉,青石峰) 2664
  • 화개봉(華蓋峰: 황암봉,黄岩峰) 2640
  • 천활봉(天豁峰) 2620
  • 자하봉(紫霞峰) 2618
  • 고준봉(孤隼峰) 2611
  • 녹명봉(鹿鳴峰: 지반봉,芝盤峰) 2603
  • 용문봉(龍門峰) 2595
  • 금병봉(錦屏峰) 2590
  • 직녀봉(織女峰) 2558
  • 제운봉(梯云峰) 2543
  • 철벽봉(鐵壁峰) 2560
  • 와호봉(卧虎峰) 2566
  • 관면봉(冠冕峰: 옥설봉,玉雪峰) 2525.8

기후

냉대 기후의 백두산 지역은 산지 기후의 특징을 지녀 월평균기온이 연간 34 ℃ 사이의 편차로 크게 변한다. 강수량은 연 1,400mm에 이르는데,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울은 춥고 매우 길며,여름은 온난 습윤하다.

백두산의 기후는 매우 변덕스럽다. 산 정상의 연평균 기온은 - 8.3 ℃이다. 여름은 18 ℃ 정도이지만, 엄동기는 -47.5 ℃까지 내려갈 때가 있다. 1월의 평균기온은 -24 ℃, 7월의 평균기온은 10 ℃이며, 9월 하순부터 이듬해 6월 초순까지 연중 8개월은 영하까지 내려가서 입산이 통제된다. 산 정상의 평균풍속은 초속 11.7 m, 12월에는 평균 초속 17.6 m의 강풍이 분다.

평균 습도는 74%, 연강수량은 1,400 mm 정도로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해양과의 거리가 가깝고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 많고 지세가 높기 때문에 눈이 많이 내린다.

 

 

[백두산 북파, 서파, 남파, 동파]

백두산 천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1962년 북한과 중국 간에 체결된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에 의해 백두산과 천지가 분할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백두산의 북서부는 중국에, 남동부는 북한에 속하게 되고, 천지의 54.5%는 북한이, 45.5%는 중국이 점하게 됐다.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km, 깊이 850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 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20)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天池)를 이루고, 이 천지(天池)는 쑹화강(松花江)의 발원지가 된다. 백두산은 쑹화강 외에도 백두산 산정(山頂) 남쪽에서 압록강이, 무두봉(無頭峰-1,930m)의 북쪽 기슭에서 두만강이 발원한다.

백두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병사봉(兵使峰-2,749m)이다. 북한에서는 장군봉이라고 하는데, 장군봉이라는 작명을 한 사람은 김정일이라고 한다. 김정일이 19638월 백두산을 방문했을 때, 백두산의 최고봉 이름이 병사봉이라는 소리를 듣고, "수령님은 백두산이 낳은 장군님이신데, 제일 높은 봉우리가 병사봉일 수는 없다. 장군봉으로 고치게" 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백두산의 병사봉은 병사(兵士)가 아니라 조선시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줄여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북한 학자들이 이를 모를 리 없겠지만 누구 말이라고 토를 달겠는가? 중국 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백운봉으로 높이는 2,691m이다.

 

인천국제공항 탑승구의 모습

1대간9정맥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백두대간 시발점인 백두산 산행을 위해 기획하고 여행사에 예약 및 회사에 휴가신청을 하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백두산탐방길에 접한다.

백두산에 가려면 북한땅으로 가지 못하고 중국 쪽으로 가는 길 밖에는 없다. 중국은 백두산에 북파(北坡), 서파, 남파, 세 개의 관광지를 개발했으나, 지금은 북파와 서파만을 개방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 여행사들은 백두산 북파, 서파 관광객들을 모객 하여, 안내를 하고 있다. *()는 중국어로 언덕, 비탈을 뜻한다.

연길 동래호텔의 모습

인천국제공항에서 수송후 약2시간의 여유시간에 면세점에서 아이들 선물을 준비하고는 아시아나항공편으로 창춘국제공항에 2시간5분만에 도착한다. 푸른 하늘이 아름답고 도심이 조용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옌지(Yenchi) , 延吉]

중국 지린 성[吉林省] 동부의 도시.

현급(縣級) 시로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행정중심지이며, 북한-중국 국경지역의 북부 산악지대에 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조선족이다. 19세기말까지 옌지의 대부분이 미개발지역이었다. 기본적으로 기름진 두만강 유역과 창바이 산맥[長白山脈]의 험준한 산줄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1820~50년에 중국인들이 불법적으로 이주해와서 살았으며, 1860년 중국정부는 러시아가 이곳을 잠식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이곳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이주금지조치를 해제했다. 그러나 이곳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국인은 소수가 이주해온 반면, 수많은 조선인이 이주해왔다. 1885년 특별관청이 설치되어 조선인 이주자들을 통제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1895년 옌지 현이 설치되었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한국과 중국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며, 1905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뒤부터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끊임없는 국경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다. 1930년대 일본 점령하에 투먼[圖們]에서 서쪽으로는 지린까지, 북쪽으로는 자무쓰[佳木斯]까지 철도가 개통되었다. 이 철도는 이 지역 발전에 큰 몫을 했는데, 그뒤 창바이 산맥의 삼림을 개발하기 위한 연장 노선이 건설되었다.

옌지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요한 상업 중심지이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식품가공·도정·착유(搾油)·아마가공 공장 등과 도자기·가구·편물을 비롯한 수많은 소비재 생산공장들이 있으며 농기구도 생산한다. 제2의 산업 중심지는 남서쪽으로 15㎞ 떨어진 룽징[龍井]으로, 여기에는 기계제작·제지소·발전소 등이 있다. 옌지는 중국 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이며, 한국어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다. 의과대학과 기타 일반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연변대학교가 있다.

연길 동래호텔의 모습

창춘에서 입국수속을 마치고는 여행사 가이드를 만나 전용차량으로 이동한다. 창춘국제공항에서 연길까지 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하여 5시간30분만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연길 동래호텔에서 바라본 연길역사의 모습

연길주변 상가의 모습

연길 동래호텔와 연길역사의 모습

연길 동래호텔앞 도로의 모습

연길 동래호텔 내부의 모습

투어 전용차량

고속도로 휴게소의 모습

전용차량의 모습

식당

연길동래호텔에서 조식으로 먹고는 고속도로을 이용하여 백두산천지로 3시간30분이 걸려 가던중 이도백화에 있는 중 식당에 들려 점심을 먹고는 백두산 천지로 향한다. 고속도로 옆으로 농심에서 만들어 놓은 생수공장도 보이고 숲속길로 죽들어가니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장백산기념 공원에서 인증샷

장백산기념 공원에서 인증샷

장백산기념 공원에서 인증샷

장백산기념 공원에서 인증샷

장백산기념 공원에서 인증샷

투어전용버스의 모습

장백산 입구의 모습

이곳에서 표를 구입하여 장백폭포 및 백두산 천치로 버스편으로 이용한다

하늘에서는 반갑지 않은 비가 내리고 정상부에는 먹구름이 있어 조망을 없을것 같다

가이드분이 재치로 친지보다는 장백폭포을 먼저 관람하고 백두산천지로 가자는 의견 제시

모두들 장백폭포을 올라서니 먹구름으로 장백폭포의 형상을 보지 못하고 그냥 발걸음을 돌리고

순환버스에 올라 환승센터로가서 10인승 승합차로 갈아타고 백두산 천지로 이동한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곳을 운전기사도 잘도 운전하며 굽은길을 올라간다.

손잡이를 꼭 잡고는 굽은길을 돌고 돌아 백두산천지 산장에 도착

먹구름이 많아 산장에서 휴식을 약30여분 취하다가

햇살이 나는것을 보고는 천지로 이동

역시나 백두산천지는 날 반겨주지

않고 먹구름이 사방으로

번져있었다.

장백산 입구에서 인증샷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먹구름이 많이 백두산 천지를 구경할수 있을지...

백두산 천지 매표소 입구에서 인증샷

 

장백폭포 순환버스로 이동

장폭폭포방향으로 인증샷

먹구름과 수증기로 인하여 장백폭포 조망을 못하고 계곡길 따라 트레킹을 한다

 

장백폭포 계곡길 트레킹하는 모습

장백폭포(長白瀑布 : 창바이푸뿌)

장백폭포는 장백산 즉 백두산의 대표적이고 가장 큰 폭포이다. 천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68미터의 낙차를 두고 떨어지며 아름다운 장관을 보이는 폭포이다. 겨울에도 얼지 않아 일년내내 끊임없이 폭포의 모습을 감상 할 수 있다. 멀리서도 폭포의 소리가 들릴 저도로 규모가 크며 떨어지는 물은 송화강으로 연결된다. 우리나라와, 북한에서는 폭포가 용이 승천하는 모양같다고 해서 비룡폭포라 하였으나, 중국의 땅으로 넘어가면서 장백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높이는 68미터 라고 하며, 백두산 북파 관광 일정에 빠질 수 없는 관광지 이다. 가는 길에는 백두산 온천지대가 자리하고 있어, 온천욕 또는 온천물에 삶은 계란을 사먹는 등 다른 재미도 솔솔하다. 천지에서 달문을 통해 흘러나온 물이 골짜기 사이로 흘다가 떨어지며 폭포를 이루고 있으며, 폭포 옆으로는 천지 물가를 갈 수 있는 달문계단이 있어 트래킹 코스로도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올라가는 계단에 살얼음이 많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장백폭포 관광하는 곳이 장백폭포에서 약 2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있어 가까운 모습보다는 전체적인 장백폭포의 원경을 감상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앞에는 장백폭포에서 흘러나온 물이 계곡 처럼 흐르고 있어 직접 천지물을 만져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관광지이다. 2012년 현재 장백폭포 주변에 공사중이라 다소 어수선하다.

 

장백폭포 이정표에서 우측방향 등로길 따라 달문까지 등산

나무테크에서 인증샷

장백폭포 배경으로 인증샷

날이 맑은날 장백폭포 배경으로 사진 찍는 이곳이 포인트지점인데 아쉽게도 날씨가 도움이 안되고...

 

장백산 온천지대에서 인증샷

등산을 마치고 날머리짖머에서 인증샷

 

 

백두산 천지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km, 깊이 850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1] 천지는 둘레가 14km이고, 평균 깊이 213m, 최대 수심은 384m에 이르며, 10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보통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천지는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50m)을 비롯해 망천후(2,712m)·백운봉(2,691m)·청석봉(2,662m)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데, 천지의 물은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북쪽의 달문을 통해 흘러내려 간다. 이 물은 "승사하"(昇嗣河. 승차하(乘搓河)라고도 한다)를 통해 흐르다가 68m의 장대한 비룡폭포(장백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쑹화 강의 발원이 된다.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km, 깊이 850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1] 천지는 둘레가 14km이고, 평균 깊이 213m, 최대 수심은 384m에 이르며, 10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보통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천지는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50m)을 비롯해 망천후(2,712m)·백운봉(2,691m)·청석봉(2,662m)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데, 천지의 물은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북쪽의 달문을 통해 흘러내려 간다. 이 물은 "승사하"(昇嗣河. 승차하(乘搓河)라고도 한다)를 통해 흐르다가 68m의 장대한 비룡폭포(장백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쑹화 강의 발원이 된다.

천지(天池)는 백두산 정상에 있는 화산호로, 쑹화 강(松花江)의 발원지이다.

천지의 수면은 해발 2,257m,면적은 9.165㎢,둘레 14.4km,평균 깊이 213.43m,최대 수심은 384m이며, 수량(水量)은 19억5,500만m³로서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가장 깊은 호수이다. 흑수(黑水)라는 별칭이 있다

 

 

 

 

 

 

 

 

 

 

 

 

 

 

 

 

 

[룽징 시 [Longjing, Jilin],용정(龙井, 龍井)]

용정(중국어 간체: 龙井, 정체: 龍井, 병음: Lóngjǐng, ·문화어: 룡정, 표준어: 용정) 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면적은 2591km², 인구는 26만여 명이고, 전체 인구 중 조선족 비율이 67%에 이른다.가곡 <선구자>로 알려진 정자 일송정이 있으며, 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그의 무덤이 있다.동남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접해 있다. 동북쪽으로는 연길, 도문, 서남쪽으로는 화룡, 서북쪽으로는 안도에 접해 있다. 백두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시 가운데로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흐른다.

 

룽징제일중학교 [Longjing Middle School, 龍井第一中學校]

민족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로 유명하며, 재야 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와 정일권 전 총리의 모교이기도 하다. 지금도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현재는 다른...

룽징중학 [龍井中學]

룽징 중학은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학교이다. 항일민족시인인 윤동주의 모교인 룽징 중학은 1946년 광명중학교, 은진중학교, 대성중학교룽징...

개교시기 1946년

용정 대성중학교방문

호텔에서 아침을 일찍 먹고는 용정으로 출발 다리공사장에서 트럭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버스을 돌려

우회하여 용정에 도착하고 대성중학교에서 안내분의 설명을 들어며 역사의 현장을 관람하였다.

관람을 마치고는 식당으로 옮겨 늦은 점심식사을 마치고 북녁이 가까이 보이는 두만강변으로 이동한다. 

윤동주 시비()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 11월 20일 창작 )

 

 윤동주 [尹東柱, 1917.12.30 ~ 1945.2.16]

네이버캐스트 인물 > 독립운동가
윤동주는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도 아니었고,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에...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북간도(北間島) 주요작품 《서시(序詩)》,《또 다른 고향...

대성중학교 표지석

대성중학교의 모습들...

점심식사 장소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면 주인장이 한국에서 오래 살다가 이곳에 왔어 식당을 운영한다고 한다. 오늘 메뉴는 김치찌게인데 가이드가 맛나다고는 하지만 약간의 향신료 냄새가 나고 흉내는 내고 있지만

맛은 별로다. 그래도 이국땅에서 김치찌게랑 공기밥을 먹는것은 행복이라 한그릇을 비우고 두만강으로 출발한다

조선족 발물관 앞에서 인증샷

 

 

 

 

 

박물관 실내의 모습들...

중국과 북한의 경계지역인 도문 두만강공원 표지석앞에서 인증샷

두만강 강변의 폭은 20~30m 정도면 물쌀은 급한편이고 수영을 하여 건널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두만강공원 바로 아래에는 두만강을 관광할수 잇는 땜목배가 있어 상류지역가지 갈수 있지만 배을 타지 않고 주변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왔다. 땜목배 비용은 미국돈 15달러이면 약30여분이 소요된다.

두만강공원 앞에서 인증샷

북한을 바로 앞에두고 찾아가지 못하고...

백두산을 북한으로 통해 올라가면 외화도 벌고 서로 서로가 좋을것을

중국에게 배불리 먹는이 꼴이되는 사항이다.

이제쯤 북녁땅을 이용하여 나머지 백두대간길을 걸어볼수 있을지...

길림시 희년정경호텔의 모습

[지린(Chi-lin) , 길림(林)]

중국 북동부 길림성 중부 위치한 도시

중국 북동부 길림성() 중부 위치한 도시. 길림성 성도()로서, 목재, 약재, 담배 따위 집산지이다. 중국어Jilin[]’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이다.

지구급(地區級) 시로, 1970년대초 이전의 융지[永吉] 지구를 망라하면서 영역이 더 넓어졌다. 쑹화 강[松花江] 상류의 왼쪽 기슭에 있으며 주변은 구릉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지린 성의 성도인 창춘[長春]에서는 동쪽으로 100㎞ 떨어져 있다.

지린은 둥베이[東北:옛 이름은 만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본래는 만주의 여진족인 울라부의 영역에 속한 작은 마을이었다. 1651년 청(淸)나라는 러시아가 헤이룽 강[黑龍江] 지역으로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 조선소를 세우고 헤이룽 강의 지류인 쑹화 강의 방어와 운송을 위해 쓸 배를 만들었다. 1973년 지린은 요새화되었으며, 1676년에는 영고탑(寧古塔:지금의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닝안[寧安])에 있던 청군 사령부가 옮겨왔다. 시가지는 1723~34년에 일시적으로 일반행정구역인 주(州)로 되었으나, 성벽이 둘러지고 부로 승격한 1882년까지는 군사지역이었다. 17세기말 이 지역에 역참제도가 세워졌으나, 1913년 창춘으로 가는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육지 교통이 불편했다. 이 철로는 나중에 한반도와의 국경에 있는 투먼[圖們]까지 연장되었고, 지린과 선양[瀋陽]을 연결하는 또다른 주요노선도 가설되었다. 지린 주변지역은 빠르게 개척되어 농산물과 목재의 집산지이자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착유·제분·양조·목재·성냥 제조와 같은 다양한 경공업도 발전했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1931년 지린의 인구는 10만 명가량이었으나, 창춘이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새 수도가 되면서 빠르게 성장하자 그 그늘에 가려졌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산업성장이 대규모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지린 근처 쑹화 강변의 펑만[豊滿]에 거대한 수력발전소를 세웠으며, 지린에는 각종 공장을 세웠다. 주요생산품은 합성고무·석유·화학제품·종이 등이다.

지린 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시기와 중국 내전기간에 크게 파괴되었다. 1949년 이래로 산업 중심지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펑만 댐은 복구되었으며, 배전망을 연결하여 하얼빈[哈爾濱]과 선양에도 전력을 공급한다.

1953~57년 제1차 5개년계획 아래 대규모 화학공장 3개와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목재·성냥 산업도 확장되었고, 시멘트, 유리, 벽돌 및 타일과 같은 건축 자재들도 대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나는 사탕무를 원료로 하는 제당업 및 착유산업도 중요한 역활을 한다. 1950년대에는 동쪽의 자오허[蛟河] 지방에서 나는 석탄을 이용하여 열 발전소도 가동하기 시작했다.

 

길림시내 야경의 모습

두만강 관광을 마치고 길림으로 돌아와 마샤지샵(30달러)에서 1시간30여분 마사지을 받고 점심을 먹은 식당으로 이동한다. 오늘 저녁식사는 옵션으로 송이버섯가 삼겹살 1인당 미국돈 30달러 지불하고 먹지만 나는 어제 먹은 음식으로 하루종일 설사를 동반한 고열로 인하여 먹지 못하고 식당방 옆에서 누워 있다가 주인이 만들어준 죽을 먹고는 간신지 몸을 움직여본다. 장염인가...너무도 아프고 계속으로 돌아서면 설사가 나온다. 오늘 따라 길림시내가 상수도관 교체로 인하여 단수상태 모든 건물에서는 물이 없다 ㅠㅠ

길림 먹거리거리 표지석 앞에서 인증샷

우측편으로 농산물 직판장이 있어 구경을 하고는 라텍스공장으로 이동한다.

길림 음식거리에서 인증샷

휴게소 앞에서 인증샷

휴게소 앞에 있는 표지석에서 인증샷

창춘국제공항으로 이동중 시골풍경

창춘국제공항으로 이동중 시골풍경

창춘국제공항 도착

 

[창춘(Ch'ang-ch'un) , 長春]

중국 지린 성[吉林省]의 성도.

지구급(地區級) 시로 4개 현(縣)을 관할한다.

창춘 주변지역은 원래 군사단위인 몽골 기(旗)의 방목지였다. 1791년 청(淸)나라 조정은 몽골 군주에게 이 지역을 중국인 이주민들에게 개방할 것을 요구했으며 마침내 승인을 얻었다. 그결과 1799년 이미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산둥 성[山東省] 및 허베이 성[河北省] 북부 출신의 많은 농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창춘 청(廳)이 세워졌다. 1802년 중국인 정착민을 책임지는 청장이 임명되었으며 1825년에는 창춘 청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예전에 이곳은 관성자(寬城子)라고 불렸다.

1882년 창춘 부(府)로 승격했으며 19세기말에는 이주민의 증가 속도에 맞추어 여러 개의 현으로 분할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무엇보다 지린 시에 딸린 행정중심지였으며, 그 지역의 집산지이자 유통 중심지이기도 했다. 1901년 중국 동부철도의 완공과 함께 새로운 도약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1894~95년 청일전쟁의 결과 창춘 이남의 철도구역은 일본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1906년 이후로 이 마을은 일본이 지배하는 남만주철도 구간의 북쪽 한계선이 되었다. 이당시에 옛 중국인 도시 북쪽에 일본인 역전마을이 생기면서 점차 커졌다. 일본이 만주를 강점하고 있던 1931년, 일본 광동군 사령부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행정수도를 무크덴(지금의 선양[沈陽])에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32년 새 수도로 창춘이 결정되었으며 신징[新京]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널찍한 도로와 많은 공지를 갖춘 넓은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1938년에는 이곳에 국립대학교가 세워졌다.

신징은 행정·문화·정치 중심지로 설계된 반면, 산업의 발전은 주로 하얼빈[哈爾濱]·지린·선양·단둥[丹東]에 집중되었다. 신징에는 단지 경공업만이 어느 정도 발전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비상한 속도로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말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로 인해 창춘은 크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에 소련군대가 이 도시를 점령하고 심하게 파괴·약탈했다. 1946년 3월 소련군이 철수하고 난 뒤 몇 주 동안은 중국공산당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5월말에 중국 국부군이 이곳에 진입했다. 그뒤 남은 달 동안에 일본인 주민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국민당이 창춘 시 자체를 통제하기는 했으나 주변 농촌지역에 대한 통제권은 공산당이 쥐고 있었다. 공산당은 농촌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게릴라전을 벌였는데 이로 인해 창춘은 다시 파괴되었다. 1948년 공산당 세력이 다시 창춘을 장악했다.

공산당의 지배하에서 창춘의 도시성격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여전히 행정중심지이자 지린 성의 성도이기는 했지만, 중국 둥베이[東北:옛 이름은 만주] 지방에서의 산업팽창을 위한 주요중심지가 되었다. 예전에는 식품가공·목재가공·봉제·경엔지니어링에 종사하는 소규모 공장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중기계공업의 중심지로 되었다. 공업생산량이 1948~57년 사이에 24배로 증가했다. 또 창춘은 중국 자동차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트럭·트랙터·자동차 등 다양한 차종을 생산하고 있으며, 부속품들을 공급하는 많은 부속공장도 세워졌다.

타이어 버스 열차를 생산하는 공장들도 있다. 창춘은 또한 공작기계 제작, 정밀 엔지니어링, 악기 제조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970년대초에는 대규모 화학 및 제약 공업도 발달했다. 창춘은 철도로 선양·치치하얼[齊齊哈爾]·하얼빈·지린과 연결된다. 창춘은 지린 성에서 첫째가는 문화·교육 중심지이다.

옛 일본대학교는 지린대학교로 바뀌었으며, 중국과학원의 지부가 이곳에 있다. 사범대학교 및 공업대학과 농업대학,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기술대학, 연구소 등 다른 교육기관도 있다.

창춘국제공항 게이트에서 인증샷

모든 일정을 마치고 창춘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일행들이랑 입국수속을 받고는 아시아나항공으로 서울 인천국제공항으로 1시간35분만에 도착한다. 출발할때는 2시간5분이 소용되었는데 돌아올때는 30여분이 단축되었다.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여 천지을 볼수 있다는 실망감에 허탈하였지만. 정상의 일기가 무상하여 기다린 보람에 천지의 문이 열리고 3덕을 쌓아야 볼수 있다는 백두산 천지을 보고 돌아오는 발걸이 가볍다. 그러나 웅장한장백폭포를 보지못해 아쉬움이...